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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5 08:22:36

홍일창

파일:홍일창(홍세환).png
<colbgcolor=#0047a0> 출생 1890년 1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 북이면 석화리
사망 1929년 7월 23일
미상
가족 아버지 홍종식 어머니 홍종화 배우자 최창화
자녀 홍순화, 홍재옥, 홍재성
학력 광무학교(졸업)
보성중학교(졸업)
공업전문학교(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1990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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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천도교 계열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홍일창은 1890년 1월 3일 충청북도 청주군 북이면 석화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홍종식이라는 사람으로 동학농민운동2차 봉기에 접주로 참가했던 사람이었다. 1898년 동학에 입도하고 광무개혁을 통해 설립된 실업학교인 광무학교를 1906년에 졸업했다. 이후 보성중학교[2]와 공업전문학교[3]를 각각 1910년, 1912년에 졸업했다.

공업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서산 지역 최초의 공립학교였던 서산보통학교를 비롯한 여러 학교를 돌며 교원활동을 하는 한편, 천도교 내에서도 여러 보직을 맡았다. 1919년에는 3.1 운동에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의 아들 최동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과 참여하기도 하였다. 5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며 활동하는 한편 당시 임시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던 독립신문 제작에 참여하고자 하여 최동호, 최욱, 정창수, 여보현, 이만형, 정광조 등과 자금조달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 계획이란 천도교의 자금을 털어(...)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쓸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4] 따라서 계획을 위해 권총을 준비하고 일본인 형사로 위장했으나 헌병대에 발각되어 전원 체포되고 홍일창은 보안법위반, 정치범죄 처벌령위반, 강도예비, 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923년 출소한 이후에는 천도교 청년당의 창립에 주요 인물로 가담하여 계속 활동을 이어나갔다. 천도교 청년당은 천도교 이념에 따라 민족주의를 퍼트리기 위해 여러 계몽운동을 펼쳤으며, 시일 학교에서는 방정환과 함께 강사로 일하기도 하였다. 또한 1928년에는 일본의 자본에 억압당하는 소상공인들을 구제하기 위해 청년당 내 상민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9년 7월 23일 40세의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1] 1927년 12월 홍세환(洪世煥)으로 개명[2] 현재는 보성고등학교이다.[3] 과거 대한제국의 상공학교로 출발해 홍일창이 재학할 시점에는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라는 명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이 된다.[4] 이들이 털고자 한 금액은 당시 약 5000원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