그나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 라틴어: Gnaeus Fulvius Flaccus | |
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출생지 | 이탈리아 로마 |
사망지 | 미상 |
지위 | 노빌레스 |
국가 | 로마 공화정 |
가족 |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버지)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형)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형제) 호스틸리아 콰르타(아내)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아들) |
참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직업 | 로마 공화정 법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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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장군. 1차 헤르도니아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에게 참패한 뒤 해외로 망명했다.2. 생애
노빌레스 집안인 풀비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아버지는 기원전 264년 집정관을 역임한 마르쿠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였고, 형은 집정관을 4번 역임하면서 한니발 바르카와 대적한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이다. 또한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라는 형제를 두었는데, 그는 퀸투스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형 퀸투스가 3번째 집정관을 맡아 카푸아 공방전을 치르고 있던 기원전 212년, 그는 법무관에 선출되어 아풀리아 전선을 맡았다. 그는 2개 군단 18,000명을 이끌고 카르타고에 넘어간 아풀리아의 일부 도시를 성공적으로 공략했다.그러나 한니발이 카푸아에 묶여 있느라 자신에게 오지 못하리라 여겨 경계를 게을리했고, 한니발은 자신의 근거지인 루카니아를 위협하는 그부터 쓸어버리기로 하고 군대를 그쪽으로 이동시켰다. 한니발이 접근해오자, 그는 헤르도니아 평원에서 군대를 규합해 이에 맞섰다. 그러나 한니발이 약 3,000명의 경무장 보병을 좌측면으로 보내 숲과 농장에 매복시킨 걸 눈치채지 못했다. 전투가 개시되자, 숲과 농장에 매복해던 적이 로마군의 측면을 습격했다. 여기에 2,000 가량의 누미디아 기병이 로마군의 후방 도로를 점거해 퇴로를 차단했다. 로마군은 곧 궤멸되어 불과 2,000명만이 가까스로 탈출했다. 그는 200명의 기병과 함께 전장에서 탈출했다.
패배 소식을 접한 로마 정계는 분노했다. 희대의 명장 한니발에게 패한 것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한니발이 접근할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고, 적의 매복을 사전에 감지하지 못했으며, 병사들을 수습할 생각도 않고 먼저 이탈해버리는 등 무능한 행보로 일관해 아까운 장병들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기원전 212-211년 겨울 형의 집정관 임기가 끝난 직후 호민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블라수스에게 고발당했다.
플라쿠스는 변호 연설에서 패배 원인을 병사들 탓으로 돌리려 했다. 자신은 신중하게 전투 준비를 하고 전투를 잘 이끌었는데, 병사들이 제멋대로 달아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증인이 그가 전투 도중 제일 먼저 도망쳤다고 진술하였고, 그는 막대한 벌금을 물고 정계에서 은퇴를 강요당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당시 카푸아 공성전을 이어가고 있던 형 퀸투스는 동생을 카푸아 공성전에 참여시켜서, 공을 세워 속죄하게 해달라고 청했지만 거부당했다. 결국 그는 판결이 내리기 전에 타르퀴니아로 망명해야 했다.
기원전 209년 4번째 집정관이 된 형 퀸투스의 레가투스로서 로마에 귀환하였고, 에트루리아에 가서 장정들을 징발해 형의 군단에 합류시키게 하였다.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호스틸리아 콰르타와 결혼하여 아들 퀸투스 풀비우스 플라쿠스를 낳았다. 이 인물은 기원전 180년 집정관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