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 | |||
結 | 草 | 報 | 恩 |
맺을 결 | 풀 초 | 갚을 보 | 은혜 은 |
1. 개요
'풀을 묶어 은혜를 갚다'라는 뜻으로,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고사성어이다. 《춘추좌씨전》에 나온다.[1]2. 유래
秋,七月,秦桓公伐晉,次于輔氏,壬午,晉侯治兵于稷,以略狄土,立黎侯而還,及雒,魏顆敗秦師于輔氏,獲杜回,秦之力人也,初,魏武子有嬖妾,無子,武子疾,命顆曰,必嫁是,疾病則曰,必以為殉,及卒,顆嫁之,曰,疾病則亂,吾從其治也,及輔氏之役,顆見老人,結草以亢杜回,杜回躓而顛,故獲之,夜夢之曰,余,而所嫁婦人之父也,爾用先人之治命,余是以報。
가을 7월에 진(秦) 환공(桓公)이 진(晉)나라를 치려고, 보씨(輔氏)에 머물렀다. 임오(壬午)일에는 진(晉)나라의 제후가 직(稷)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적(狄)의 땅을 침략하여 여후(黎侯)를 세운 뒤 돌아와서 낙수(雒水)에 이르렀다. 위과(魏顆)는 진(秦)의 군대를 보씨(輔氏)에서 패퇴시키고, 두회(杜回)를 사로잡았다. 두회는 진(秦)나라의 이름난 역사(力士)다.
당초에 위무자(魏武子:위과의 아버지)는 총애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위무자가 병들자 위과(顆)에게 명하기를, "반드시 (다른 데에) 시집보내라"고 했는데, 병이 심해지자 말하기를, "반드시 (그녀를) 순장시켜라"고 했다. (위무자가) 죽자, 위과는 그녀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면서 말하기를, "병이 심해지면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니, 나는 그 멀쩡할 때를 따르겠다"고 했다.
보씨(輔氏)의 전투에서 위과는 한 노인이 풀을 묶어서 두회에 맞서는 걸 보았는데. 두회가 (풀에 걸려) 넘어져 자빠지므로,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나는 당신이 시집보낸 부인의 아버지요. 당신은 선친이 멀쩡할 때의 명령을 행했기에 내가 이렇게 보답하는 것이오.“라고 했다.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선공(宣公)15년
가을 7월에 진(秦) 환공(桓公)이 진(晉)나라를 치려고, 보씨(輔氏)에 머물렀다. 임오(壬午)일에는 진(晉)나라의 제후가 직(稷)에서 군대를 일으키고 적(狄)의 땅을 침략하여 여후(黎侯)를 세운 뒤 돌아와서 낙수(雒水)에 이르렀다. 위과(魏顆)는 진(秦)의 군대를 보씨(輔氏)에서 패퇴시키고, 두회(杜回)를 사로잡았다. 두회는 진(秦)나라의 이름난 역사(力士)다.
당초에 위무자(魏武子:위과의 아버지)는 총애하는 애첩이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위무자가 병들자 위과(顆)에게 명하기를, "반드시 (다른 데에) 시집보내라"고 했는데, 병이 심해지자 말하기를, "반드시 (그녀를) 순장시켜라"고 했다. (위무자가) 죽자, 위과는 그녀를 (다른 데로) 시집보내면서 말하기를, "병이 심해지면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이니, 나는 그 멀쩡할 때를 따르겠다"고 했다.
보씨(輔氏)의 전투에서 위과는 한 노인이 풀을 묶어서 두회에 맞서는 걸 보았는데. 두회가 (풀에 걸려) 넘어져 자빠지므로, 그를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말하길, “나는 당신이 시집보낸 부인의 아버지요. 당신은 선친이 멀쩡할 때의 명령을 행했기에 내가 이렇게 보답하는 것이오.“라고 했다.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 선공(宣公)15년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대신이었던 위주(魏犨)[2]는 총애하는 첩이 있었는데, 병이 들자 아들 위과(魏顆)[3]에게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재혼)시키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런데 병세가 중해져 정신이 오락가락해지자 말을 바꿔 첩을 순장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위과는 아버지의 상반된 유언 중에서 무엇을 따를지 고민했는데, 차남 위기[4]는 순장하자는 유언을 따르자고 했으나 결국 위과는 아버지가 정신이 온전했을 때 남긴 유언을 따르기로 하여 첩을 순장시키지 않고 친정으로 돌려보내 개가시켰다.[5]
후에 진(晉)나라의 위과(魏顆)는 전쟁터에 나가 진(秦)나라 군대와 싸우게 되었는데, 적장 두회(杜回)가 워낙 용맹하고 무시무시해서 진(晉)나라 병사들이 감히 맞서지를 못했다. 두회는 보병들을 이끌고 닥치는대로 말이건 사람을 가리지 않고 쳐죽여 전황이 진(晉)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퇴각할 상황에 처했으나, 어느 순간 두회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다가 그만 고꾸라지는 바람에 위과는 쓰러진 두회를 손쉽게 사로잡아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위과가 두회가 고꾸라진 자리를 자세히 살펴본즉 풀들이 매듭지어져 있는 것이었다.[6]
그날 밤에 잠이 든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는데 그 노인은 그 첩의 아버지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위과에게 본인의 딸을 순장하지 않고 살려서 친정으로 돌려보낸 뒤 개가를 도와주었음에 감사히 여겨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풀을 엮어 두회를 사로잡게 했다고 밝혔다.[7]
3. 유사어
4. 여담
- 충청북도 보은군에서 '결초보은'을 지자체 농특산물 브랜드로 활용 중이다.
[1] 공자의 춘추(선공 15년)에 붙은 좌구명의 주석(傳)이 '춘추좌씨전'이다.[2] 주나라의 형제 제후국이었던 필나라의 시조 희고의 후손으로, 진문공을 19년 동안이나 따른 용맹한 장수였는데 실책도 있었지만 끝까지 등용되었다. 그의 후손이 나중에 위(魏)나라를 건국하면서 '위무자'라는 시호를 받았다(위무자의 '자'는 자작이라는 뜻이다. 아들 위도'자'도 마찬가지.).[3] 영호(令狐)를 봉지로 받아 그의 후손은 영호씨가 되었고, 위씨의 적통은 동생 위도자(魏悼子)가 이었다. 중국어 위키피디아에는 위과가 위주의 서장자로 나오는데, 적장자인 위도자에게 가주를 계승시킨 듯.[4] 여(呂)와 주(廚)를 봉지로 받아 주무자(廚武子)로 불리기도 한다.[5] 《열국지》에 따르면 이에 아버지 위주의 혼령이 위과의 꿈에 나와 현명하게 처신해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했고, 이를 통해 위과는 장차 있을 싸움에서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위과가 명문가에 준하는 좋은 가문의 장남에게 재혼을 도와주는 것으로 나오고, 이후에 아버지 위주가 현명한 처신을 하였다고 고마워하는 것은 동일.[6] 《열국지》에서는 당시 노나라의 국군이 악독하기로 유명한 풍서란 이름의 권신에게 눌려 지내다 아내인 진(秦)나라 공주가 풍서의 희롱 끝에 분노해 자살한 사건으로 진(秦)나라가 침공을 하자 겁에 질려 진(晉)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노나라로 오게 되었다. 이후 풍서를 처형시키고 국군을 꼭두각시로 삼으려 하지만 노나라의 국군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후 자살한다. 식사를 가지고 온 병사의 보고에 위씨 형제는 고민 끝에 결국 노나라를 진(晉)나라로 복속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악명높기로 유명한 풍서의 절친 두회가 나타나 진(晉)군을 학살하고 연전연패를 거듭하던 중 한 노인이 위과의 꿈에 청초파가 결전지라고 알려준다.[7]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청초파란 곳이 결전지라고 알려주며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정체가 서모의 아버지라고 밝힌 다음, 후처를 살려주고 재혼까지 도와준 것을 감사히 여겨 청초파로 두회를 유인했단 사실을 밝혀주고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