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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09:10:20

과이마르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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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이마르 1세 과이마르 2세 기술프 1세 판둘프 1세 판둘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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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aimar IV
생몰년도 1013년 ~ 1052년
출생지 살레르노
사망지 아말피
재위 기간 1027년 - 1052년(살레르노 대공)
1038년 - 1047년(카푸아 대공)
1039년 - 1052년(아말피 공작)
1040년 - 1042년(가에타 공작)

1. 개요2.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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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살레르노 공국 14대 대공, 카푸아 대공, 아말피 공작, 가에타 공작. 노르만족의 활약에 힘입어 남부 이탈리아 대부분을 한때 장악했으나 도중에 암살당했다. 노르만족이 남부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시칠리아 왕국을 수립하는 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2. 행적

1013년경 살레르노 공국 13대 대공 과이마르 3세와 베네벤토 대공 판둘프 2세의 딸이며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의 누이인 가이텔그리메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귀도, 판둘프, 가이텔그리마가 있었다. 1018년 이복형 조반니 3세가 사망한 뒤 그해 9월에 아버지와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1027년 4월 아버지가 사망한 뒤 15세의 나이에 살레르노 공작에 취임했으며,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다.

1037년 카푸아 대공 판둘프 4세의 가신이었던 노르만 용병대장 라눌프 드렝고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103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콘라트 2세가 남이탈리아에 대한 제국의 종주권을 회복하고자 남하하자, 즉시 동로마 제국과 맺었던 종주관계를 청산하고 황제 편에 섰다. 콘라트 2세는 카푸아를 공략하고 판둘프 4세를 내쫓은 뒤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과이마르 4세에게 카푸아를 넘기기로 했다. 그 후 과이마르 4세는 란둘프 드렝고를 아베르사 백작으로 선임해 정식으로 자신의 가신으로 삼았다.

그 후 과이마르 4세는 남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노르만 용병들을 대거 고용해 장차 남이탈리아를 재패할 발판으로 삼았다. 1038년 8월 15일 로카 반드라를 공략한 뒤 몬테카시노 수도원에 양도했으며, 란눌프를 산그로강 계곡으로 보내 그 일대를 통제하게 했다. 1039년 4월 아말피 공화국의 공작 만소 2세가 실명형에 처해진 후 추방되자, 그를 구원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아말피로 진격해 만소 2세의 뒤를 이어 공작이 된 조반니 2세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를 추방한 후 스스로 아말피 공작을 겸임했다. 그 해 7월에는 소렌토를 공략하고 동생 귀도를 그곳의 공작으로 세웠으며, 나폴리 공작 조반니 5세를 가신으로 삼았다.

과이마르 4세는 북쪽 방면으로도 세력을 넓혔다. 1039년 5월 코미노, 아퀴노, 트라에토를 제패했고, 1040년 6월에 폰테코르보, 소라, 가에타를 공략했으며, 그 해 10월에 베나프로를 공략했다. 이후 동로마 제국이 아풀리아에서 발발한 노르만 용병대의 반란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틈을 타 1041년 동로마 제국의 가신이었던 나폴리 공국을 완전히 정복하고 자국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렇듯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데에는 라눌프 드렝고의 활약이 컸기에, 과이마르 4세는 1042년에 란눌프를 가에타 공작에 선임했다. 하지만 1042년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고 이탈리아에 돌아온 판둘프 4세가 일부 영토를 회복하면서, 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1042년 노르만인들에 의해 칼라브리아와 아풀리아 백작에 추대된 강철팔 기욤(William Iron arm)은 1043년 과이마르 4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작위를 인정받았다. 1044년 기욤과 함께 칼라브리아 일대를 평정했으며, 스퀼라체에 큰 성을 지었다. 1045년 가에타 공작이자 아베르사 백작을 맡던 란눌프 드렝고가 사망하자, 란눌프의 조카인 아스클레틴이 과이마르 3세의 동의를 얻고 아베르사 백작에 선임되었다. 그런데 가에타 시민들은 과이마르 3세의 동의 없이 아퀴노의 랑고바르드 백작 아테눌프 1세를 공작으로 추대했다. 과이마르 4세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아스클레틴을 대신하여 가에타를 공격해 전투에서 아테눌프를 물리치고 포로로 잡았다. 이후 판둘프 4세를 물리치는 데 도움을 받는 대가로 아테눌프 1세가 가에타 공작을 맡는 것을 용인했다.

1045년 말 아스클레틴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노르만인들은 아스클레틴의 사촌 란눌프 2세 트린카노테(Rainulf Trincanocte)를 아베르사의 새 백작으로 추대했다. 과이마르 4세는 자신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결정한 것에 책임을 물었지만, 아베르사의 노르만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는 판둘프 4세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분개한 과이마르 4세는 아베르사로 진격해 란눌프 2세를 사로잡았지만, 기욤의 형제 드로고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를 풀어주고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아베르사 백작을 계속 맡게 했다. 1046년 강철팔 기욤이 사망하자, 과이마르 4세는 드로고가 아풀리아 및 칼라브리아 백작을 맡는 것을 인정하고 여동생 가이텔그리마를 드로고와 결혼시켰다.

1047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3세가 남이탈리아에 제국군을 이끌고 와서 공작들로부터 주종관계를 다시 맺었다. 그는 카푸아를 판둘프 4세에게 반환하고 아베르사와 아말피를 자신의 종주권으로 삼았으며,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 대해 과이마르 2세가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박탈하고 그곳을 지배하는 노르만족을 자신의 직속 가신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1038년부터 1047년까지 10년 가까이 추진했던 남이탈리아 통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반감을 품은 과이마르 4세는 황제의 공격을 받고 자신에게 망명한 베네벤토 공자 다우페르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이후 황제가 돌아가자 1048년 카푸아를 탈환하기 위해 판둘프 4세와 전쟁을 재개했다.

1048년 아베르사 백작 란눌프 2세가 사망하고 갓난아들 헤르만이 백작위에 올랐다. 당시 헤르만의 사촌이었던 리샤르 드렝고는 드로고에게 반역을 꾀한 죄로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과이마르 4세는 그를 석방시키게 한 뒤 아베르사로 데려와서 섭정으로 삼게 했다. 2년 후 리샤르 드렝고가 헤르만을 축출하고 아베르사 백작에 올랐을 때 이를 인정했다. 이리하여 아베르사는 과이마르 4세 편으로 돌아섰다.

1051년, 교황 레오 9세는 남이탈리아에 찾아와 과이마르 4세와 드로고를 면담했다. 교황은 노르만족이 많은 교회를 약탈하고, 많은 수도자를 살해하고, 여성 수도자(수녀)를 강간하는 등 현지 이탈리아인들을 심하게 핍박하는 상황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했다. 두 사람은 교황이 사절을 보내는 대신 직접 찾아온 것에 큰 감명을 받았는지 교황의 부탁을 받자마자 다시는 교회에 손을 대지 않겠으며 동족들이 주민들을 학대하는 것을 금지하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그 해 8월, 드로고는 교황과의 회담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보비노 인근 몬테이라로(Monteilaro)에서 암살당했다. 11세기 베네딕토회 수도자이자 역사가인 고페레도 말라테라(Gaufredo Malaterra)에 따르면, 랑고바르드 주민들이 드로고를 암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아풀리아를 회복하려는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 총독 아르이로스가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드로고 사후 아풀리아 백작에 선임된 옹프루아는 형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이 살해된 몬테이라로를 공략한 뒤 학살을 자행했다. 이후 노르만족은 옹프루아의 지휘하에 주변 일대를 이전보다 더욱 심하게 약탈했다. 이에 레오 9세는 노르만인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하고자 독일과 이탈리아 제후 및 기사들에게 군대를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노르만인들이 남이탈리아를 제패하려는 자신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데 꼭 필요한 재원이라 여겼던 과이마르 4세는 교황청과 노르만인들간의 분쟁을 중재하고자 했다.

그러던 1052년 6월 초[1], 과이마르는 아말피 해안가를 걷고 있던 중 아내 게마의 형제 아테눌프와 란둘프를 비롯한 4명의 암살자에게 공격받고 36번이나 칼에 찔러 죽었다. 이때 과이마르 4세의 형제 판둘프도 피살되었고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 등 가족들은 투옥되었지만, 동생 귀도는 가까스로 탈출했다. 과이마르 4세를 살해한 처남 아테눌프와 란둘프는 테라노 백작 판둘프 6세의 아들이며 자신들과 함께 과이마르 4세를 처단한 판둘프 3세를 새 대공으로 옹립했다.

귀도는 아베르사로 피신해 노르만인들에게 과이마르 4세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알렸고, 노르만인들은 즉각 군대를 일으켜 살레르노로 진격했다. 암살자들은 순식간에 제압되었고, 감옥에 갇혀있던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구출되었다. 귀도는 암살자들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들을 살려주려 했지만, 노르만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과이마르 4세의 몸에서 발견된 자상의 수에 근거해 판둘프 3세 등 암살자 4명을 36차례 찔러 죽였다. 이후 과이마르 4세의 아들 기술프가 기술프 2세로서 살레르노 대공으로 선임되었다.


[1] 베네벤토 연대기에는 6월 2일, 아마투스 연대기는 6월 3일, 몬테카시노 연대기는 6월 4일로 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