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자경(子敬)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0년 8월 27일 |
충청도 연산현 식한면 석계리 (현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석계리) | |
사망 | 1955년 4월 14일 (향년 64세) |
충청남도 논산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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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권충락은 1890년 8월 27일 충청도 연산현 식한면 석계리(현 충청남도 계룡시 신도안면 석계리)에서 아버지 권하현(權夏鉉)과 어머니 김해 김씨 김윤조(金允祚)의 딸 사이의 6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일찍이 중국으로 망명했고, 1920년경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했다. 이후 1920년 11월 이만준(李萬俊)과 함께 20만원의 군자금 모집을 위해 단장 김호의 명을 받고 한교회(韓僑會) 회장 손경헌(孫庚憲)을 방문하여 그의 휘하에 있던 김인제(金仁濟)·최성규(崔聖奎)·황문익(黃文益) 등과 권총 5정 및 실탄 90발을 소지하고 국내로 잠입하기로 하였다.
1921년 음력 1월 손경헌으로부터 권총 2정과 탄환 수십발을 받아 가지고 함경북도를 거쳐 국내에 잠입한 그는 밀양에서 이만준과 재회하고 대구, 밀양, 양산 등지를 거점으로 1922년 2월까지 다수의 동지를 규합했다. 1921년 1월 하순, 권충락은 동지들과 대구 양한위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을 협의하였다. 이튿날 권총 2정과 약간의 탄환을 소지하고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모이기로 했지만 안내를 담당한 우홍기가 오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8월 말경 권안이(權安伊)의 자택에서 이만준으로부터 중국 상하이에 가서 독립운동을 할 것을 권유받고 이에 동참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해 음력 10월경 이만준과 함께 권정락(權政洛)의 집에서 김종만·홍종락·박재화에게 각자의 재산을 처분하고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하였다. 그들은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경북 영천군 신령면에 거주하는 권주경(權周慶)을 방문하였으나 부재중이라 대구로 돌아왔다.
1922년 1월 하순, 권충락은 홍종락과 함께 대구 달성공원에서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 사는 부호 최재교(崔在敎)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3시 각자 최재교의 집에 가서 “우리들은 상해 임시정부 파견 군자금 모집원이다”라고 하여 240원을 받았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군자금 모집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1922년 5월 경북경찰부에 의해 홍종락 등이 군위(軍威)에서 체포되면서 관련자 28명이 일경에 붙잡혀 흥업단의 국내 조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체포된 그는 1923년 1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았고 이에 불복하여 1924년 대구복심법원에 상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르고 1928년 8월 20일 출옥했다. 이후 1943년 3월 9일 대구의 결혼피로연 석상에서 일제의 새끼가마니에 대한 강제적 공출제도를 비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였다고 하여 다시 체포되었다.
1943년 5월 14일 소위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혐의로 구치감(拘置監)에 입감되어 그해 7월 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른 후 1944년 1월 1일 출감하였다. 이후 논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5년 4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권충락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복야공파 산립(山立)계 3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