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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14:04:57

구수정

파일:구수정.jpg

1. 개요2. 상세3. 평가4. 논란5. 같이 보기

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운동가.

2. 상세

대학 시절 운동권이었으며 1988년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1991년 소련 붕괴를 계기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사회주의 국가에 직접 가서 확인해 보자는 생각에 베트남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1996년부터 베트남 호찌민시 국가대학 역사학 석사과정에 재학했으며 베트남에서 박사학위 논문까지 땄다. 2008년에 박사학위를 베트남 호치민 대학교에서 취득했으며 논문 주제는 '1955년부터 2005년까지의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다.#

2011년 아맙에서 베트남 평화기행을 운영해 왔고 한베평화재단에서 상임이사를 맡아 활동했다.

3. 평가

한겨레21 기고를 통해 공론화한 고자이 마을 학살 사건#

마을 위령탑 뒤 회랑에 그려진 벽화에 나오는 군인의 부대 마크는 한국의 맹호부대와 유사하다고 주장했는데 생존자들의 기억에 의존해 만들어진 벽화이므로 실제 맹호부대 마크와 다른 마크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김효성 기자의 기사#에 실린 반론 기사에 따르면 남베트남레인저 부대라고 한다.# ARVN Rangers[1][2] 학살 사건의 날짜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막연하게 1966년이었다가 나중에 1966년 6월이었다가 현재는 한국군 비호 6호작전날로 계속 바뀌는 실정이다.

1999년 한겨레21에 린선사 승려들의 1997년 증언을 실었다. 푸 승려와 응웬티유엔한에 의하면 한국군이 승려들을 남녀 구분 없이 살해했다는 주장인데 해당 사건은 1969년 11월 남베트남에서도 주체가 불분명한 것으로 판단하여 발표를 보류하였다. 당시 남베트남 보도에 따르면 승려가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증언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이후 추가 조사결과 1971년 11월 린선사 승려들이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에게 베트콩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베트콩들이 린선사에 들어가 승려들을 살해하고 이것을 한국군에게 뒤집어 씌운 사건인 것으로 밝혀졌다. 1972년에도 駐越韓國軍(주월한국군)의 民間(민간)학살누명의 제목으로 이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이 있다.

2014년에는 일본 우익 주간지 주간문춘(슈칸분슌)[3]과 인터뷰하여 2014년 10월 16일자 "조국의 죄를 폭로하여 '일본의 앞잡이'로 매도당한 나"라는 기사로# 논란이 되었다.

4. 논란

베트남 전쟁에는 베트콩뿐만 아니라 월맹 정규군도 참가 했는데 대표적으로 짜빈동 전투는 월맹 정규군 제2사단 1연대가 치른 전투다.

2018년 8월 1일 방영한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구수정은 대만과 한국이 미국의 예속국가였다고 주장했다. 대만 참전병은 31명, 한국군은 1964년 9월 22일 제1이동외과병원 및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이후 1974년 3월 철수할 때까지 총 4번의 파병을 통해 32만 5천여 명이 파병되었으며 전사자는 총 5천여 명[4]이라고 했다. 미국과 한국의 관계에 대한 논점

한국군이 민간인 학살을 했다는 주장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한국군 참전용사들을 중심으로 여러 반박을 낳은 바 있다.[5][6] 반면 사학 및 사회학 전공자들 중에는 적잖은 이들이 구수정의 관련 연구를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국 현대사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서중석 교수나 현재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는 박태균 교수는 구수정의 연구를 비난한 적이 없다.[7] 오히려 진실을 밝혔다고 보는 입장이며 이쪽과 교류를 많이 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을 학위 논문 주제로 작성한 윤충로도 마찬가지며, 북한과 북베트남 관계 그리고 남한과 남베트남 관계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작성한 베트남측 연구자 도미엔 또한 선행연구로써 구수정의 학위 논문을 참고했다.서중석의 인터뷰, 기사

5. 같이 보기



[1] 고자이 학살은 증오비에 그려진 군대의 마크가 남베트남 레인저 부대가 아니냐는 논란이 있지만 당시 한국군이 고자이 근처에서 작전을 안 벌인 것은 아니었다. 채명신은 자서전 288쪽에 “이 작전 기간 중 전과는 적 사살 92명, 포로 33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소총은 불과 4정 노획으로 그쳐 이 문제에 대한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무기가 너무 없다면 사살자의 일부가 양민이 아닌가 하는 오해를 불러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갑연대의 이번 작전지역인 빈케군 빈호아강 북방 평야지대에 산재해 있는 부락은 거의가 베트콩의 전략촌이기 때문에 사살자가 민간인이 아닌 것은 거의 확실하다. 즉 교전 중 사살했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심각한 분석이 요구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작전상 맹호부대는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벌였는데 기록된 베트콩 사살 숫자에 비해 노획된 소총 숫자가 불과 4정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을 연구한 미국의 학자 닉 터스(Nick Turse)의 경우 이와 비슷한 사건을 예시로 들며 미군이 한 지역에서 벌인 작전으로 베트콩을 사살한 숫자가 588명인 데 반해 발견된 무기는 10개밖에 안 됐고 대다수 마을 사람들은 미군의 함포사격 및 폭격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죽었다고 증언했다. 따라서 마크 관련한 논란은 있어도 고지이 학살 지역에 한국군이 주둔하지 않았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한국군이 근처에 주둔하거나 군사작전을 벌였다는게 학살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2] 일단 구수정의 주장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못해 황당할 지경인데, 구수정은 한국군이 폭격기를 동원해 학살했다고 주장했는데 한국군은 폭격기를 아예 보유하지도 않았고(심지어 지금도 없다) 공중폭격은 전적으로 미군에게 의존했다. 증거가 명확하다면 우리 역사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지만,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무기를(폭격기는 기본적으로 압도적인 제공권이 있어야 쓸 수 있는 병기다. 한국군이 폭격기를 운용했다는건 그만큼 제공권에 자신 있는 세계 최강급의 공군 전력을 가진 나라였다는 소리인데, 60년대 한국군은 폭격기는 꿈도 못꾸는 아직도 m1 개런드로 무장하는 가난하기 짝이 없는 군대였다. 60년대에 한국이 폭격기라는 무기와 그 유지보수 체계를 해외 파병 보낸다는 돈지랄을 할 역량이 있는 나라였으면 80년대에 일본 대신 한국이 미국 경제를 위협했을거다.) 사용해 학살을 했다고 하니...[3] 일반적으로는 연예계 가십 기사 위주로 내보내지만 한국 관련 기사에 있어서는 극우적인 입장이며 한국군이 베트남 전쟁 당시 현지인을 동원하여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등의 가십성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4] 박태균, 『베트남 전쟁』, 한겨레출판, 5p[5] 예를 들어 한국군 참전 용사들이 쓴 베트남 관련 자료에는 논란이 있는 고자이 학살에 대해 마크를 중심으로 한국군이 아닌 남베트남군이라고 반론을 제시하기도 했다. 한베평화재단쪽에서 제시한 나머지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6] 물론 구수정이 제시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주장에 대한 반박 내지는 비난은 한국의 역사학계나 사회학계의 공식적인 입장이나 주류적인 흐름은 아니다.[7] 박태균은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 대한민국이 반성해야 한다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