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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8 10:36:40

겐로쿠 대지진

겐로쿠 대지진
元禄地震
발생일시1703년 12월 31일
진앙일본 간토 남부 지역 부근
규모ML 8.2 / Mw 8.5
최대진도7[1]
가나가와현, 치바현
쓰나미7m 이상
사상자사망자 6,700명 이상
이재민 수만 명 이상
1. 개요2. 피해3. 기타4. 이전, 이후의 타임라인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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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03년 12월 31일(음력 11월 23일) 오후 2시경에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진앙지는 보소 반도 남단의 치바현 노지마키와로, 현대식 지진 규모로는 8.1 정도이리라 추정한다.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과 비교하면 피해지역이나 유형이 흡사하여 관동 대지진 이전의 관동지진(도쿄 수도직하지진)으로 분류한다.[2]

2. 피해

기록에 따르면 수도 에도에는 그리 큰 피해는 없었으나, 에도성의 각 성문과 영주들의 에도 내 저택들, 나가야와 마치야 등에서 건물피해가 일부 있었다. 히라츠카시시나가와구에서는 지면이 액상화하여 아침이 되면 오수가 길거리에 널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앙지 보소 반도를 중심으로 사가미만과 보소 반도 남단으로 피해가 심각했으며 지진으로 인한 화재가 사가미국(오늘날의 가나가와현) 오다와라성에서 일어나 오다와라성 천수각이 소실되었다. 이외에도 관동 각지역에서 화재가 일어나 가옥 약 8천 호가 파괴되고 사망자 약 2300여 명, 이재민 약 3만 7천여 명이 생겼다고 추정한다.

또한 보소 반도에는 지진 해일(쓰나미)도 발생해 아타미에는 파도 높이가 7 m로 추정되는 해일이 밀려들었다. 가옥 500여 호 중 10여 호만 남기고 모조리 파괴되었을 만큼 피해가 막심했으며, 가마쿠라에서는 쓰루가오카하치만 신궁에까지 해일이 밀려들어왔다고 한다. 이토에서는 해일이 강을 거슬러와 피해가 있었으며 구주쿠리에서 약 5 m, 요코하마시에 약 3 m, 에도에도 1 m 높이 해일이 일었다고 한다. 또한 소나무로 유명한 리쿠기엔은 지진해일로 발생한 염해로 거의 모든 소나무가 말라죽었고,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 때에야[3] 겨우 원상복구되었다.

3. 기타

이 지진이 일어난 그해 3월에 추신구라 사건을 일으킨 아코호번 무사 46인을 할복시킨 일이 있어서 세간에는 추신구라 사건의 무사들의 원혼이 이 대지진을 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여론이 심각해지자 막부는 유언비어 유포를 엄금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 당시 도쿠가와 막부의 신료였던 아라이 하쿠세키는 지진을 체험한 일화를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4년뒤 엄청난 지진후지산이 대폭발하는데..

참고로 이 지진이 일어나기 1년 전 백두산 분화도 있었다.

4. 이전, 이후의 타임라인

발생일자 추정최대진도 추정규모 발생지 사상자 비고 출처
1643. 7. 24. VIII~X M7.4 울산광역시 인근 해안 불명 쓰나미 발생 조선왕조실록
한국기상기록집
NOAA
1668. 7. 25. XII M8.5 중국 산둥성 사망자 42,758명 진도 XII NOAA
1668. 7. 31. VI M6.4 황해 불명 김소구 교수 논문[A]
1681. 6. 12. VIII M6.5 강원도 양양군 인근 해안 불명 한국기상기록집
KMA 지진연구소 논문[B]
1681. 6. 26. VIII~IX M7.5 강원도 양양군 인근 해안 불명 쓰나미 발생 KMA, NGDC
1703. 12. 31. 7 M8.2 일본 보소 반도 남서쪽 바다 사망자 5,233명 쓰나미 발생
최대높이 10.50m
NOAA
1707. 10. 28. 7 M9.3 일본 난카이 해역 사망자 5,000여 명 쓰나미 발생
최대높이 25.70m
NOAA
※1668년 4월과 1702년에는 백두산이 분화하였고, 1707년 호에이 대지진 이후에는 후지산이 폭발하였다.

5. 같이 보기

문서가 존재하는 19세기 이전 지진
~19세기
[[틀:지진/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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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rowcolor=#fff> 발생일 규모 지진명
<colbgcolor=#868e96>
BC 1831 ~ 1731
M 6.5 태산진
62. 02. 05.
M 6.1 62년 폼페이 지진
89. 06.
M 7.0 89년 서울 지진
100. 10.
M 6.7 100년 경주 지진
115. 12. 13.
M 7.5 115년 안타키아 지진
304. 08.
M 6.1 304년 경주 지진
304. 09.
M 6.7
526. 05. 20. ~ 05. 29.
M 7.0 526년 안타키아 지진
779. 03.
M 7.3 779년 경주 지진
1036. 07. 17.
M 7.0 1036년 경주 지진
1455. 01. 15.
M 6.7 1455년 순천 지진
1518. 06. 22.
M 7.5 1518년 서울 지진
1556. 01. 23.
M 8.0 산시 대지진
1597. 10. 06.
M 8.0 1597년 백두산 지진
1643. 06. 09.
M 6.4 1643년 합천 지진
1643. 07. 25.
M 7.4 1643년 울산 대지진
1681. 06. 12.
M 6.7 1681년 양양 대지진
1681. 06. 26.
M 7.5
1700. 04. 15.
M 7.0 1700년 대마도 지진
1703. 12. 31.
M 8.5 겐로쿠 대지진
1707. 10. 28.
M 9.3 호에이 대지진
1755. 11. 01.
M 9.0 리스본 대지진
1797. 02. 10.
M 8.7 1797년 남아시아 대지진
}}}}}}}}} ||


[1] 일본에서 진도 7이 신설된 것은 1949년으로 1703년 겐로쿠 대지진 당시엔 진도 7이 없었지만 편의상으로 표기한다.[2] 당시 사가미 트로프가 파열되었는지는 일본 학계의 주요한 떡밥이다.[3] 아무리 빨라도 정이대장군 취임 시기인 1716년 이후로, 지진 발생 이후 약 13년 뒤에야 소나무 숲의 복구가 완료된 것이다.[A] 김소구, 1982년, '한반도와 그 인접지역의 지진'[B] 2002년, '1681년 6월 12일, 17일, 그리고 26일 양양-삼척 근해에서 발생한 지진기록의 분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