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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21:57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의전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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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위상4. 동문

1. 개요

京城醫學專門學校 (경성의학전문학교, 줄여서 경성의전)

1899년 대한제국에서 설립한 경성의학교에서 출발하여 1916년 조선총독부병원[1] 부속 의학전문학교[2]로 개설된 관립(국립) 구제전문학교이다. 1928년에는 부속병원을 신축하였다.

해방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2부속병원으로 있다가, 1963년 소격동 국군병원으로 분리되었다.

2. 역사

1899년 경성의학교로 출발하였다. 한국강제병합 직후인 1910년 총독부로 이관되어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교가 되었다.

1916년 총독부에 의해 구제전문학교로 승격,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어 1917년 3월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조선에도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경성의전을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3] 경성의전 존치로 학생들은 이어졌으나 학교의 중추인 교수진과 물적 자본은 경성제대 의학부에 빼앗기고 말았다. 사실 경성제국대학은 기존 경성의전의 부속병원은 아니었지만 사실상 한몸이었던[4] 총독부의원을 부속병원으로 흡수함은 물론이고 경성의전 교수진 상당수를 말이 좋아 차출이지 사실상 빼앗아와서 의학부를 만들고,[5] 그 건너편 자리인 동숭동 캠퍼스에 법문학부를 건설하여 법문학부와 의학부 2학부 체제로 창설된 것이었다. 즉, 경성의전의 입장에서는 교장 이하 교수진 및 병원까지 경성제대에 빼앗기고 소격동 종친부 터에 신축된 병원(해방 당시 경성의전 부속병원, 이후 서울대학교 제2부속병원을 거쳐 한국전쟁기 국방부에 징발되어 국군서울지구병원보안사령부로 사용됨)으로 쫓겨났던 것이다.[6]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해방 후 그 자체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의학부보다 하위인 '전문부'로 흡수하였고, 당연하게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들에게 의해 장악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그 학생들이 서울대 의대 전문부로 편입되어 경성제대 의학부와 같은 '의학사' 학위를 받지 못하고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의사 취급을 받았으며, 경성제대 부속병원이 서울대 의과대학 제1부속병원으로 메인병원으로 기능하는데에 반해, 경성의전 부속병원은 서울대 제2부속병원이 되어 찬밥 취급을 받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일본 제국의 戰前 교육학제가 미국식 新학제로 개편되면서 고등교육기관이었던 구제대학 예과구제고등학교, 구제전문학교와 함께 구제대학에 합쳐져 신제대학으로 일원화되면서 흡수•폐지되었는데, 경성제대 예과는 문과갑류•을류(법문학부)와 이과갑류(이공학부) 과정을 폐지하고 기존의 의학부 진학과정인 이과을류는 남겨 그대로 의예과로 계승하였다. 경성제대 의학부를 계승한 서울대 의대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예과로 사용할 수도 있었겠지만,[7] 그렇게 하지 않고 청량리의 경성제대 예과를 의예과 캠퍼스로 승계하면서 그 소속 또한 의과대학 대신 경성제국대학의 정통이라는 문리과대학에 귀속시켜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완전히 곁가지로 내쳐버렸다.

그래서 해방 후에도 국립서울대학교 설립 과정에서도 가장 강력히 저항한 학교이기도 하며, 우여곡절 끝에 통합이 됐어도 경성의전 출신 재학생을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재학생과 달리 전문부[8]로 취급하는 것을 두고 경성의전 측이 강력히 반발하여 한동안 진통이 있었다.[9] 1946년 당시 서울의대 교무과장을 맡고 있던 이제구 교수(경성제대 의학부 제8회 졸업)[10]의 제안에 따라 전문부(경성의전) 학생은 전문부 졸업 후 2차대전 말기 예과에 해당하는 수학기간인 2년을 추가 수학하면 의학사 졸업장을 수여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고 갈등을 봉합하고자 했는데(참조), 경성의전측에서는 이에 반발하여 이른바 학사호 파동이 발생하였다.
"학사호"문제로 학생이 교수 구타(동아일보, 1947.07.05)

서울국립대학교의 의과대학 내의 전문부 일부 학생들은 졸업한 뒤의 '학사호'문제로 말미암아 지난 2일 1학년 말 시험이 끝난 뒤, 허규[11] 씨 등 교수 2명을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을 파괴하고 학장 주택을 습격하였는데, 학교 당국에서는 8명을 퇴학시키고 169명을 정학에 처하였다.
즉, 전 경의전 계열의 학생들은 벌써부터 학교 당국에 자기들이 학습하고 있는 강의과목과 교수는 의학부 학생(전 성대[12])이 학습하고 있는 과목과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학부 출신자들은 졸업 후 학사호를 달게 되나, 자기네들은 학사호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여 수차에 걸쳐 동일한 대우를 해주도록 요청하는 동시에, 예과과목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행하여 합격된 의전 출신자에 대해서만이라도 학사호를 수여할 것을 당국에 요청하였으나, 국대 총장은 지난 28일 의학부 출신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는 문리과대학에 가서 2년 간 더 수업을 하라는 지시가 의전부 학생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에 분격하여 지난 2일 드디어 수 명의 교수를 구타하는 동시에, 학교 건물과 설비 등을 파괴하고 오후에는 학장 심호섭 씨 댁을 습격하였으며, 그 다음날인 3일에는 의과대학 사무장 댁까지를 습격한 것이다.

학사호 파동으로 1947년 제1회 서울대 의과대학 졸업식은 전문부 졸업생이 전원이 보이콧하여 의학부(경성제대 의학부) 졸업생만 참석한 상태로 치러졌고(참조), 경성의전 교장으로서 서울의대 학장직에 보임된 심호섭[13] 교수는 취임 1년도 되지 않아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출신들이 장악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쫓겨나다시피한 경성의전 출신들은 다수가 광주의학전문학교전남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재건하고, 가톨릭대,[14] 성균관대, 부산대의과대학 창설작업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3. 위상

일제강점기에도 의사 선호현상이 상당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는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의 관립 구제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의 사립 의학전문학교보다도 압도적인 선호도를 보여,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의 최상위권 학생 대부분이 경성의전을 지망하는 해도 있었고, 일본 본토에서도 경성부는 물론 평양대구, 함흥광주 등에 있는 한반도의 관립 의학전문학교 진학 지망자가 많아, 지방의 의학전문학교 입학생의 절반 이상은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성의전은 경성제국대학 예과 이과에 절대 도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명주완 박사[15]경성제국대학 개교를 기다리기 위해 경성의전 1학년에 가서 반수를 하였고, 전종휘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입시 낙방 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수석 졸업하였고 경성의전이 경성제대에 한참 못 미친다는 회고록을 남길 정도이다.

무엇보다 다른 의전과 마찬가지로 경성의전도 전문학교이기 때문에,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졸업후 교직을 희망하여 박사학위를 따고자 하는 의전 졸업생들은 경성제대 연구실에 들어가거나, 일본의 제국대학으로 유학할 수밖에 없었다. 경성제대 연구실에 연구생으로 들어가는 것도 경쟁이 치열하지만, 들어가서도 경성제대 졸업생에 비해 차별이 있어서 보수나 신분의 안정성 등 때문에 차라리 일본 본토에 유학하는 학생도 많았다고 한다.

법령상으로는 1916년 4월 칙령 제80호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지정된 후, 1924년(다이쇼13년) 문부성 고시 제290호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 본과 졸업생은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 졸업생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법제화되었다.[16]

4.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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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곳의 후신이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이다.[2] 요즘은 대학을 앞세우고 부속병원을 지정하는 방식이지만 현재도 영국이나 독일등에선 국공립병원하에 의학교나 간호학교가 있는 경우가 많다.[3] 실제로 일본의 제국대학 설립 과정을 볼 때, 의학전문학교가 문과를 추가 설치하여 제국대학으로 발전하는 사례가 많았다. 당초 총독부도 경성의전을 모체로 한 경성제대 설립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결론적으로 경성제국대학은 기존의 관립 전문학교들을 모체로 의•농•공•법학부를 설치하는 방안을 채택하지 않고 새롭게 법문학부•의학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경성의전은 존치되었고(당시 일본 본토에도 관립의과대학이나 의학전문학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경성의전은 본토의 일본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경성제대 의학부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었다. 경성제대 의학부 설립 당시 상당수의 교직원을 경성의전에서 빼와서 충당한 데다 경성제대로 총독부의 관심이 쏠리면서 경성의전에 대한 지원도 줄었다. 경성제대 의학부의 존재가 경성의전의 대학 승격을 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기 때문에 경성제국대학 설립 이후에도 경성의전에서는 꾸준한 대학 승격 운동이 있었으나 총독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4] 경성의전은 대한의원 의육부,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교로 출발했다.[5] 게이오대학 의학부 교수로 있다가 1920년부터 경성제대 의학부 개교때까지 조선총독부병원 원장 겸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으로 있던 시가 기요시가 경성제대 의학부 교수진을 인선했으며, 그는 경성제대 의학부 초대 학부장을 거쳐 제2대 경성제대 총장이 된다. 경성제대 개교시 넘어간 그를 따라 경성의전 교수진의 상당수가 경성제대 의학부로 넘어갔다.[6] 이는 대만의 다이호쿠제국대학 창립시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현재의 국립중흥대학가 위치해있던 지금의 캠퍼스에 문정학부를 신규 설치하면서 제국대학을 설립한 것과 유사하다.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는 교사 등 모든 물적 자본을 다이호쿠제국대학에 빼앗기고 다이호쿠제국대학 부속 농림전문부로 흡수되었다가 1943년에 타이중에 신교사를 마련하여 다이츄고등농림학교로 다시 독립해나간다. 흡수되어있던 기간을 제하면 경성의전의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상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의학부는 최초 다이호쿠제국대학 설치시인 1928년에 설치되지 않았기에 대만총독부의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가 유지되었으나 1936년 결국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 설치시에 의학전문부로 흡수되었다.[7] 일제강점기에 1924년(다이쇼13년) 문부성 고시 제290호에 따라 경성의학전문학교 본과 졸업생은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 졸업생과 동등한 것으로 법제화되어있었다. (원문) 1924年(大正13年)5月 - 文部省告示第290号により、本科卒業生(特科を除く)は 高等学校または 大学 予科卒業生と同等であると指定される。일본어위키백과 참조.[8] 대학 소속이지만 전문학교에 상당하는 과정[9] 교직원에 대한 테러 등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흠좀무[10] 예과 8회(1931년), 의학부 1937년 졸업, 병리학교실 조수 및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1942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박사 취득. 1945년 경성대학 의학부 병리학 교수, 1946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병리학 주임교수, 서울의대 교무과장,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1951~1955년, 1964~1968년), 1954년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대한병리학회 회장(1960~1970년) 역임.[11] 경성제대 의학부 출신 교수[12] 경성제대[13] 경성의전의 전신인 조선총독부병원 부속의학강습소 제3회(1913년) 졸업생으로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를 받고 경성의전, 세브란스의전 교수 등을 거쳐 1945년 해방 후 경성의전 교장으로 있다가 초대 서울의대 학장이 되었다. 경성제대(경성대학) 의학부장 윤일선 교수는 서울대학교 대학원장을 거쳐 서울대학교 총장으로 영전하였다.[14] 경성의전 출신 박병래의 주도로 경성의전 출신들을 주축으로 창설되었고 역시 그 후배인 윤덕선이 크게 공헌했다. 이후 윤덕선은 한림대학교를 세운다. 윤덕선은 모교 경성의전이 없어진 것이 몹시 원통해 하면서 어떻게든 모교를 재건하겠다는 결의에 불탔다고 한다.[15] 경성제대 의학부 제1회 졸업생인 명주완 박사는 광복과 동시에 경성대학 의학부 신경정신과학교실 초대 주임교수 겸 경성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의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여, 국대안 시행으로 경성제대 의학부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개편된 이후인 1947년 3월까지 해당 직책을 계속 역임하였다.[16] 1924年(大正13年)5月 - 文部省告示第290号により、本科卒業生(特科を除く)は 高等学校または 大学 予科卒業生と同等であると指定される。일본어위키백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