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洪福, ?~1276남송 말기의 인물이다.
2. 생애
생년 미상으로, 하귀(夏貴)의 가동이었다. 그는 하귀를 따라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워 진소군통제(鎮巢軍統制)까지 올랐다.원나라에 투항하였다가[1] 1275년 4월 반기를 들어 원나라의 수비군들을 죽였다. 홍복이 반란을 일으키기 전 아답적(阿答赤)[2]이 진소군(鎮巢軍)[3]을 지키고 있었다. 아답적이 이끄는 원나라 군대는 아속군(阿速軍)[4]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매우 잔혹하였다. 이에 홍복은 그들을 시내로 유인하여 술과 연회를 베풀었고 원나라 병사들이 술에 취하자 홍복은 성 안의 주민들을 이끌고 아답적(阿答赤)을 비롯한 원군을 모두 죽였고 하귀의 밑으로 돌아간다.[5]
1275년 5월에는 지진소군(知鎮巢軍)으로 임명된다.[6]
1276년 2월 남송 정부가 항복한 뒤, 같은 달 하귀가 회서 지역을 바치고 원나라에 투항한 이후 진소군의 홍복을 설득하여 같이 원을 섬기자고 권했지만 홍복은 따르지 않았다. 이에 하귀는 홍복의 조카를 사신으로 보내서 그를 재차 설득하려 했지만 홍복은 조카를 베어 죽이면서까지 투항을 거절한다.
원나라의 군대는 곧 사방으로 성을 포위하여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함락되지 못했다.
결국 하귀는 홍복이 지키는 성 아래에 이르러서 좋은 말로 홍복을 불렀고, 자신이 혼자서 성 안으로 들어와도 되겠냐고 청하였다. 이에 응한 홍복은 성문을 열고 하귀를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하귀를 따라왔던 아술(阿術)이 복병을 일으켜서 홍복은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모두 붙잡혀서 목숨을 잃게 되었다.
홍복이 죽기 전 하귀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아들 홍대원(洪大源)과 홍대연(洪大淵)을 죽이고 부르면서 말하였다.
법이 주모자를 처벌하는 것을 멈추라고 청하는데, 어찌 온 가족이 죽음에 이르게 하겠느냐?
홍복이 꾸짖으며 말하였다.한 목숨으로 송조에 보답하는데, 어찌 남에게 살 것을 구하라고 고할 수 있겠사옵니까?
이후 홍복이 하귀의 불충을 크게 욕하였고 몸은 남쪽을 향해 죽을 것을 청하였다. 이로써 밝음으로 국가를 배신하지 않았다.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3. 기타
- 송사 강재(姜才)의 열전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지만 간략하게 몇 줄로만 기록되어 있다.
- 《신원사》에 수록된 하귀의 열전에는 하귀가 직접 홍복 부자를 죽였고, 홍복은 죽기 전 하귀를 크게 욕하면서 그의 불충함을 여러차례 꾸짖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원사》 세조본기에서는 하귀가 사자를 보내어 투항하게 했으나 홍복이 사자를 죽였고 이에 하귀가 직접 나와 투항을 권하자 홍복이 나왔고, 이에 아술(阿朮)이 군중에서 그를 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1] 진소군은 정가주 전투 이후 1275년 2월 투항하였던 것으로 나와 있다.[2] 아탑적(阿塔赤)으로 기록되기도 한다.[3] 1263년 송 이종 때 오늘날 안후이성 소현에 세웠다.[4] 이들은 고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 페르시아어를 사용하였다. 당시 중국인들은 이들을 벽안회회(碧眼回回) 또는 녹정회회(绿睛回回)라고 불렀다. 여기서 아속은 몽골어로 수비를 의미한다.[5] 《원사》 앙길아(昂吉兒)와 아답적의 열전에는 1274년 홍복이 반란을 일으켜 아답적을 살해한 것으로 나오고, 앙길아의 열전에서는 홍복이 반란을 일으키자, 앙길아가 성을 공격하여 홍복과 동통제(董統制), 담정장(譚正將)을 생포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등 기록이 상충된다.[6] 《송사》 영국공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