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仇宗吉, 具宗吉[1](1363-?)
창원문화원 향토사연구회 연구자료 게시물에 따르면 1363년(공민왕 12) 당시 의창군이었던 창원에서 태어났고 사망 년도는 미상이며 자는 자안(子安)이고 호는 천곡(川谷)이다. 늙어서도 벼슬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만 힘쓰다가 1422년(세종 4) 별시(別試)인 정시(庭試)에 합격하고 정9품 집현전 정자가 되었다가 1423년(세종 5) 종3품 집현전 직제학이 되고 이어서 종2품 집현전 제학이 되었다고 한다. 1426년(세종 8)부터 1431년(세종 13)까지 영의정부사였다고 한다.
2. 의문
이 인물은 영의정이었다고 알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이나 국조인물고와 같이 현존하는 조선 시대 고문헌에서 확인할 수 없다. 이 인물이 창원 구씨 족보 이외의 현존하는 데이터화된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적어도 1933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확인되는 목록 3권 원집(原集) 48권 합 25책으로 구성된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5 ~ 1931)의 유고집인 『소눌선생문집』((小訥先生文集)에서 묘갈명(墓碣銘) 150개의 내용이 기록된 권36 ~ 41 중 권40에 직제학 천곡 구공 묘갈명(直提學川谷具公墓碣銘)이 실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는 영의정부사 이직이 좌의정으로 옮긴 1426년부터, 그 1년 뒤 좌의정을 황희에게 넘겨준 후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 자격으로 조정에 참여하던 이직이 죽고, 황희가 영의정부사가 되는 1431년까지 영의정으로 기록된 인물이 없다. 이 기간은 인터넷에 이 인물이 영의정부사를 역임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기간과 일치한다.네이버 지식백과에는 향토문화전자대전에만 〈디지철창원문화대전 - 구종길〉이라는 출처를 기반으로 인물 설명이 있고, 두산백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역 국조인물고에는 해당 인물이 없다. 위키백과에는 영의정 문서의 역대 영의정 항목에 역시 1426 ~ 1431년에 영의정을 역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총 247대의 영의정 목록 중 이 인물만 개별 문서가 없다. 따라서 구종길을 검색하면 이 인물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는 창원 구씨에 대한 검색 결과를 더 많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