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휴이 롱 암살 사건 Assassination of Huey Long | ||
▲ 죽기 2주 전의 휴이 롱 | ||
▲ 사건 발생 위치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35년 9월 8일 | |
발생 위치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루이지애나 주 정부 건물 앞 | |
유형 | 살인 | |
원인 | 불명 | |
가해자 | 칼 와이스 | |
피해자 | 휴이 롱 / 미국 루이지애나 연방상원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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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정치인 휴이 롱이 칼 와이스에게 FN M1910으로 암살당한 사건.2. 피해자 휴이 롱
자세한 내용은 휴이 롱 문서 참고하십시오.3. 사건 전개
급진적인 진보 정책 추진 및 이를 위한 뇌물 제공으로 인해 적이 많았던 롱은 항상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다니며 신변보호에 만전을 기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본거지인 루이지애나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다.연방판사 벤자민 헨리 페이비(Benjamin Henry Pavy, 1874~1943)가 급부상하자 롱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주법을 개정했다. 그러자 페이비의 사위이자 의사인 칼 와이스(Carl Austin Weiss 1906~1935)가 분개하여 1935년 9월 8일, 루이지애나 주의회 의사당 건물에서 롱을 저격했다.[1] 칼 와이스는 현장에서 경호원들이 쏜 60발이 넘는 총알에 맞아 사살되었고 롱은 이틀 동안 사경을 헤메다가 1935년 9월 10일 결국 사망했다. 롱의 장례식에는 무려 지지자 10만여 명이 몰려와 그를 애도했다고 한다.
4. 사건 이후
칼 와이즈의 아내와 아들은 죽을 때까지 칼은 범인이 아니라고 반발했다. 이들은 휴이 롱을 쏴죽인 범인은 경호원들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에도 헛소리로 받아들여졌다. 아내 이본 루이즈 와이스 (Yvonne Louise Pavy Weiss 1908~1963)나 아들 칼 와이스 주니어(1935~2019)는 죽을 때까지 와이즈의 무죄를 주장했다. 이본은 1935년 당시 외아들인 주니어가 태어나서 기뻐했고 9월 8일 그날도 남편은 웃으며 출근했다. 태어난 지 석 달 된 아들과 아내를 놔두고 그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했다.주니어는 2019년 8월 1일, 84살로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까지도 아버지의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무죄 주장에 대하여 이미 1991년, 미국 루이지애나주는 56년 동안 묻혔던 칼 와이스의 시체를 꺼내 뼈를 자연사 박물관에게 조사를 맡겼다. 와이스의 뼈 곳곳에 총알 자국이 남아있었는데 그의 뼈나 당시 기록, 현장 그림, 총까지 모두 조사한 시체 법의학 과학자 제임스 얼 스타즈(James E. Starrs)는 당시 현장 그림을 봐도 휴이 롱 등 뒤에서 쏜 총알이 확실하고 등 뒤에 있던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고 더 확고해졌다고 발표했다.
이에 아버지처럼 의사가 된 주니어와 똑같이 현재도 의사로 일하는 손자 칼 와이스 3세는 반발했지만 시체 부검결과를 상세히 보여주자 한다는 소리가 다른 시체를 부검했다는 억지스러운 주장을 했다. 지금도 이 주장을 손자 칼 와이스 3세가 계속 한다. 칼 와이스가 휴이 롱을 암살하자 오히려 페이비 판사는 정치적 입지까지 박살났다. 그래서 장인을 증오하여 정치적으로 매장하고자 휴이 롱을 죽이지 않았느냐는 소리까지 나올 판국이다. 아무튼, 칼 와이스가 진범이라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