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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0 17:14:18

개희북벌

개희의 용병에서 넘어옴
개희북벌
開禧北伐
<colbgcolor=#2e8b57,#251327><colcolor=#ece5b6> 시기 1205년 (금 장종 6년) ~ 1207년 (금 장종 8년)
파일:백마를 타고있는 한탁주와 휘하의 군사들이 금나라로 출병하는 모습의 초상화.jpg

당시 금나라를 향해 진군 중인 남송의 북벌군 45,000명을 초상화로 그린 모습.
이것을 개희의 용병(開禧之 用兵)이라고 한다.
교전국 <rowcolor=black>
(수세)
남송
(공세)
주요 인물
지휘관

[[금나라|
大金
]] 장종 (금 황제)
[[금나라|
大金
]] 복산규
[[금나라|
大金
]] 점할정
지휘관

[[남송|
大宋
]] 영종 (남송 황제)
[[남송|
大宋
]] 한탁주[1]
[[남송|
大宋
]] 곽예
[[남송|
大宋
]] 정송
[[남송|
大宋
]] 필재우
[[남송|
大宋
]] 전준
[[남송|
大宋
]] 오희 [2]
병력금군: 200,000명 ↑ [3]남송군: 200,000명 ↑ [4]
피해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5]
결과 금의 승리
- 한탁주의 북벌 실패
- 남송 군대의 극심한 피해
영향 한탁주 정권 몰락[6]
- 사미원의 정권 장악
- 남송과 금나라의 가정화의 체결

1. 개요2. 배경3. 내부의 반발4. 북벌의 전개
4.1. 금나라의 반격, 태화정벌(泰和征伐)4.2. 오희의 배신
5. 북벌의 결과

[clearfix]

1. 개요

중국 남송 후기에 벌어진 남송의 금나라 북벌전. 남송의 황제였던 영종(寧宗)의 재위 기간에 재상 한탁주가 주도한 북벌로 '개희'(開禧)는 영종 재위기의 연호(1205년~1207년)였다. 여담이지만 당시 금나라의 연호는 장종 재위기의 '태화'(泰和)(1200년~1207년)였다. 이 전투는 후세에도 송금전쟁의 주요전투로 평가를 받고 있다.

2. 배경

재상 조여우(趙汝遇)와 함께 힘을 합쳐 광인이 된 광종(光宗)을 퇴위시키고, 가왕(嘉王) 조확(趙擴)을 즉위시킨 외척 출신의 한탁주는 조여우를 몰아내고, 그 뒤 주자를 중심으로 한 도학파를 탄압하는 경원의 당금을 일으켰다. 그 후 자신이 재상이 되어 북벌 준비를 했다.

'경원의 당금'을 일으킨 한탁주는 권력을 유지하며 자신을 지지하는 자들을 재상 등의 요직에 앉혔다. 하지만 그의 뒤를 보호해주었던 황후[7]와 태황태후[8]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고, 경원의 당금에 대한 반대 급부로 한탁주에 대한 반발이 안팎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한탁주가 권신으로서의 지위를 굳혀가는 가운데, 북방 몽골 고원에서는 칭기즈 칸이 초원의 제부족을 통일하며 세력을 점점 키워나가기 시작했고 금나라는 점차 쇠락하고 있었다.

한탁주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원의 당금에 대한 반발로 금이 간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정강의 변 이후의 반금 감정을 이용하여 금나라에 대한 북벌을 계획하게 되었다.

개희 북벌 이전인 가태(嘉泰) 4년(1204년)에는 악비(岳飛)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를 악왕(鄂王)으로 추봉했다. 또한 한탁주는 경원의 당금으로 추방되었던 인물들 중 일부를 복직 또는 복권시켰다. 이때 조정에서 나오던 반대 의견들을 한탁주는 자신의 심복 소사단, 등우룡을 이용하여 잠재웠다.

3. 내부의 반발

하지만 한탁주의 대금 북벌은 시작부터 큰 반발에 부딪쳤다. 그의 북벌 계획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실제로 북벌론자였던 신기질, 육유 등도 북벌에 대해 반대 의사를 내비쳤으며 조정 대신들도 북벌에는 부정적이었다.[9][10] 하지만 한탁주와 그를 따르던 강경파 일부가 이러한 내부의 반발을 자신의 권력으로 억제했으며 개희(開禧) 원년(1205년)부터 본격적인 북벌을 개시하게 되었다.

4. 북벌의 전개

가태 4년(1204년), 장암과 신기질을 지휘관으로 필두한 남송군 10,000명이 금나라 국경 지대에 집결했다. 보고를 들은 금나라는 그 지대에 있던 각장을 폐쇄하였고 이후 국경에서 송군과 금군 간의 작은 국지전이 여러차례 발생했다. 1205년 5월, 남송의 영종이 금나라 정벌을 시행하라는 요지를 내렸고 강경파 대신 일부가 이를 대리 공표하였다, 이에 남송의 명장 오린의 손자인 오희가 부사령관, 재상 한탁주가 총사령관이 되어 의용군과 병사들로 편성된 총 45,000명의 북벌군이 금나라로 출병했다. 처음 몇달 동안은 남송군이 금군을 상대로 우세를 점하면서 옛 북송의 영토를 일부 수복하기도 했다. 1206년 4월 초반, 사주 전투에서는 필재우가 사주 일대의 두성을 격파하면서 남송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그 이후 4개월 동안은 비교적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1207년 1월 기간 때는 송군이 진천뢰라는 일종의 수류탄을 사용하여 금군 2,000명과 800마리의 말을 학살했다.

하지만...

4.1. 금나라의 반격, 태화정벌(泰和征伐)

금 태화(泰和) 연간 말 태화 6년 10월(1206년 10월) 지속적으로 남송군이 금나라를 침입하여 금군에 사상자가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당시 황제인 장종 또한 이 사태를 가만히 볼 수만은 없다고 판단하였으며 금의 대신들 또한 우리 대금제국(大金帝國)이 어찌 저런 나약한 자들에게 치욕을 겪어야 하는가! 라고 말하며 단죄를 내려야한다는 상소를 지속적으로 제출하였다. 결국 장종은 남벌을 결정하였고 남경개봉부, 대정, 회령부, 수도 중도대흥부, 태원부, 평양부, 채주에 주둔 중이던 금군 중 가장 노련하였던 철부도라는 중장기병 기마부대 6만을 소집하고 사령관을 명장 점할정으로 내정하여 이른바 남방 수비대[11]라는 부대를 편성하였고 출병을 하여 남송의 북벌 공세를 막기 시작하였다(태화정벌 참조).

파일:開禧北伐 中 金朝士兵 .png
[12]

그렇게 남송의 북벌 공세는 꺾이고 전황은 순식간에 금나라 쪽으로 역전되었다. 한탁주는 몽골의 침입으로 금나라가 약해졌다고 보았지만 그 이상으로 남송의 북벌이 준비가 되지 않았고 게다가 금의 명장 점할정이 아직 있었다는 것을 몰랐기에 그 계획이 터무니없이 무모한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직 금나라는 장종이 몽골의 침공에 시달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정상적으로 국정을 운영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실패한 계획이 되어버렸다.[13]

게다가 개희북벌을 뒤집는 더 큰 사건이 있었으니...

4.2. 오희의 배신

한탁주가 최고의 전력으로 기대했던 오희(吳曦)가 사천에서 금나라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오희는 자신의 객장을 금나라에 보내 자신을 촉왕(蜀王)으로 봉할 것을 요구하였고, 금나라에서는 오희를 촉왕으로 봉하였다.[14]

오희는 흥주에서 참위까지 하면서 남송으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내부의 인심장악에 실패하고 자신도 살해당하여 완전히 패배하였다. 오희의 배신과 계속되는 금나라의 반격으로 점점 불리해진 남송의 군대는 계속해서 패주를 거듭하였고 남송 조정에서는 금나라에 화평을 희망하는 사신을 보내게 된다.

5. 북벌의 결과

결국 한탁주는 개희북벌의 실패로 완전히 몰락하게 되었다.

개희 3년 11월 쯔음에 전쟁을 시작한지 반년만에 양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금나라는 이에 대해 전쟁의 주동자였던 한탁주를 금나라로 보낼 것을 요구하였고, 한탁주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자신의 심복이었던 등우룡과 소사단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도 하였으며 협정을 이끌어 나갈 담당자와 전선의 지휘관까지 교체하면서 사태를 일단락해보려고 하였으나 다 실패하였다. 이에 대해 남송의 백성들은 한탁주가 이번 사태를 책임져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조정에서도 한탁주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빗발쳤다. 결국 개희(開禧) 3년(1207년)에 한탁주는 예부시랑 사미원(史彌遠) 등에 의해 살해되었고, 한탁주의 일파도 완전히 몰락하였다.

금나라에서는 평화협정의 조건으로 북벌의 주동자였던 한탁주의 목을 요구하였고 결국 한탁주의 머리를 금나라에 보내면서 다음해인 가정(嘉定) 원년(1208년)에 남송과 금나라 간의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한탁주를 주벌한 사미원은 영종, 이종 대에 재상이 되어 1233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6년 동안 조정의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금나라가 멸망한 이후 남송화북 지역을 또 공격했다. 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전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1] 저 백마 위에서 남송의 백성들에게 인사중인 사람이다.[2] 원래는 남송군 측 지휘관이었으나 금나라로부터 촉왕의 작위를 받고, 금나라를 지원하여 금군 측 지휘관이 되었다.[3] 이 전쟁 이후 4년이 지나고 후임 황제인 위소왕이 몽골을 상대하기 위해 40만 대군을 모았던걸 감안하여 추정한 병력 수. 이때 당시 금나라의 인구가 5천만명을 넘은걸 봐도 충분한 숫자다.[4] 당시 인구수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계산한 추정 병력 수. 이때 당시 남송의 인구가 거진 6천만명 이상이었다. 수도 임안에 100만 여 가구가 거주했던 것을 감안해도 충분한 숫자다.[5] 송사 기록 부족.[6] 이후 한탁주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7] 한탁주는 영종의 황후인 공숙황후의 종조부였다.[8] 고종의 황후인 헌성자열황후가 한탁주의 이모에 해당했다.[9] 이때 조정 대신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어져 이전보다는 다소 약한 대립을 보여주었다.[10] 신기질, 육유를 대표로 하였던 강경파 일부는 북벌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성공하려면 약 20년 정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한다고 여겼다. 첨언하자면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20년 정도 준비했다면 적어도 어느정도 성과는 있었을 것이다. 이유는 그와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몽골 제국에 의해서 금나라가 무너지기 시작하기 때문. 물론 그렇기에 만족할만한 성과는 안 나올 것이다.[11] 명목상으로 수비대라고 불렀지만 활용도는 남벌군대였다.[12] 이 초상화속 아래쪽에 나온 군대는 남송의 북벌을 막기 위해 출병된 금나라의 남방 수비대이다. 당시에는 연호를 따와서 태화(泰和) 수비대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여담이지만 남송군과 교전하기 위해 대기중인 금나라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13] 애초에 기마병들이 강성했던 금나라를 상대한다는 게 말이 안 되기도 하는 것이다.[14] 개희정변(開禧政變, 1207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