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사문(士文) / 구산(龜山)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50년 7월 18일 |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 명리 (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명리)[2] | |
사망 | 1903년 8월 17일 (향년 53세) |
경상북도 안동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
상훈 |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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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50년 7월 18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명리에서 아버지 권도수(權道銖)와 어머니 의성 김씨 김성수(金聖洙)의 딸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3]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인근의 이개리 보현마을로 이주하였다.그는 일본군의 경복궁 무단점령 및 단발령, 을미사변 등 연이은 사태를 목도하면서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1896년 1월 17일 안동의 권세연 의진에 가담하여 서기(書記)로 활동했다. 이들 의병진은 안동의 관찰부(觀察府)를 점령하고 무기를 빼앗아 안동 일대를 장악하였는데, 이때 그는 의진의 포군(砲軍)을 모집하고 포고문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열흘 뒤 같은 달 28일, 안동부 관찰사 김석중(金奭中)이 지방과 한성부의 관군을 규합한 뒤 안동부로 쳐들어오자, 권세연 의병진의 전투력은 너무 약하여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고, 결국 1월 29일 안동부를 내주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권세연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의병장의 직임을 사퇴하자, 권제영 또한 귀향하였다.
1903년 8월 17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별세하여 그 유해는 안동시 녹전면 사천리 박달산에 안장되었다가,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은 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저서로 『구산유고(龜山遺稿)』 제5권과 권세연 의진의 서기로 활동할 당시 1896년 1월 3일부터 3월 9일까지 40일 동안의 활동을 기록한「의중일기(義中日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