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bc002d><colcolor=#fff> 힌터카이페크 살인 사건 Der Mordfall von Hinterkaifeck The Hinterkaifeck murders | ||
▲ 힌터카이페크(Hinterkaifeck) 농장의 전경. 현재는 철거되었다. | ||
일시 | 1922년 3월 31일 (추정) | |
발생 장소 | 힌터카이페크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주 바이트호펜 카이페크)[1] | |
유형 | 범죄 | |
혐의 | 주거침입, 대량살인 | |
피해자 | <colbgcolor=#bc002d,#11102d><colcolor=#FFF> 사망 | 6명 |
부상 | - | |
상태 | 수사 종결(공소권 없음)[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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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힌터카이페크 살인 사건(Der Mordfall von Hinterkaifeck)은 1922년 3월 31일 독일국 바이에른주 바이트호펜(Waidhofen)의 힌터카이페크 농장에서 벌어진 일가족 피살 사건이다. 해당 사건의 범인은 잡히지 않았으며, 이후 100년이 흘러 영구 미제 사건이 되었다.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가리키는 '힌터카이페크'라는 명칭은 실재하는 행정구역의 이름이 아니라, 살인 사건이 일어난 농장이 인근의 시골 마을인 '카이페크(Kaifeck)'의 북쪽으로 약 1 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뒤쪽'이라는 뜻의 '힌터(hinter)'를 붙여 '힌터카이페크'로 명명된 것이다. 따라서 독일 국내에서도 '힌터카이페크'라고 하면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만 검색된다.
2. 경위
2.1. 발견
※ 관련자들의 연령은 모두 사건 당일 기준 만 나이로 기록함.
※ 체칠리아 그루버와 체칠리아 가브리엘의 이름이 겹치므로, 이하에서는 체칠리아 가브리엘을 '어린 체칠리아'라고 표기함.
※ 체칠리아 그루버와 체칠리아 가브리엘의 이름이 겹치므로, 이하에서는 체칠리아 가브리엘을 '어린 체칠리아'라고 표기함.
사건은 1922년 3월 31일 금요일 저녁에 발생했다고 추정하지만,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단지 현장의 상황을 근거로 추측만 할 뿐이다.
피살자는 농장주 63세 안드레아스 그루버(Andreas Gruber), 부인 72세 체칠리아 그루버(Cäzilia Gruber), 딸 35세 빅토리아 가브리엘(Viktoria Gabriel), 빅토리아의 두 자녀인 7세 체칠리아(Cäzilia), 2세 요제프(Josef) 그리고 농장의 고용인 44세 마리아 바움가르트너(Maria Baumgartner)로 총 6명이었다. 이 가운데 마리아는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이 농장에 도착했다고 한다.
피살자들은 모두 곡괭이에 머리를 강타당해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루버 부부와 딸 빅토리아 가브리엘, 어린 체칠리아는 헛간에서, 요제프와 마리아는 집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범인(혹은 범인들)은 그루버 부부와 빅토리아, 어린 체칠리아를 어떤 수단으로든 헛간으로 유인하여 살해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 침실의 아기침대에서 잠든 요제프와 하녀 방에 있던 마리아를 죽였다고 추정하였다.
그러나 시신은 늦게 발견되었다. 토요일과 월요일에 어린 체칠리아는 학교에 나와야 했지만 등교하지 않았고, 일요일에는 가족들 중 아무도 성당 미사에 나오지 않았다. 화요일(4월 4일)에 기계수리공이 농장을 방문해 5시간 동안이나 기계를 고쳤지만, 농장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나오질 않았다. 수리공이 이상하게 여겨 카이페크 마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자, 주민들도 '힌터카이페크 농장 사람들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몇 명이 농장에 찾아왔다. 방문자 중에는 우편배달부도 한 명 있었는데, 자신이 토요일에 넣어둔 우편물이 그대로 있음을 발견했다.
주민들은 농장에 들어온 뒤 농장 내 모든 건물의 문이 잠겼음을 알아차렸다. 주민들이 헛간 문을 뜯고 들어가자 시체 4구가 발견되었고, 이어 집안 문을 뜯고 들어가자 나머지 시체 2구가 발견되었다.
마을 주민들이 화요일이 되어서야 농장에 가 본 이유는 힌터카이페크 농장이 마을에서 1 km 떨어진 외딴 곳에 있는 데다, 농장주인 안드레아스 그루버가 괴짜이자 구두쇠로 취급받아 마을 사람들과 평소 사이가 안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2. 수사
주민의 신고를 받고 이튿날인 4월 5일 뮌헨에서 파견된 경찰이 농장에 도착했다. 수사관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사건 현장에 몰려온 구경꾼들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이후 수사관들은 농장을 정밀히 수색해서 헛간 주변에 깔린 건초더미를 발견했는데, 누군가가 발자국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깔아둔 것으로 보였다. 또한 헛간 지붕 밑에 누군가가 잠을 잔 자국이 있었고, 헛간 지붕 위에는 농장 전체를 살펴보기 쉽게 하려고 그랬는지 일부러 기와를 몇 장 뜯어낸 흔적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범인 (들)은 사건 전부터 몰래 농장에 들어와 상황을 살핀 뒤, 저녁을 노려서 범행을 저지른 듯했다.노이부르크(Neuburg)[3]의 지역 검시관(Landgerichtsarzt)이었던 요한 밥티스트 아우뮐러(Johann Baptist Aumüller, 1902-1932) 박사는 현장에서 피해자들의 시신을 부검했다. 부검 감정서에 따르면, 어린 체칠리아가 범인에게 공격을 받고도 약 2시간 정도 생존한 상태로 자기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4] 나중에 수사관들은 부검 당시 분리한 시신의 머리를 가지고 영매를 통해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시도했으나 당연하게도 실패했다. 4월 8일, 바이에른주 내무부는 범인을 수배하고 중요한 제보자에게 10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수여하겠다고 공고했다.
수사관들은 마을 주변을 떠돌아다니던 부랑자, 행상인 및 지역 전과자를 중심으로 탐문 수사를 벌였으나, 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데 마을 주민들의 증언을 수집한 결과 사건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행적들이 발견되었다. 힌터카이페크 농장 앞에는 16.5 헥타르 넓이의 숲이 있었는데, 이 숲은 농장의 남쪽 면과 붙어서 마을에서 농장을 곧바로 보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주민이 증언하기를, "사건 며칠 전에 농장주 안드레아스 그루버가 숲에서부터 농장까지 이어지는 이상한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인근 숲에서 농장까지 들어온 발자국은 있었지만, 나간 발자국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거기에 "지붕 위에서 발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거나 낯선 신문지가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고 들었다.", "농장 건물의 열쇠 몇 개가 없어졌다고 들었다"는 주민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루버는 주민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전하면서도 경찰에는 신고하지 않았다. 그 정도 정황이라면 누군가 농장에 몰래 숨어들었다고 생각해야 자연스러울 텐데도, 기이하게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조사 과정에서 사건이 일어나기 6개월 전 농장에서 일하던 여자 고용인이 일을 그만두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해당 고용인을 탐문하자, 그녀는 '농장 전체가 뭔가에 사로잡혀서 홀려있는 게 두려워서 일을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집 근처에서 기괴한 목소리와 이상한 소리를 들었고, 결정적으로 다락방에서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어서, 매우 두려운 나머지 더 이상 농장에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이 일을 그만두고 6개월이 지나서 온 새 고용인이 마리아 바움가르트너였는데, 일을 시작하러 농장에 도착한 날이 바로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날이었다. 옛 고용인 여자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최소한 6개월 전부터 힌터카이펙 농장에 수상한 침입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더 의아한 부분은, 범인들이 그루버 일가를 다 죽이고 잠시 동안 농장에 머물렀다고 추정된다는 점이었다. 그루버 일가가 살해된 뒤에도 농장 가축들에게 누군가 먹이를 주고 부엌에서 빵과 고기를 먹은 흔적이 나왔다. 또한 사건 당시 주말에 농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는 것을 목격한 주민도 있었다. 그러므로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는 쪽으로 수사방향이 전환되었지만, 역시 드러나는 게 없었다.
만약 범인들이 돈을 찾기 위해서 농장에 머물렀다면 분명 현금을 찾아냈겠지만, 손도 대질 않았다. 당초 경찰 역시 인근의 우범자나 부랑자가 농장의 돈을 노리고 저지른 일이 아닐까 추정했지만, 농장을 샅샅이 수색하자 안방에서 거액의 현금이 고스란히 발견되었다.
범인이나 관련자가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다면 사건의 정황이 일부 드러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사기록에는 신부의 증언이 기록되지 않았다. 가톨릭에서 사제는 고해성사에서 들은 이야기를 절대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되는데(고해성사 참조), 바이에른은 독일에서도 가톨릭 교회의 세가 매우 강하고 마을 주민들도 가톨릭 신자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신부가 만에 하나 고해성사로 사건의 정황을 들었더라도 이를 수사관들에게 증언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5] 이상한 점은 딸 빅토리아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거액을 성당 고해소에 두고 간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신부도 수사관들에게 조사를 받았을 개연성이 있지만, 증언이 기록되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가운데 뮌헨 경찰 수사관들은 사건해결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나, 외지인에게 배타적인 마을 주민들에게 반감을 사서 수사에 난항을 겪었다. 수년간 마을 주민 수백 명이 조사를 받았으나 결정적인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2.3. 용의자
빅토리아의 남편 카를 가브리엘(Karl Gabriel, 1888-1914)은 빅토리아와 1914년 4월에 결혼식을 올리고 짧은 신혼을 즐겼으나, 그해 7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제국군 육군에 입대한 뒤[6] 10월 아라스(Arras) 전투[7]에 참전했다. 그러다 12월에 정찰하던 중 사망하여 향년 25세 나이로 St.Laurent-Blangy[8]에 있는 전몰자 공동묘지에 묻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어린 체칠리아는 1915년에 유복녀로 태어났다.과부가 된 빅토리아는 그 후 로렌츠 슐리튼바우어(Lorenz Schlittenbauer 1874-1941)란 홀아비와 가까워졌으나, 당연하게도 빅토리아의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결혼을 극구 반대하였다. 로렌츠는 공개적으로 자기가 요제프의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안드레아스 부녀에게 얼마간 돈을 주었다. 사실 로렌츠의 아내는 1918년에 사망했지만, 로렌츠는 아내가 죽기 전부터 빅토리아와 관계를 맺은 듯하다. 그래서 빅토리아는 사건이 일어나기 얼마 전에 로렌츠를 상대로 위자료 청구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렌츠가 살던 집은 1926년에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이때 빅토리아가 로렌츠에게 건네준 확인서는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로렌츠가 요제프의 친부로서 지어야 할 모든 책임에서 풀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약 빅토리아가 정말로 이런 확인서를 건네주었다면,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왜 걸려고 했는지도 의문이다. 당시 로렌츠와 빅토리아 사이의 관계는 꽤 복잡했던 듯하다.
로렌츠는 여러 사람들에게 힌터카이페크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받았다. 그는 처음 시신들이 발견되었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고, 다른 사람들이 시신을 본 충격으로 밖에 나가 있었을 때에도 혼자 남아 시신을 건드렸다. 그 외에도 이상한 언행을 했기 때문에, 사건 당시로부터 지금까지도 유력한 사건 용의자로 의심받는다. 그 역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1941년 죽기 전에도 자기를 힌터카이페크 살인 사건의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고소하려 했을 정도였다.
요제프의 친부를 두고 다른 소문도 돌았다. 안드레아스와 빅토리아가 부녀지간에 근친상간을 하여 요제프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근친상간 관계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일단 요제프는 그루버(Gruber)란 성을 받았다. 만약 요제프가 정말로 로렌츠의 아들이었다면, 로렌츠는 친자를 빼앗긴 셈이다. 요제프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꽤 엉뚱하게도, 빅토리아의 남편 카를이 범인이란 소문도 돌았다. 카를이 실은 프랑스에서 전사하지 않고 살아돌아와 장인의 농장에서 범행을 하지 않았느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만약 카를이 범인이라면 왜 바로 아내를 만나러 오지 않고 몇 년이나 뒤에 은밀히 돌아와 살인사건을 저질렀을지 설명이 되지 않아 납득하기가 어려운 주장이다.
여하튼 힌터카이페크 농장에서 뭔가 기묘한 분위기가 흘렀음은 분명한 듯하지만, 과연 그런 분위기가 살인이라는 끔찍한 결말을 이끌었는지 지금에 와선 알 도리가 없다.
3. 사건 이후
피해자들은 모두 바이트호펜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묘지에는 이들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졌다. 요한 박사가 잘라낸 두개골은 함께 매장되지 못하고 아우크스부르크의 법원 건물에 보관되었다가, 제2차 세계 대전 때 법원 청사가 폭격당했을 때 소실됐다.힌터카이페크 농장은 사건이 일어난 이듬해인 1923년에 철거되었다. 철거 중 다락방 지붕에서 곡괭이가 발견되었는데, 경찰이 조사해보니 그루버 일가족을 살해하는 데 사용된 흉기로 드러났다. 오늘날 사건 현장 근처에는 그 자리에서 사건이 있었음을 말해주는 조그만 추모비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농장이 있던 자리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70 m쯤 떨어진 삼거리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
이후 뮌헨 경찰은 1955년까지 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일시 수사를 중단했고, 1986년에 다시 이 사건을 재조사했으나 이때도 새로 드러난 사항은 없었다. 결국 뮌헨 경찰은 수사를 종료하고 사건을 미해결로 처리했다.[A] 2007년에는 독일 경찰학교 학생들이 현대수사기법으로 남은 자료들을 조사해서 유력한 용의자를 추려냈으나, "해당 인물의 유족들이 살아있으므로, 그 '유력한 용의자'가 누군지 밝히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4. 기타
- 워낙 미스터리한 사건인 만큼, 독일에서는 여러 번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차용되었다. 가장 최근 나온 영화로는 2009년 독일에서 제작한 '카이펙 머더 (원제 Hinter Kaifeck, 영제 Kaifeck Murder)'가 있다. 한국에서는 제1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1] 위경도 좌표는 48.593180°N, 11.319509°E. ISO 6709에 따른 십진수 좌표는 +48.59395+011.32134.[A] 독일의 모살죄(계획적 살인, Mord)에 대한 공소시효(Verfolgungsverjährung)는 바이마르 공화국 당시에는 20년이었으며,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후 전범을 처벌하기 위해 폐지되었다. 공소시효가 폐지되지 않았더라도 범인은 이미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사실상 공소권이 없다.[3] 현 바이에른주 오버바이에른현 노이베르크슈론벤하우젠 지구(Landkreis Neuburg-Schrobenhausen)의 옛 지명.[4] 실제로 흉기로 공격받은뒤 즉사하지 않고 시간이 흘러 사망한 시신을 부검해보면 그 고통에 머리를 쥐어뜯거나 몸을 긁은 상처가 많이 남아있다고한다.[5] 그래서 신부는 고해성사로 범죄자의 고백을 들으면 자신이 신고하지 못하고 자수를 권유한다. 자수를 하지 않으면 보속을 줄 수 없다고 버티는 식.[6] 자원입대했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고 한다.[7] 1917년에도 아라스 전투가 있었지만, 여기서는 1914년 전투를 말한다.[8] 프랑스 아라스 가까이 있는 지명이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