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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2:21:47

강봉주

파일:강봉주.jpg
<colbgcolor=#0047a0> 출생 1913년 11월 15일
제주도 제주시 제주읍 이도동
사망 1985년 9월 25일
강원도 홍천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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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봉주는 1913년 11월 15일 제주도 제주시 제주읍 이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충남 예산공립농업학교(現 국립공주대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일본인 교사들이 한인 학생들을 차별하는 것에 분노해 학우인 정종호, 한정희 등과 함께 독서회(讀書會)를 결성했다. 이들은 항일, 반제국주의 투쟁에 관한 서적들을 윤독, 토론했으며, 문맹퇴치운동과 문자보급운동에 가담했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 의거를 벌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자극을 받은 그는 그해 5월 초순 박정순, 박희남(朴熙南), 오일규 등 동교 하급생들이 조직·활동하던 독서회와 회합을 갖고 본격적인 항일학생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두 조직을 통합할 것을 제의, 승인을 얻어내고 좌익협의회(左翼協議會)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연구부, 조직선전부, 에스페란토어부 등 3개 부서를 갖췄는데, 강봉주는 연구부를 담당했다. 그는 그해 5월 14일과 5월 22일 두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갖고 김용재(金用在) 등 선배 졸업생들과 동교 학생 8명을 동지로 규합해 항일투쟁 이론과 투쟁 방안을 연구했다.

그러던 1932년 6월, 학교 측이 학생들에게 무리한 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강봉주는 박희남, 박정순, 정종호 등과 함께 동맹휴학을 결행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행사 강행을 위한 노력동원의 부당성, 일본어 과목을 국어로 표기하는 반민족적 처사의 시정, 일인 학생과 한인 학생의 차별정책 개선, 한인 교사의 확대 등을 주장하며 동맹휴학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해 7월 학교 당국으로부터 좌익협의회 회원들 다수가 학사처분을 받았고 일제의 감시 강화로 좌익협의회의 활동이 위축되었다. 이에 그는 1932년 9월 18일 정종호, 한정희, 박희남 등과 함께 '예산학생동맹(禮山學生同盟)’을 조직했다.

강봉주는 지역별 항일학생 운동조직과의 연계를 기획했다. 먼저 예산공립농업학교 내에 김형래(金炯來) 등 5학년생과 이종규(李鍾圭) 등 3학년생들을 각각 대표로 임명하고 그들을 통해 동지를 규합했다. 그리고 이강오(李康午) 등 지방의 청년동지와 서울의 YMCA 등 외지의 학생조직과 연계를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이를 눈치채고 감시를 강화해 조직이 노출될 위기에 몰리자, 그는 1932년 11월 조직을 위장하기 위해 비밀결사 명칭을 토요회(土曜會)로 개칭했다.

1932년 11월 중순, 일제의 관제연극단체인 극단 만경좌(萬鏡座)가 예산군 예산면 시장터에서 <동방의 빛>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개최했다. 이 연극의 내용은 일본군이 만주의 마적으로부터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보호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연극을 본 강봉주는 회원들과 함께 공연 관람 거부운동을 전개하고 만경좌에게 공연 중단을 요구했다가 극단원들과 충돌했고, 결국 1932년 11월 2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3년 3월 30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은 그는 즉각 공소했지만 그해 5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제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 후 강원도 홍성군으로 이주했고, 1985년 9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봉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07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