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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9년 핸드볼 영광의 큰잔치를 기점으로 시작해 한국 핸드볼의 최강자를 가렸던 대회. 2009년 핸드볼 코리아리그 출범 이후 권위가 다소 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 핸드볼 주요 대회 중 하나.2. 역사
2.1. 핸드볼 큰잔치
1988 서울 올림픽에서 한국 핸드볼은 여자팀이 금메달, 남자팀이 은메달을 차지하면서 한국 구기 종목 중에서 최고의 성적을 낸 종목으로 등극했다. 이에 따라 핸드볼을 기존 겨울 스포츠의 강자였던 농구와 배구에 필적하는 인기 스포츠로 만들기 위한 일환으로 핸드볼 큰잔치를 기획했다. 방식은 그 당시 인기가 있던 농구대잔치와 비슷한 지방 순회 투어 형식이었다.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핸드볼은 올림픽 때만 반짝 관심을 얻는 종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이미 굴지의 대기업들이 농구나 배구단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규 창단을 하지 않아서 자본의 투자를 통한 인기 스포츠로의 도약은 어려웠다. 또한 이미 시장을 선점한 농구나 배구의 아성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TV 중계의 경우 출범 당시 시점에서는 채널의 수가 대단히 부족한[1] 실정이었다.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땄지만 이들이 대중적인 스타로 발돋움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1997년 외환 위기 이후에는 있던 기업 구단도 해체의 소용돌이에 빠져 들었다. 경영이 어려워지면 해체하는 구단 1순위가 바로 핸드볼단이었다. 결국 핸드볼큰잔치는 겨울 스포츠 시즌에서 농구와 배구에게 밀리는 신세였고 이는 '한데볼'이라는 좋지 않은 별명을 얻는 원인이 되었다.
2.2. 우생순 이후
2004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결승전은 한국시간으로 오후 4시에 중계되어 약 3시간 동안 덴마크와 처절한 접전을 주고 받는 명승부였다. 해당 명승부는 영화로 제작해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으로 개봉했는데 이 때 얻은 국민적인 관심을 계기로 핸드볼은 그나마 간신히 숨통이 뜨였다.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인기 스포츠로 도약한 것은 아니었고 본격적인 변화는 2008 베이징 올림픽 여자 핸드볼 3·4위전, 일명 언니들의 졸업식 이후, 마침내 대기업 SK의 후원과 20년 숙원인 전용 경기장을 가지면서 핸드볼 큰잔치는 도약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2.3. 코리아컵 개칭, 그리고 중단
2011년 대한핸드볼협회는 핸드볼큰잔치의 이름을 핸드볼 코리아컵으로 개칭했다. 이유는 여론 조사 결과 다소 촌스럽다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개칭 후 세 번째 대회인 2013년 대회는 무산되었는데, 이유는 참가 구단 부족. 개최 시기가 2월로 바뀌면서 3월에 시작하는 핸드볼 코리아리그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는 각 구단이 리그 준비를 이유로 참가에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코리아컵이 계속 진행될 지는 불투명해졌다.2.4. 직지컵으로 부활?
2018년 청주에서 코리아컵과 비슷하게 실업-대학팀이 겨루는 직지컵이 청주 올림픽기념생활관[2]에서 열렸다. # 2018년부터 핸드볼 코리아리그가 동계리그로 열리면서, 비시즌 시기의 흥행과 선수 기량 파악을 목적으로 계속 개최할 것으로 예상된다.그러나 한 번의 개최 이후 또다시 중단이 되고 말았다. 결국 2019년도부터 2020년도까지는 실업-대학 간 대회가 없고 생활 핸드볼단과 대학 구단 간의 경기라는, 비슷해보이지만 다른 케이스로 치러지는 협회장배 전국생활체육대회만 남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