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09:50:35

강진(독립운동가)

<colbgcolor=#0047a0> 출생 1912년 2월 22일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평로리
사망 1976년 12월 23일
서울특별시
이명 강홍모(康弘模), 강홍구(康洪九)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진은 1912년 2월 22일 평안북도 창성군 창성면 평로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에 만주로 이주했고, 1926년 3월 정의부(正義府)의 중집위(中執委)를 맡고 있던 김활우(金活右)의 추천으로 흥경현립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재학 중 양세봉 대장의 지시에 따라 무순, 청원, 사평가 등에 잠입해 일본군의 동태를 탐지,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30년에는 국민부(國民府)의 선발생으로 뽑혀 중국 동북강무당(東北講武堂)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이듬해 9월 18일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중국군에 입대해 중국 육군 독립제7여단 제621단 2영(營)에 견습위병장교(見習衛兵將校)로 파견되어 근무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이후 중국군이 북평으로 철수한 후에는 중국 정부 군사위원회 북평분회 위성단에서 중위에 임명되어 제3영에서 복무했으며, 1937년에는 중국 선창현정부(宣昌縣政府) 보안단 훈련교관에 피임되어 보안대 육성에 매진했다. 1938년에는 중국 정부 군사위원회 육군 제6전구 사령부 작전참모부에 배속되어 복무했으며, 이듬해에는 호남성 장사현 전투에 참전하여 일본군 판원사단(板垣師團)을 궤멸시켰고, 중국 정부 군훈부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 포로수용소 교도과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이 수용소에서 한적 사병 32명을 교화시켜 광복군과 조선의용대에 편입해 항일전에 투입하도록 했다.

1942년 5월 광복군에 편입된 강진은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대부(隊附)에 임명되어 항일활동을 수행했다. 그는 전방에서 한인 초모, 선전, 첩보 공작 및 포로 심문, 적 문서 번역 등의 임무를 수행했으며, 1942년 10월에는 광복군 상위(上尉)로 진급하여 항일 활동을 지속했다. 8.15 광복 후 서울로 귀환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다가 1976년 12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강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