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경칠(敬七) |
본관 | 장수 황씨[1] |
출생 | 1853년 6월 8일 |
전라도 남원도호부 적과방 하율리 (現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율천마을) | |
사망 | 1943년 6월 16일[2] (향년 90세) |
전라남도 남원군 | |
종교 | 천도교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396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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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황석현은 1853년 6월 8일 전라도 남원도호부 적과방 하율리(現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율천마을)에서 황진의 10대손인 아버지 황파(黃壩, 1827 ~ 1885. 11. 8)와 어머니 김해 김씨(? ~ ?. 1. 9) 김사성(金士成)의 딸 사이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나고 자란 남원시 덕과면 사율리 율천마을에는 본래 그의 16대조 방촌 황희와 9대조 황위(黃暐, 1605 ~ 1654) 등의 위패를 봉안한 풍계서원(楓溪書院)이 있었는데, 서원 창건 당시 황위의 후손들이 모여와 살게 되어 장수 황씨(長水 黃氏) 집성촌을 이루었다. 이후 서원은 왕명으로 대강면 풍계리로 옮겨지면서 후손들이 대거 이주했지만, 그 일부가 여전히 잔류하여 현재도 율천마을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그는 천도교 신자로, 1919년 3월 2일 남원군에서 천도교 전도사인 이기동(李起東)으로부터 이기원(李起元)·황동주(黃東周)와 같이 독립선언서 40여매를 전달받아 교구장 유태홍에게 전달했다.
이후 독립선언서의 취지와 내용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보절면으로 가서 천도교인 김덕인(金德仁)에게 전달하고 면사무소와 주재소 게시판 등에 붙이게 하며 활동하다가 붙잡혔다. 1919년 4월 24일 광주지방법원 남원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남원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3년 6월 16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황석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 11월 17일 당초 완주군 용진읍 운곡리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