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병장, 권기수
성명 | 권기수(權夔洙) |
생몰 | 미상 ~ 1896년 9월 1일 |
출생지 | 미 |
사망지 | - |
추서 | 건국훈장 애국장 |
유출생 연도와 출신지는 자료가 전해지지않아 확인할 수 없다. 전직 교관(敎官)으로 1896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다. 유인석은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그해 11월 단발령을 강제로 실시하자 문인들을 제천 장담에 모아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알려주고, 자신은 ‘도해(渡海)’의 길을 택하였다. 거의(擧義)를 주장한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 등은 원주 안창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단양전투 후 의병 상황이 어렵게 되자 유인석을 찾아가 거의할 것을 요청하였다. 유인석은 요동행을 포기하고 1896년 1월 영월에서 총대장에 추대되어 호좌의진을 이끌었다.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이라는 격문을 보내 궐기를 호소하고 지휘체계를 정비하여 각지에서 모인 유생과 의병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1896년 2월 충주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충주성 점령은 각지에 의병 봉기를 고무하는 요인이 되었다. 호좌의진의 일원으로 충주성 점령과 충주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단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 관군과 합세한 일본군의 격렬한 공세에 저항하며 공방전을 펼칠 때도 참여하는 등 제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한편, 유인석은 충주성을 근거지로 삼아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항쟁을 전개하면서, 서상렬(徐相烈), 이범직(李範稷)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을 모으게 하고, 일본의 병참기지를 공격하거나 친일 관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의 맹공과 보급로의 차단으로 인해 결국 그해 3월 충주성을 내어주고 제천으로 이동하였다. 유인석은 관군과 일본군을 분리하려고 종사 이조승(李肇承)의 형인 이주승(李胄承)을 서울로 보내 고종에게 호좌의진이 비도(匪徒)가 아님을 피력하고, 관군이 더 호좌의진을 공격하지 않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관군과 일본군의 총공세에 밀려 서행을 결정하였다.
유인석이 서북 지방으로 가서 군사를 불러 모아 다시 의병 항쟁을 전개하려고 서행 길에 오를 때 동행하며, 이범직의 참모관(叅謀官)으로 활동하였다. 이범직과 함께 선발대로서 후군장 신지수(申芝秀)와 함께 중국의 원조를 받을 계획으로 평북 강계(江界)를 거쳐 요동으로 넘어갔다. 그 과정에서도 친일 성향의 관찰사, 군수 등 지방관의 핍박과 방해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요동으로 넘어간 이후에도 그곳의 수장 왕무림(王茂林)에게 의심을 사고 모욕을 당하였다. 이처럼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신지수가 “우리가 위험한 고비를 겪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으나 유선생(유인석)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으로 오게 되면 화난(禍難)을 측량할 수 없으니, 누가 능히 다시 강을 건너 큰 진을 평북 초산(楚山) 경계에서 맞아 전도(前導)가 되어 강을 건너겠는가”라고 하자, 이때 이범직과 함께 지원하여 본진의 길을 먼저 가서 안내하고자 초산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던 중 1896년 8월 24일 의병의 동정을 정탐하기 위해 국경 지대에서 숨어서 기다리던 조승현(趙承顯) 부대에 의해 이범직, 권병선(權秉善) 등 2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조승현은 끝까지 이들을 회유하였으나, “남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음이 삶보다 영광일 것이다(男兒到此 死有榮於生者也)”라고 말하며 조승현을 꾸짖고, 1896년 9월 1일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2. 논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권기수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권쌍라(權雙羅), 권쌍희(權雙喜), 권기수(權夔洙) |
자 / 호 | 성후(聖厚) / 청계(靑溪) |
본관 | 안동 권씨[1] |
출생 | 1893년 1월 21일 |
충청도 은진현 대조곡면 용산리 (現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 | |
사망 | 1922년 1월 9일 |
함흥형무소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권기수는 1893년 1월 21일 충청도 은진현 대조곡면 용산리(현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 용산리)에서 독립유공자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 때 활약한 아버지 권종해와 어머니 밀양 박씨 박기석(朴基錫)의 딸 사이의 2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을미의병을 일으킨 권인규의 손자이기도 하다. 출생 후 자식이 없던 큰아버지 권종룡(權鍾龍)에 입양되었다.
그는 권종해의 의병에 가담해 여러 전투에 참가했다가 일제 헌병대에게 잡혀 무수한 고통을 당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독립선언서를 받아보고 동지들과 함께 영월·평창·정선지역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게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당하고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2년 1월 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권기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추밀공파 시창(始昌)계 3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