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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2 11:44:08

1950년대 주한미군-한인 국제결혼


1. 개요

국제결혼 중에서도 1950년대 전후의 한국에 주둔했던 주한미군과 한인 여성의 국제결혼 절차를 소재로, 당대 미국 내에서의 아시아에 대한 인종주의적 장벽과 이민 후 국제결혼여성의 삶을 설명한다.

해당 문서는 '김은경, “1950년대 ‘결혼허가신청서’를 통해 본 한인 여성과 미군의 결혼과 이주: 미국의 이주통제정책과 타자의 ‘은밀한’ 연대,” 한국근현대사연구 91 (2019)'의 논문을 기반으로 하며, 그 외 참고문헌은 각주로 처리하였다.

2. 이민자 통제 정책

2.1. 규제적 이민 정책

19세기 중반의 미국에는 명시적인 이민자 통제 정책이 없었다. 단순한 절차를 통해 이주할 수 있는 이른바 ‘이민자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하지만 농업 위기와 경제적 어려움이 불거지면서 미국인의 일자리를 앗아가는 이민자를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은 세 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1]

2.2. 포용적 이민 정책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미국의 이민 통제 정책이 완화되기 시작했다. 강대국인 미국이 전쟁 과정에서 주둔하던 지역이 증가하였기에 자연스레 미군과 주둔지의 현지인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는 경우 또한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독립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한국인/일본인과 결혼하는 미군이 늘어나며 아시아인에 대한 규제 또한 줄어들기 시작했다.

* 1943년 이민법령(The Immigration Act of 1943) : 중국인 배제령 무효화.
* 1945년 전쟁신부법(The War Brides Act) : 미군의 외국인 배우자에 대한 할당제 폐지. 하지만 할당제에 위배되지 않는 인종인 백인을 대상으로 상정하였으며 3년간의 한시적인 법이었기에 한계.

1945년 전쟁신부법으로 외국인 배우자에 대한 할당제가 폐지되었으나, 아시아인과 결혼하고자 했던 미국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법이었다. 1947년, 주일미군 14명이 “영국 독일 불란서 여자와는 결혼할 수 있으면서 일본 여자와는 결혼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요지의 투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 시기, 미국에 아시아인과의 국제결혼을 신청한 미군 또한 존재하였으나 그 경우 아시아인 배우자는 ‘인종적 부적격 아내’로 분류되었다. [3]

그러나 1947년, 미군의 ‘인종적 부적격 아내’를 포용하는 방향으로 전쟁신부법이 새롭게 개정되었다. 기존의 전쟁신부법은 미국의 인종주의를 부정적으로 부각시켰고, 아시아인과 미군 사이의 관계 발전이 잦아지던 사회적 흐름에 더불어 이민 정책을 재고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시아인 여성에게도 미군과의 국제결혼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미국이 자국의 인종차별적 제도에 대해서 검토하고 어느 정도 국제 사회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되었음은 1952년 시행된 이민국적법(Immigration and Nationality Act)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민국적법을 통해 미국은 할당제 내에서 30%의 비율을 아시아에 제공했다. 아시아인의 미국 이주가 국제결혼이 아니더라도 가능해진 것이다. 또한, 미군 배우자에 대한 규정이 미국 시민권자의 외국인 배우자 조항에 포함되어 국제결혼여성은 할당제에 해당 없이 비할당 이민비자(nonquota immigrant visa)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파일:1900년대영주권취득현황.png

상단의 그래프[4]에서 보이듯, 1950년대를 기준으로 한국인의 미국 이민이 증가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이민국적법 이후 한-미 국제결혼

독립과 그 이후 대한민국 단일 정부 수립,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미군의 한국 주둔이 시작되었다. 당시 굉장히 궁핍했던 경제적 상황으로 인해 국민은 미군이 주둔한 기지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기지 주변에 특수한 상권을 형성했다. 이를 기지촌이라고 칭할 수 있다. 전쟁미망인이거나 생계를 꾸려나갈 방도가 없던 여성들 또한, 기지촌에서 장사하거나 웨이트리스, 성판매 여성 등의 직업을 택했다.[A] 1950년대에 주한미군과 결혼을 시도한 여성 중 기지촌 기거 여성이 많았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전쟁신부법과 이민국적법의 제정으로 국제결혼과 미국의 비자 취득이 동반되는 형태로 변화하자, 미국은 이민자 통제 정책의 일환으로 국제결혼 자체의 절차를 까다롭게 강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의 국제결혼 절차는 연인이 주한미대사관에 결혼 신청 서류를 제출하고, 그것이 승인됨으로써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절차에 요구되는 서류의 양이 방대하였고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기도 하였기에 대개 주한미군과 한인 여성의 결혼식은 대사관 앞에서 진행되었다는 웃지 못할 비사도 있다.

국제결혼의 승인을 위해 주한미군-한인 연인에게 요구된 서류는 결혼허가신청서, 건강진단서, 호적등본/출생증명서, 부모나 호주의 결혼 승낙서/동의서, 신원조사서 등의 것이 있었다. 이 중 몇몇 서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메뉴에서 다루고자 한다.

3.1. 결혼허가신청서

이 서류에는 신랑과 신부의 개인 정보, 즉 이름, 생년월일, 주소, 인종, 재정 상태, 이전 결혼 횟수(재혼일 경우 이전 부부관계의 종결 날짜와 종결 이유도 작성), 교제 기간, 신랑의 한인 배우자 부양 방식 등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각각의 항목에 대한 이유는 아래와 같다.

결혼허가신청서에 의하면, 국제결혼 부부 중 여성은 기지촌 여성인 경우가 많았고 남성은 미국 내에서 직급과 지위가 높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던 한인 여성이 국제결혼을 통해 이민을 선택하였음에도 경제적 어려움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음을 시사한다.

3.2. 건강진단서

건강진단서의 존재는 직접적인 이민자 통제 역할을 하였고, 키, 몸무게, 피부색, 머리색, 눈동자 색, 성병과 결핵 등 전염성 질병 유무를 기록하도록 하였다. 또한 1952년 제정된 이민국적법에도 정신박약자와 정신병자, 알코올/마약 중독자, 극빈자, 부랑자 등의 이민 부적격자 기준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타국인의 미국 이민을 통제했다.

결핵의 경우 이민국적법의 부적격자 기준에 포함된 항목이었으나, 성병은 그렇지 않았다. 이는 앞서 결혼허가신청서 부분에서 언급하였던 인종주의와 우생학적 정서가 반영된 차별적인 이민 통제 정책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3.3. 신원조사서

신원조사서는 신부의 출신지와 거주지에 관할 지역 경찰이 직접 방문하여 여성에 대해 조사하여 제출하는 서류였다. 이는 여성의 평판, 범죄 경력, 정치사상(공산주의자, 아나키스트), 성매매 전력 등의 조사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 내용과 기준은 보통 이민국적법에 명시된 이민 부적격자 리스트의 기준과 대체로 일치하였으나, 사상검증이라는 인권 침해와 필연적으로 관계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이민 기준이 성매매와 연관된 사람의 이민을 막고자 하였음에도 한-미 국제결혼여성 중 기지촌 여성의 비율이 높았던 것은 신원조사서의 주관적인 서술이 가능하다는 특성으로 인한 것이다. 실제로 신원조사서를 작성하기 위하여 관할지 경찰이 그 지역 주민에게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을 때 대부분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 해당 여성이 성매매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였음에도 주변인들은 그가 성매매와 전혀 무관한 여성이었다고 증언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4. 미국 이민 뒤 국제결혼여성의 생활

결혼허가신청서의 말미에 언급하였듯 국제결혼을 통해 한인 여성이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했으리라 단정 지어 해석할 수는 없다. 그리고 기지촌 여성, 혹은 ‘양공주’라는 지칭 아래 한국 내에서 배척되었던 여성들이 미국 사회에 아무런 문제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든 것도 아니었다.

결혼을 허가받는 절차부터 인종차별적 통제 시스템의 제재를 받던 국제결혼여성은 이민자들이 대개 겪는 문화 차이로 인한 어려움에 시달렸다. 그들은 모국어인 한국어 대신 서툰 영어로 모든 소통을 해결해야 했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될 위험이 존재하기도 했다. 또한, 일상 속 매 순간을 영어로 이야기하다 보니 말뜻의 의미를 정확히 전달하기 어려워 남편과 갈등을 겪는 상황도 늘었다. 이렇듯 국제결혼여성의 이민 생활 적응 여부가 여성의 영어 실력에 직접적으로 연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A]

하지만 여성들이 마냥 문화적 차이와 고충에 좌절하기만 하였느냐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었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국제결혼여성은 미국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연대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형성한 커뮤니티는 훗날 미국으로의 가족 단위 대규모 이민의 기반이 되었다.

4.1. 한미부인회 (Korean American Wives Association, KAWA)

한미부인회는 당시 미국 대사관 직원을 남편으로 두었던 故 송전기 여사(Chon Edwards)를 중심의 워싱턴 인근 한미 국제결혼여성 친목 모임이었다. 모임의 회장이었던 송전기 여사는 1950년대 이민 1세로서 겪었던 고충을 생각하며 1957년, 용산 8군에 국제결혼여성을 위해 기본적인 지식을 알려주는 신부학교를 창설했다. 6인이라는 소규모의 친목 모임으로 시작하였으나 인원이 늘어나며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영향력을 넓히기 시작했다.

국제결혼여성은 미국으로의 이주 이후에도 제 뿌리인 대한민국을 외면하지 않고자 했고, 한미부인회는 한국 문화를 미국에 전파한 1등 공신 중 하나다. 또한, 미국과 한국대사관 사이를 잇는 교각으로 활동하며 한인의 이민과 관련하여 사회 내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을 주었다. 1982년 해당 단체가 분리된 뒤에는 국제결혼 한인 여성으로만 구성되어 문화와 장학 사업에 힘을 쏟았던 워싱턴여성회와, 국제결혼여성뿐 아니라 워싱턴 인근 한인 여성까지 포함된 구성으로 활발한 봉사활동을 전개했던 한미여성재단으로 이어졌다.[A]

4.2. 그 외 커뮤니티

한미부인회 이외에도 다양한 한미 국제결혼여성의 커뮤니티가 존재해 왔고, 그 목록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A]

[1] 김태근, “미국 이민 정책의 역사와 전망”, 국제사회보장리뷰 2017 여름 창간호 Vol. 1, pp. 93~97(2017)[2] 박성제, “미국이 발동했던 '이민금지'의 역사… 첫 대상은 중국이었다”, 연합뉴스, 2017.02.04[3] 송하연, “인종주의의 장벽 아래에서 결혼하기: 해방 이후 주한미군 내 한국계 미국인 남성과 한인 여성의 결혼”, 한국문화연구, 42, pp. 349-395, (2022)[4] 미국토안보부(U.S. 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A] 정 나오미, “한국전쟁과 전쟁신부… 미주 한인 국제결혼여성들의 삶과 역사②”, WorldKorean, 2023.08.16을 인용. 해당 글은 미주한인이민120주년출판위원회의 책 <미주한인 동포사회의 발전과 도전 1903-1923>을 정리한 5편 구성의 연재물이다.[6] 정인환, "흑인이 투표한다, 백인이여 일어서라", 한겨례21, 2008.11.12, https://h21.hani.co.kr/arti/cover/cover/23732.html[7] 권은혜, “미국 내전 이후 인종 간 결혼 규제에 대한 법적 인식의 변화”, 미국사연구, 43(), pp.119-149 (2016)[A] [A]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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