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사 본청사(1873년) | 현재 홋카이도 개척촌에 복원한 개척사 본청사. |
1. 개요
[ruby(開, ruby=かい)][ruby(拓, ruby=たく)][ruby(使, ruby=し)]홋카이도 등 일본 제국 북쪽 영토를 개척하고자 1869년(메이지 2년) 7월 8일에서 1882년(메이지 15년) 2월 8일까지 있던 일본의 관청이다.
개척사 설치 이전의 행정은 하코다테부(箱館府)[1]가 관할했고, 1882년에 홋카이도 개척사가 폐지되어 관할 구역이 삿포로현, 네무로현, 하코다테현으로 분할되었다.
당시 개척사기인 북진기(北辰旗)[2] | |
현재 쓰이는 홋카이도기 | 현재 삿포로시 문장 |
2. 상세
현재의 홋카이도청 구 본청사 |
메이지 일본 정부는 홋카이도 개척사(開拓使) 차관으로 구로다 기요타카[3]를 임명했는데, 그는 홋카이도의 식산흥업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1871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자극 받아, 어떻게든 홋카이도를 개척하기 위해 해외 기술자의 도움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미국 농무국의 국장을 맡고 있던 호레이스 케프론과 지질 광산학자였던 T.안티셀 등이 일본을 방문하여 홋카이도를 3년 정도 머물며, 개척의 방법에 대해서는 가축과 기계를 이용한 밭농사와 축산업이 적당하다고 제안했다. 이에 구로다 기요타카는 미국식 시스템으로 홋카이도를 개척하기로 결정하고, 벼농사를 중심으로 했던 이주자들에게 새로운 축사 및 농업을 가르치기 위해 에드윈 던, 윌리엄 스미스 클라크와 W. M 휠러, W. P 브룩스 등을 홋카이도로 초청했다.
한편으로, 1872년 부터는 도쿄에 개척사 가설학교(開拓使仮学校)를 설치하여 홋카이도를 본격적으로 개척할 학생을 모집하였다. 국비 학생 50명, 사비 학생 50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학교 졸업 후 국비는 10년, 사비는 5년 간 의무적으로 홋카이도의 개척에 종사해야 했었다. 1875년에는 이 학교가 삿포로로 이동하여 삿포로학교로 발족하였고, 1876년에는 일본 최초로 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기관인 삿포로농학교(現 홋카이도대학)를 설립하였다.
삿포로농학교의 삿포로시 시계탑 |
한편으로, 1882년에 홋카이도 개척사가 폐지되어 관할 구역이 삿포로현, 네무로현, 하코다테현으로 분할되었다. 1886년에는 다시 현을 폐지하고 홋카이도라는 하나의 행정적 도(道)로 묶어서 출범했으며, 1888년에 붉은 벽돌로 만든 홋카이도청 본청사가 개척사 본청사 터 남측에 신설되며 홋카이도 전체를 통괄하는 기관이 탄생했다.
3. 기타
삿포로 맥주 상표 | 홋카이도 개척사기 |
4. 기타 개척사
4.1. 가라후토 개척사
기존 개척사를 본떠 가라후토에 세워진 개척사. 1870년 2월 13일부터 1871년 8월 7일까지 존재했다.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둘을 헷갈리지 않게 원래 개척사를 '홋카이도 개척사'라고 칭하기도 한다.
4.2. 조선의 동남제도 개척사
조선에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관직이 있었다. 1883년(고종 20)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비롯한 동해안에 있는 섬들을 보호·개발하기 위하여 신설한 관직으로 김옥균이 임명되었다.조선 정부는 자국 영토에 정당한 주권을 행사하고 주변국과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883년 3월 16일 동남제도개척사를 신설했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를 비롯한 동해 일대에 산재해 있는 섬들의 개척과 일본에서 원산에 이르는 해도의 방어와 개척, 포경(捕鯨) 사업을 관장하도록 명했다.
동남제도개척사는 홋카이도 개척사를 참고한 것이다. 조선 정부가 이 제도를 참고한 이유는 만국공법(萬國公法) 체제 아래 조선의 영토와 영해 주권을 확실하게 다지고, 외세의 이권 침탈로 부터 물산을 보호하여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