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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5 01:28:45

아이신기오로 이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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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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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내각총리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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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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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황제 }}}}}}}}}

파일:애신각라혁광.jpg
대청 초대 내각총리대신
정체 愛新覺羅 奕劻
간체 爱新觉罗 奕劻
만주어 ᠠᡳᠰᡳᠨ ᡳᡴᡠᠸᠠᠩ
한국식 독음 애신각라 혁광
영문 Aisin-Gioro Yikuang
보정(輔廷)
출생 1838년 11월 16일
청나라 직예성 베이징
사망 1917년 1월 28일 (향년 78세)
중화민국 베이징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학력 가정교육
직업 외교관, 정치가
총리대신
재임 기간
1대 1911년 5월 8일 ~ 1911년 11월 1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권좌에 오르다2.3. 양취희 사건2.4. 선통제 옹립2.5. 신해혁명2.6. 말년
3. 여담4. 주요 경력5.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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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나라황족이자 정치인. 초대 청 내각총리대신. 뇌물을 밝힌데다 위안스카이의 집권을 도왔으며 외교관 재직 시절 열강의 요구를 너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현재는 매국외교의 대명사로 평가가 나쁘다.

청나라 황족들을 부를 때 으레 그렇듯이 성을 빼고 혁광이라고 부르는 일이 대부분이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38년, 건륭제효의순황후의 17번째 아들인 애신각라 영린[1]의 손자이며 보국공 애신각라 면성의 장자로 태어났다. 1850년, 보국장군에 봉해졌으며 1852년 패자가 되었다. 1860년 패륵에 봉해졌고 1872년 군왕, 어전대신에 임명되었다. 1884년 총리각국사무아문 겸 경군왕에 봉해졌다. 1885년 11월, 순현친왕 혁현 밑에서 내정행주가 되어 해군 사무를 보았다. 1886년 2월, 황제를 언제든 알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1898년 10월 18일, 영국 공사 클로드 맥도날드 경에게 청하여 프랑스 공사관 의사 드테브 박사가 자금성에서 광서제를 진찰하게 주선하였다.

이때 드테브 박사는 27세밖에 되지 않는 광서제가 만성 신장염에 걸려 있다고 진찰했다. 1889년 1월 경친왕은 우종정에 임명되었다. 서태후를 위하여 이화원 공사를 감독하였으며 서구에서 최신식 램프와 발전기를 비롯한 값진 사치품을 들여와 이화원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광서제의 친정이 시작되자 예의상 경친왕에게 태후가 다시 수렴하게 해달라고 청하게 했으나 서태후는 이를 거절했다. 공친왕 혁흔의 뒤를 이어 총리아문의 수장이 되었으며 각국 공사들에게 받은 축하 편지를 낭독하고 공사들의 신임장을 광서제에게 제출했다.

1894년 서태후의 환갑을 맞이하여 경친왕에 봉해졌다. 경친왕의 딸 사격격[2]은 서태후의 젊은 시절을 연상시키는 생기 넘치고 총명한 모습으로 서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 덕분에 경친왕 역시 총애를 받을 수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자 이홍장을 견제하려는 광서제의 의도에 따라 총리아문의 해군장관으로 기용되어 해군을 지휘했지만 박살났다. 광서제의 명에 따라 제대로 된 전황 정보를 올릴 군기대신을 모색했지만 진 싸움이 이겼다고 보고가 올라오는 등 청군은 추태만을 거듭했다. 이때부터 뇌물수수와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싹수 노란 모습을 보였다.

2.2. 권좌에 오르다

1895년 도독 군무처가 설치되자 공친왕 혁흔 밑에서 보좌관 대신을 맡았다. 서태후무술정변을 지지, 위안스카이와 함께 캉유웨이량치차오 축출을 도와서 권력에 접근하게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이홍장이 몰락한 후 황실 파벌을 지휘하며 권력 핵심부로 진입하였다. 이때 만주 황족의 권리를 옹호하며 개혁을 반대했으며 1899년 의화단 운동이 발생하고 8개국 원정대가 출발하려 하자 이를 막으라는 조정의 지시에도 오히려 원정대의 파견에 동조했다가 서태후의 분노를 사서 권력의 핵심은 단군왕 재의로 교체되었다. 이후 의화단이 열강에 우호적인 황족들을 죽이기 위해 자금성에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자 선화로 달아났다. 조정에서 상하이에 있던 이홍장과 선화의 경친왕에게 영국 및 러시아와 협상하라고 지시하자 8월 10일, 베이징으로 돌아왔고 이홍장과 함께 강화대신에 임명되어 10월 15일부터 전권대표로서 연합군과 교섭에 들어갔다. 하지만 청의 세가 압도적 열세였기 때문에 열강이 요구한 부담스런 조건을 대부분 수용하였으며 1901년 9월 7일,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였다. 의화단 운동 이후 직예총독을 지내며 영국의 지지를 받는 호광총독 장지동과 대립했다.

위안스카이 실각 이후 군기대신을 지내며 만주족 내각을 이끌었으며 신축조약 12조에 따라 총리아문을 외무부로 고치고 다른 6부의 상위에 두라는 요구에 따라 이홍장과 함께 외무부 설립에 참여했고 황제와 가까운 제왕, 제후를 수반으로 하고 간부급에 외국어에 능통한 자를 참여시킨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1901년 1월, 서태후가 광서신정을 발표, 4월에 독판정무처라 불리는 제도개혁 조사기관을 설치하였는데 이때 영록, 이홍장과 함께 이를 주도했다. 1903년 위안스카이의 제안으로 연병처가 설치되자 총책임자가 되어 총리연병대신에 임명되었다. 밑에 위안스카이가 연병처회판대신, 철량이 연병처양판대신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돤치루이, 쉬스창, 왕스전, 펑궈장, 육건장, 유영경 등 위안스카이의 직계 심복들을 등용했다. 러일전쟁 후 1905년 12월, 일본과 <동북 삼성 사무에 관련한 중일회의 주조약>의 3개 항과 부속 약관 12개 항에 서명하여 포츠머스 조약 중의 관련 규정을 일괄적으로 승낙하겠다고 하였다.

1906년 입헌이 추진되자 위안스카이와 함께 환관제 폐지 등을 추진했는데 정권에서 황족들이 배제되자 분노한 순친왕 재풍이 위안스카이에게 "황제를 위해 너를 죽이겠다!"라고 소리치며 덤비자 이를 말리기도 했다. 또한 환관들이 위안스카이가 환관제 폐지를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여 위안스카이를 조리돌림하려 하자 그의 요청을 받고 도와주는 등 위안스카이와 돈독한 사이었다. 이후 환관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환관제 폐지를 철회했다.

2.3. 양취희 사건

1906년 11월 6일, 조정에서 중앙관제를 발표하여 내각과 군기처를 두기로 결정하자 군기처에 계속 근무하게 되었고 11월 7일, 관부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07년 4월 9일, 신임 흑룡강성 순무 돤즈구이에게 10만 원의 뇌물을 받았으며 위안스카이를 동삼성 총독으로 추천했으나 여의치않자 쉬스창을 동삼성 총독에 임명하였다. 일개 도원에 불과했던 돤즈구이가 몇단계를 뛰어넘어 단숨에 순무로 임명되자 대쪽대신 천춘쉬안이 경친왕이 무려 10만원의 뇌물을 받은 것을 폭로하며 경친왕과 위안스카이 등 20여명의 고관을 탄핵했다. 이어 5월 7일, 어사 조계림도 경친왕 부자를 탄핵했으며 서태후는 격노하여 돤즈구이를 해임하고 정덕전으로 교체했으며 경친왕을 불러 크게 꾸짖었다.
"이렇게 조정을 기만하느니 차라리 밧줄로 우리 모자의 목을 졸라매지 그러느냐!"

경친왕과 그의 아들 아이신기오로 짜이전은 위안스카이와 함께 황실에 뇌물을 뿌리고 천춘쉬안과 량치차오가 같이 있는 합성사진(!)을 만들어 서태후에게 바침으로 이 사태를 겨우 무마할 수 있었다. 서태후 역시 경친왕을 처벌할 수는 있지만 고위 황족은 그를 함부로 물려봤자 괜히 정권에 더욱 위협이 가해질 수 있다고 여겨 사건을 덮어버렸다. 6월 12일, 천춘쉬안은 베이징을 떠나며 경친왕을 추가로 탄핵했고 서태후는 구홍기에게 경친왕이 탐욕스러워 그를 교체해야겠는데 그를 대신할 인물이 물었으나 구홍기가 이를 아내에게 말하였고 그것이 다시 타임즈 신문 등 외국 언론에 실렸다. 이에 영국 측에서 친영파로 판단된 경친왕의 경질에 대해 반대하여 서태후는 경친왕 경질설에 대해 부인하였고 구홍기는 함부로 입을 놀린 죄로 서태후의 미움을 사게 되었으며 이후 위안스카이에게 무술변법에 동조한 혐의로 탄핵되어 결국 파면당했다.

6월 19일, 경친왕은 짐짓 군기대신에서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비쳤으나 서태후는 이를 반려했다. 하지만 그의 탐오함은 확실히 확인되어 서태후는 이후 경친왕을 예전처럼 신뢰하지 않았다. 이후 천춘쉬안의 파직, 군기처에서 임소년의 축출 등을 주도하였다. 8월 15일, 호북안찰사 양정분이 경친왕을 다시 탄핵했으나 역시 흐지부지되었다. 허나 같이 탄핵된 위안스카이는 직예총독 겸 북양총독에서 쫓겨나 외무부상서 겸 군기대신으로 좌천되었다.

1908년 7월 22일, 서태후가 지방의회의 구성과 선거 규정안을 공표하자 구체적인 일정을 잡는 것을 반대하며 입헌군주제의 실시는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대단히 어려우며 헌법의 구멍을 통해 악한들이 정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태후는 이를 무시하고 지방선거를 강행할 것을 지시했다.

2.4. 선통제 옹립

경친왕과 위안스카이의 연계는 여전히 돈독했고 위안스카이는 좌천되었음에도 그 권세가 대단했다. 위안스카이의 50번째 생일 때 서태후는 환갑이 되어야 내릴 수 있는 친왕의 예에 해당하는 예물을 하사했다. 경친왕과 그의 아들 짜이전도 그를 예방하여 아첨하고 자신을 왕이 아니라 그저 이름으로 소개했으며 짜이전위안스카이를 형으로 모셨다. 이에 어사 강춘림이 광서제에게 위안스카이의 지위가 너무 높다고 탄핵했다.
이쾅(혁광)이 글귀에 자신을 왕이라 칭하지 않고 이름을 적고, 짜이전(재진)이 아우라고 자신을 칭한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것으로 이는 위안스카이를 황제의 친척으로 대한 것입니다. 위안스카이는 도찰원을 간섭하여 민중의 청원서를 상소하지 못하게 하여 간언을 통제하였습니다. 또한 쑤저우와 항저우 사이의 철도 부설 문제를 두고 영국의 위세를 빌려 절강성과 강소성의 유지들과 상인들을 탄압했으며 러일전쟁 때 아무런 공도 없는 300명을 공로자로 추천하여 상금을 지급케 했습니다. 그의 아들 위안커딩은 후보로 농상부에 들어가 참의를 맡고 곧 좌우승상 대리가 되었는데 이는 아비의 세력을 빌어 하루 아침에 대관이 된 것입니다. 위안스카이의 친척 10여명이 아편을 피웠지만 관리들은 위안스카이가 두려워 이들을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광서제는 이를 공론화하지조차 못했다. 11월 3일, 경친왕과 위안스카이가 광서제가 이질에 걸려 와병한 사이에 그를 없애고 아이신기오로 짜이전을 황제로 추대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으나 서태후는 이를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몰라 11월 7일, 경친왕에게 동릉에서 자신의 묫자리를 돌아보게 했다. 11월 13일, 광서제가 위독해지자 서태후는 순친왕 짜이펑(재풍)감국섭정왕(監國攝政王)에 봉하고 아이신기오로 푸이를 황궁으로 데려왔다. 11월 14일 광서제가 사망했으며 서태후는 즉각 경친왕, 세속, 장지동, 녹전림, 위안스카이를 불러 푸이를 다음 황제로 선포하고 광서제의 뒤를 잇게 했다. 그리고 섭정왕 재풍이 섭정하게 하고 행정과 군사의 모든 일을 그에게 보고하여 결재를 받도록 했다. 11월 15일에는 서태후도 세상을 떠났다.

12월 2일, 선통제가 즉위하자 12월 19일, 경친왕은 세습친왕에 봉해졌다. 위안스카이를 싫어하던 섭정왕 재풍은 경친왕, 세속, 장지동을 불러 그를 파면하고 죄를 물으려 했다. 세속은 위안스카이가 발병을 앓고 있으니 치료를 받게 하는 온건한 방법을 주장했고 경친왕은 위안스카이를 죽이는 것은 쉽지만 북양군이 반란을 일으키면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장지동도 위안스카이가 죽이긴 아까운 인물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위안스카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로 결정되었다. 1909년 1월 2일, 섭정왕 재풍은 위안스카이를 불러 발병을 치료하라는 이유로 고향으로 내쫓아 버렸다. 허나 1911년 4월, 경친왕은 10여명과 연명하여 위안스카이를 동삼성 총독에 임명하여 일본과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고 5월에 협리대신 나동이 사직하고 후임자로 위안스카이를 추천하였으나 섭정왕 재풍은 그를 들이지 않았다. 이때 경친왕은 동삼성의 대표들을 조종하여 이들이 위안스카이의 총독 임명을 주장하며 고향에 돌아가게 만들었다.

2.5. 신해혁명

1911년 5월 8일, 입헌정치 실시에 따라 청나라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며 내각 대부분이 만주족 황족으로 이루어져서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분노를 샀다. 당시 13명의 대신 중 만주인이 9명이었으며 한인은 협리대신 쉬스창, 외무대신, 학무대신 등 4인에 불과했다. 9명의 만주인 중에서도 7명이 황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 때문에 '친귀내각'이라 불리며 질타를 당했다. 청나라의 첫 <책임내각>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청사고] 권25, 선통황제본기, 선통 3년 4월 무인, “조를 내려 바꾸어 책임 내각을 세웠다. 내각관제를 반포했다.(詔改立責任內閣。頒內閣官制。)”)

-내각총리대신 혁광(奕劻)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愛新覺羅)씨, 경친왕)
-협리대신(부총리급) 나동(那桐) (만주족, 예허나라(葉赫那拉)씨)
-협리대신(부총리급) 서세창(徐世昌) (한족)
-외무대신 양돈언(梁敦彥) (한족)
-민정대신 선기(善耆)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씨, 숙친왕, 청태종 홍타이지의 장남 호격의 후손으로, 세습친왕인 철모자왕 중 하나, 10대 숙친왕)
-탁지대신 재택(載澤)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씨, 진국공, 강희제의 15남 유각군왕 윤우의 후손)
-학무대신 당경숭(唐景崇) (한족)
-육군대신 음창(蔭昌) (만주족, 우야(烏雅)씨)
-해군대신 재순(載洵)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씨,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6남))
-사법대신 소창(紹昌)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씨, 누르하치의 조부 기오창가(각창안, 覺昌安)의 장남 추존 무공군왕 리둔(예돈, 禮敦, 즉 누르하치의 큰아버지)의 11세손)
-농상공대신 부륜(溥倫)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씨, 도광제의 증손자[3])
-우전대신 성선회(盛宣懷) (한족)
-이번대신 수기(壽耆) (만주족, 황족, 아이신기오로씨, 순치제의 8세손)[4]

여기에 5월 9일, 철도의 중앙집권화를 발표하는 철도국유령이 선포되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다. 1911년 6월 10일과 7월 5일, 각성참의국연합회 대표들은 황족내각 해산과 새로운 내각 구성을 요구하는 항의문을 선통제에게 제출하였다. 이들은 내각제는 황제가 아닌 내각이 정치에 책임을 지도록 한 것이나 황제가 총리 대신이나 각원에 임명되는 것은 황제에까지 책임이 미쳐 입헌 내각제의 본뜻이 위배되고 군주의 신성불가침도 침범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즉 황족 내각은 타도 불가능의 신성불가침적 존재가 되며 국민은 조정이 입헌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의심할 것이고 이는 불과 작년에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진 포르투갈과 같이 될 것이라는 섬뜩한 경고였다. 하지만 조정은 7월 5일, 내각 구성은 군주의 고유권한이니 지방 의회의원은 간섭하지 말라고 답할 뿐 이었다. 여론이 나쁜 것을 느낀 혁광은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조정은 이를 반려했다.

결국 1911년 10월 10일, 무창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이 발생하였고 전국 각지로 봉기가 번졌다. 경친왕은 이를 신속히 진압하지 않으면 봉기가 강남 전체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섣불리 위안스카이 복직을 주장했다간 욕을 먹을까봐 나동, 쉬스창과 달리 위안스카이 등용을 주장하진 않았다. 결국 무창이 함락되고 여기에 각국 영사들이 중립을 지키며 청조 지지를 거부하자 조정은 혁광과 관계가 좋으며 돤치루이, 펑궈장을 비롯한 군부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위안스카이만이 난국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여겨 혁광은 자신은 늙어 이 사태를 대처할 수 없으니 혁명군 소탕을 위해서 위안스카이 등용이 필요하다고 청했다. 베이징의 각 공사들도 위안스카이 복직을 청했다. 이에 섭정왕은 경친왕에게 위안스카이에게 황권을 보장한다는 서약을 받게 했다.

10월 14일, 경친왕은 위안스카이를 호광총독에 임명했으나 위안스카이는 발병을 이유로 거절했다. 위안스카이는 고작 호광총독 따위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10월 27일, 혁광은 위안스카이황제 친임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막강한 권한을 주었고 그제야 위안스카이는 관직에 올라 전선에 나섰다. 10월 31일, 위안스카이는 전권대신에 취임했고 즉각 군대를 이끌고 한커우를 점령해버렸다. 11월 1일 혁광내각은 위안스카이만이 혁명을 진압할 수 있다는 이유로 총사퇴, 위안스카이가 새 총리로 임명되었다. 다음날 위안스카이가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혁광의 내각은 붕괴되었다. 경친왕은 11월 1일, 필덕원 원장에 임명되었다.

한편 중화민국의 대총통에 오르고 싶었던 위안스카이가 루이 16세와 같이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기 싫으면 퇴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선통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혁광은 위안스카이에게 대항할 방법은 없다며 선통제의 퇴위를 주장했다.

2.6. 말년

중화민국 건국 후 톈진의 영국 조계지에 은거하였다가 다시 베이징의 경왕부로 돌아왔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선포하자 리위안훙, 재풍, 나동, 세속, 주복과 함께 위안스카이의 동료로 지목되어 위안스카이에게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1917년 경왕부에서 사망하였으며 청나라 소조정선통제에게 경밀친왕(慶密親王)으로 추봉되었다.[5] 이후 대총통 리위안훙아이신기오로 짜이전의 경친왕 작위 세습을 허용하였다.

3. 여담

재산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홍콩상하이은행에 예치된 금액만 해도 700만 파운드가 넘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사망한 영국의 다이아몬드재벌 세실 로즈의 유산이 600만 파운드였고 HMS드레드노트의 건조비가 200만 파운드이던 시절이다. 가히 니오후루 허션과 함께 만주족을 대표하는 망국의 돈벌레로, 당대에나 현대에나 내치면 내치, 외치면 외치, 군사면 군사마다 손대는 족족 말아먹는 마이너스의 손(...)이나 100년 전 화신보다 더한 만청제일탐관(...)이라는 투로 갖가지 악평이 자자했다.

4. 주요 경력

청나라 역대 내각총리대신
파일:청나라 국기.svg
헌정 실시 1대 2대
경친왕 애신각라 혁광
(1911년 5월 8일 ~ 1911년 11월 1일)
위안스카이

5. 참고 문헌


[1] 1764-1820. 가경제의 친동생이다. 작위는 1799년에 혜군왕이었으나 이후 경군왕으로 바뀌고 1820년 친왕으로 올라간다. 이때는 경친왕작이 세습망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후손들은 군왕 작을 받지만 손자인 혁광 때 세습망체 철모자왕이 된다. 가경제와 11황자인 성철친왕 영성(1752-1823)과 함께 니오후루 허션을 숙청하는데 일부 기여하여 그 보상으로 허션의 저택을 받는데 이후 그 후손이 작위를 추탈당하고 집이 몰수된 후 혁광의 6촌 형인 공친왕 혁흔위 집(공왕부)가 된다. 행실이 포악하고 백성의 재물을 뺏어 가경제도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실제로 가경이 친하게 지낸 것은 동복동생 영린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성친왕 영성이었다. 그러한 영향때문인지 실제로 도광제는 자신의 장자인 은군왕 혁위(1808-1831)이 후손 없이 죽은 후 영성의 증손자를 양자로 들였다고 한다.[2] 광서 7년(1881년) 생으로 측복진 합가씨 소생. 광서 25년(1899년) 삼등승은공 희탑랍 희준에게 출가[3] 엄밀히 말하면 도광제의 양손자다. 도광제는 자신의 큰아들 은군왕 혁위에게 별 관심이 없었으나 혁위가 23세의 나이에 후사 없이 죽은 후 양자를 들여 대를 잇게 했다. 참고로 그 양자는 건륭제의 황11자인 성철친왕 영성(1752~1823)의 4남인 면의의 손자 재치이다. 참고로 면의는 원래 영성의 아들이었지만 건륭제의 황3자인 순군왕 영장(1735~1760)이 후사 없이 죽어서 영장의 사후양자가 된다. 재치의 아들이 부륜으로 부륜은 동치제 사후 동치제의 추정상속인으로 거론되었으나 실제로 너무 먼 혈통(9촌-3종질)이었기 때문에 위의 재풍의 형이자 혁현의 아들인 재첨이 광서제로 즉위한다. 자세한 것은 광서제참고.[4] 엄밀히 말하면 강희제의 이복동생인 공친왕 상녕의 7세손이다.[5] 밀(密)이라는 이 시호는 대략 "순박하나 과오를 저질렀다"는 뜻인데, 역대 청나라 친왕이 받은 시호 중 가장 나쁜 시호이다. 원래 추(醜)나 려(厲) 같은 돌직구급 최악 중의 최악시로 주려다 그나마 덜 나쁜 것으로 골라준게 이 정도였다. 같은 시대에 열심히 일하며 나라를 근본적으로 구하는데엔 실패했을지언정 망국을 늦추는데엔 기여했던 공충친왕 혁흔, 순현친왕 혁현 같은 친척 형제들에겐 비할 바가 못 되는 악시이다. 청나라의 역사를 돌이켜봐도 혁흔, 혁현이 받은 시호는 각각 개국영웅인 도르곤, 옹정제가 신임한 워커홀릭 군기대신인 윤상이 받은 최고 중의 최고급 시호인데 혁광이 받은 시호는 망나니 폐태자 윤잉과 같다. 혁현의 경우는 스스로 정치를 이끌었다기보다는 서태후가 혁현으로부터 뺏어간 볼모나 다름없던 광서제가 일부러 좋은 시호를 준 것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