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15년 제1차 세계 대전 서부전선에서 일어난 독일군과 연합군의 공방전.2. 전체 상황
개전 초기 독일은 슐리펜 계획에 따라 프랑스를 몰아붙였으나 마른 전투 패배 후 동부전선으로 2개 군단이 차출[1]되면서 공세 동력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독일이 여전히 전선 전반에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개전 초기와 같은 공세를 취하기는 어려웠고, 프랑스 또한 간신히 한숨돌린 상태로 반격을 계속하기에는 부담이 있었다. 프랑스를 구원한 영국은 신속한 참전으로 독일의 계획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했으나 전쟁 준비가 부족했던 나머지 금방 지쳐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물자 부족과 장비 부실로 인해 대규모 인명 피해까지 겪으면서 캐나다 등의 연방은 물론 인도 주둔군까지 동원할 지경에 이른다. 물자의 경우 포탄과 탄약의 부족이 심각했다. 하지만 이 점은 독일 또한 마찬가지로 슐리펜 계획을 과신한 나머지 개전 전 군수시설의 가동률이 기대보다 낮았고, 개전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생산량을 늘렸지만 전선에 조달했을 때에는 이미 전선이 정체된 상황이었다.3. 프랑스의 동계 공세
독일의 공세가 둔화되고 전선이 고착화되면서 전력을 보충할 수 있었던 연합군은 반격을 준비한다. 프랑스 총사령관조프르는 우선 파리를 겨냥한 위험요소 제거를 1차 목표로 하여 랭스와 아라스 일대를 탈환하는 계획을 설계한다. 이를 위해 아르투아의 10군와 샹파뉴의 4군을 동원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는 말 그래도 간신히 버티고 있는 수준이었기에, 여전히 장비와 병력 모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렇기에 공세는 불안한 선택이었지만, 조프르에게는 여유가 있을 때 점령지를 탈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계획에 따라, 1914년 12월 17일 10군이 수쉐즈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공세가 시작되었다, 20일 4군이 남측에서 돌진했고, 연말에는 공세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 물자가 뚝 떨어져 버리고 부족한 포병전력으로 인해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말았고, 결국 1915년 1월 20일 공세는 중단되었다. 2월 재개되었으나 전황은 이전과 크게 바뀌지 않았다. 3개월 가까이 진행된 동계공세에서 프랑스는 25만, 독일은 15만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공세 결과 전선의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독일의 예봉은 확실히 꺾였고, 과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치욕이 반복될 가능성이 거의 사라질 수 있었다.
4. 영국의 3월 공세
프랑스가 동계공세를 실행하는 사이 영국은 전술한대로 전력 보강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이 때문에 프랑스의 공세를 보조하지 못했다. 결국 프랑스의 공세는 한계에 부딪혔고, 2월 들어 공세를 완전 중지하고 말았다. 그런데, 프랑스가 공세를 중지할때쯤에서야 영국은 독자적으로 공세를 준비했다. 영국원정군 총사령관 존 프렌치는 영국 쪽으로 돌출된 누브 샤펠을 점령해 독일 바바리아 7군단을 격퇴하고 전선을 재정비하려 했다. 1군을 주축으로 하고 헤이그를 지휘관으로 한 이 전략을 위해 영국 원정군의 포병전력 상당수를 차출할 정도로 영국은 이 공세에 상당히 많은 준비와 기대를 했다.
3월 10일 영국군 제1군은 독일군을 물리치고 1km 진격하면서 돌출부 제거라는 목표를 달성했다.그런데 곧바로 독일의 증원군이 투입되면서 더 이상의 전진은 이뤄지지 않았고, 더욱이 포병이 보병의 전진을 뒷받침하지 못해 보병손실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공세 이튿날부터 영국군의 손실이 무지막지하게 증가했다. 결국 12일 공세는 전면 중단되었다. 영국은 3일에 걸쳐 13,000명의 피를 투입했지만 전과는 누브 샤펠 일대 돌출부 제거에 그치고 말았다.
5. 2차 이프르 전투
한편 당시 독일은 타넨베르크 전투에 힘입어 서부전선보다 동부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여전히 전략적 우위를 위해 서부전선에 대한 공세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1914년 돌파하지 못한 이프르에 집중했다. 이전과 달리 목표를 이제르 강과 이프르 사이 필켐 능선일대 장악을 축소해 설정하고 작전을 진행했다. 이를 위해 1차 이프르 전투 당시 주력이었던 알브레히트 공작의 제4군이 재차 투입되었다. 당시 이프르 일대는 영국 제2군, 프랑스군, 벨기에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4월 22일 독일이 공세전 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포격 종료후 악마의 숨결이 퍼져나갔다. 독가스가 해당 지역 전선 전체에 퍼져나가면서 5천의 프랑스 병력이 아무것도 못하고 사라졌다. 그 사이 독일군이 진격하여 필켐 능선과 랑에마르크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그러나 독일은 예비대 부족과 잔존 독가스의 영향으로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못했다. 그사이 영국 제2군이 생줄리앙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독일의 저항을 막아냈다. 24일 독이리 독가스를 재차 사용하며 공격했지만 다시 제2군의 선전으로 방어를 해냈다. 하지만 더이상 버틸 여력이 부족했고, 5월 1일 영국 제2군은 5km 후방으로 물러나 이프르 전방에 방어선을 새롭게 구축했다. 이후 독일은 진격을 계속해 25일 이프르 동남부 벨레바르드 능선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독일 또한 공세 여력이 부족했고, 이프르 남부 아라스 일대의 전투를 끝으로 공세는 끝났다. 이 전투를 통해 독일은 3만 5천의 병력을 희생시키면서 이프르를 삼면에서 포위하고 전선을 재정비 할 수 있었다.
6. 영국과 프랑스의 춘계 공세: 2차 아르투아 전투
독일이 이프르를 두들기는 사이 프랑스는 포병 전력 확충에 힘을 썼다. 그리고 5월 초 동부전선에서 시달리던 러시아의 요청으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한다. 중부지역일대를 담당한 페르디낭 포슈는 라 바세에서 아라스를 잇는 12km의 전선에 막대한 포병전력을 투입했다. 5월 9일 1,200문의 야포가 포격을 개시하면서 2차 아르투아 전투[2]가 개시되었다. 기습당한 독일군은 전력을 후방으로 후퇴시켰다. 프랑스는 10군이 비미 능선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문제는 선봉인 제33군단과 후발대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져 버린 것이다. 이는 10군 사령관 뒤르발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것으로, 돌파속도를 과소평가하여 예비대를 너무 뒤에 배치해 일어난 문제였다. 결국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의 반격으로 비미 능선은 다시 독일에게 넘어갔고, 이후 5주 간 이 능선 하나가지고 계속 피를 흩뿌린다. 프랑스는 기어코 10만의 목숨을 갈아넣어 작전 개시 후 10km를 나아갔지만, 능선만큼은 탈환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열심히 피를 뿌리는 사이 이번에는 영국도 공세에 동참했다. 지난 3월 점령하지 못한 누브 샤펠 방면으로 다시 진격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모든 물자가 부족하여 공격은 둔화되었다. 그럼에도 누브 샤펠 동쪽 오베르 능선으로 기어코 돌격해 하루 만에 1만 명이 희생되었고 추가로 2만 명의 목숨을 더 갈아넣었지만 1km 전진에 그치면서 공세는 마무리 되었다.
7. 최후의 격전
연합군은 독일군의 소모를 극한까지 유발시켜 전쟁 수행 능력 자체를 궤멸시키겠다는 구상[3]을 하게 한다. 그래서 이를 위해 아르투아와 샹파뉴를 대상 지역으로 지정하고 약 80km에 이르는 전선에 북에서 남으로 47개 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제10, 2, 4군이 차례대로 배치되었다. 영국군은 제1군을 동원해 라 바세 남부 루스를 거쳐 누브 샤펠로 나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포탄 부족이 발목을 잡았다.[4]하지만 연합군은 그냥 9월 25일에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최대치로 두꺼워진 독일의 방어선에 막혀 진격이 둔화되었고, 영국군이 독가스까지 사용했지만 효과는 미비했다. 결국 결과는 연합군의 손실이 더 컸다. 11월 6일 먼저 지친 연합군이 철수하면서 3차 아르투아 전투와 2차 샹파뉴 전투가 마무리 되었다. 연합군이 25만 명을 몰아넣었는데도 전선에는 변동이 거의 없었다. 이후 소규모 국지전만 발생할 뿐 대규모 충돌은 발생하지 않고 서부전역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