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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23 21:10:01

구수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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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01년 2월 1일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사망 1920년 5월 1일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유공자 제2묘역
본관 능주 구씨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사후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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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 동래군 기장읍에서 3·1 운동에 호응하는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2. 생애

1901년 2월 1일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동부리에서 아버지 구연경과 어머니 박정옥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능주이다.[1][2]

1919년 3월 13일 당시 금융업에 종사하던 구수암은 김도엽·권철암·김수룡·최기복·이택규·박공표 등과 함께 서재선과 접촉했다. 서재선은 마부 김수문이 동래로부터 가지고 온 기미독립선언서를 확보하고 있었다. 일행은 기장읍성 남문 터 축구장에서 선언서를 같이 낭독하고 기장지역의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이를 위한 독립선언서의 인쇄 및 배포를 위해 동래군 기장면 서기 최창용의 협조를 얻어 등사판과 등사용 원지를 구해 400여 장을 등사하였다.[3][4]

같은 해 4월 5일 일행은 ‘양심발원良心發原 인도적 자유민족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 깃발과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단'이라고 크게 쓴 거대한 깃발을 만들어 등사한 선언서와 함께 휴대하고 기장시장에 이르렀다. 선언서를 시장에서 배포하면서 현장에 모여 있는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기장 주재 경찰이 공포를 쏘면서 위협했으나 시위대는 흩어지지 않았다. 상황을 전파받은 동래경찰서에서 증원부대를 투입하여 만세운동을 진압하였고, 구수암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동지들과 함께 포승줄에 묶인 상태로 기장읍에서 대변포(大邊浦)까지 도보로 호송되어 야간에 배로 부산항에 도착하여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5][6][7]

같은 해 5월 1일 구수암 등은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6월 11일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8]
(전략) 김도엽·권철암·구수암·김수룡·최기복·이택규·최창용에 대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피고 최창용에 대한 횡령 각 피고 사건에 대하여 대정 8년 5월 1일 부산지방법원에서의 각 피고 등에 대한 유죄 판결에 불복하고 각 피고 등으로부터 각 공소의 신립이 있었으므로 당원은 조선총독부 검사 촌상청(村上淸무라카미 키요시) 입회하에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중략) 피고 권철암·구수암·최기복·이택규·최창용을 각 징역 1년 6월에 처한다.

피고 김도엽·권철암·구수암·김수룡·최기복·이택규 및 원심 상 피고 박공표의 7명은 일찍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고 있었는데, (중략) 피고 권철암·구수암·최기복·이택규·오기원·장봉기가 당 법정에서 판시의 시일·장소에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는 취지의 각 공술, (중략) 사법경찰관의 최기복에 대한 심문 조서 중 ≪독립선언서≫는 김도엽이 면사무소의 등사판을 사용해서 372통 쯤 만들었는데 그때 나와 김수룡·구수암·권철암·박공표 등이 함께 도왔다’는 취지의 공술 기재에 의하여 그 증빙이 충분하다.
1919년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 대정8형공제461호 판결문

1920년 봄 구수암은 옥중에서 병을 얻어 집행정지로 출옥하였으나, 같은 해 5월 사망했다.[9]

3. 사후

구수암의 당시 혈육은 노모와 어린 여동생이 있었고 가계가 힘들어 초상을 치르기가 어려웠다. 이에 명정의숙 출신의 기장여자청년회 소속 18명의 여성이 조위금을 지원하면서 각자 만장을 들고 기장 동부리 물방아터 옆에서 노제를 지냈다.[10][11]

구수암의 장례식 제문은 기장의 한학자인 박란수가 지었고, 명정의숙 출신의 권은해가 낭독했다.[12]
제문 구 수 암
오늘은 무슨날고 무궁화 옛나라에 슬픈 바람이 낯을치고
수심 구름이 눈을 가려 흘리나니 눈물이라 만세의 한 소리에
만일년 감옥중에 원분히 병을 얻어 본가에 돌아온지 며칠이
못되어서 거연히 세상을 버린 구공의 상여로다 슬프다 구가장
청년장부 찬란한 꽃상여로 어깨에 높이 메고 흘리 나니
눈물이라 오색이 찬란한 수많은 만장은 조국을 위해 몸 바친
구공의 슬픈 사연이 구구절절이 저 태양아래 휘날리고 있다.
슬프다 나라 잃은 설움이여 우리 겨레 한 맘으로 독립을 되찾고저
애국함도 죄가되나 철석같은 굳은 투지 형장에서 멍이 들어 백약이
무효로다 분하고 원통한 죽음이여 청춘홍안에 연광이 이십이라
슬프다 구공이여 이 나라를 위해 내일은 누가 갈고 홀로 계신 어머니
와 철부지 어린동생 누구에게 전했듣고 외 아들을 잃은 어머
니의 애통은 일광을 무색케하고 산천초목도 슬픔에 잠겨있네
인심이 천심인데 천리가 무심하랴 때가 오면 원한도 풀릴날이있으리
라 슬프다 구공이여 마즈막 가는 길에 기장여자청년회를
대표하여 한잔 술을 올리 오이 흠향하소서 오호통재 상향

대표
박자선 오경원 김정순 박난애 김묘생 박필순 오근숙 권은해
김○필 박새순 김복명 김차숙 김두리 이수진 김수용 이남수
구수암 만가, 권은해 필사본

1992년 2월 28일 정부는 3·1 운동을 주도하거나 적극 참여하여 순국 또는 옥고를 치른 200 여명의 항일운동가를 발굴하여 포상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구수암 등 7명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서훈되었다.[13]

1996년 차성 문화제에서 구수암 장례식을 재현하는 행사를 가졌다.[14]

4. 기타


[1] 구수암 (具壽巖), 한국학중앙연구원[2] 구수암 具壽巖;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1971년 pp.1208∼1210, 공훈전사사료관[4] 구수암, 부산문화역사대전[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 삼일운동사(하) - 1 기장읍(機張邑) pp.201, 공훈전사사료관[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삼일운동 재판기록, 1971년 pp.1208∼1210, 공훈전사사료관 재인용[7] 기장면 3·1 운동, 부산문화역사대전[8] 구수암, 부산문화역사대전 재인용[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3권 : 삼일운동사(하) - 1 기장읍(機張邑) pp.201, 공훈전사사료관 재인용[10] 국제신문 2015.10.13[11] 국제신문 2019.06.25[12] 국제신문 2015.10.13 재인용[13] 한겨레 1992.02.29[14] 구수암, 부산문화역사대전 재인용[15] 기장 장관청은 2008년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7호로 지정되었고, 2013년~2014년에 걸쳐 전면 보수했다. 2021년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기장 장관청, 부산문화역사대전[16] 명정의숙, 부산문화역사대전[17] 기장광복회, 부산문화역사대전[18] 명정의숙, 부산문화역사대전 재인용[19] 김수룡;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 공훈전사사료관[20] 국제신문 2015.10.13 재인용[21] 기장의 역사인물; 근현대인물, 기장의 역사와 문화, 기장문화원[22] 페이스북 2023.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