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73년 1월 25일에 발생한 선박 침몰 사고로 19명이 사망했고, 42명이 실종되었다.사고 당일 목포에 있던 한성호는 아직 폭풍주의보가 해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전9시에 정원 86명을 초과한 136명의 승객을 태우고 진도로 출발했다. 중간의 다른 섬을 거쳐 조도로 향하던 중 거센 파도로 바닷물이 뱃속으로 들어와 엔진의 시동을 끄고 만다. 이러한 상황에서 거센 파도가 지속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14시 30분경 침몰하였다. 사고 당시 탑승객은 109명이었으며, 그 중 48명이 구조되었고, 사망자는 19명, 실종자는 42명으로 집계되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관매초등학교[1] 학생들을 비롯한 조도면 주민들이었다.
2. 세월호 참사와의 비슷한 점
이 사건은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와 비슷한 점이 많다.- 한성호의 침몰 지역과 세월호의 침몰 지역이 불과 18km 떨어져 있다.
- 과적이 일상화되었다. 사고난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 승객 수를 거짓으로 기재했다. 처음에는 66명이라고 알려졌다, 세월호도 처음엔 386명 구조였다가 나중에 164명, 그리고 172명으로 여러번 수정되었다.
-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다. (한성호는 초등학생, 세월호는 고등학생)
- 선장이 승객들을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 정확히는 학생들이 배에 있는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해 선실 문을 밖에서 잠갔다. 이러한 이유로 두 사고 모두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배안에서 구조를 기다린 사람들이었으며, 생존자들은 대부분 스스로 탈출한 경우였다.
- 사고 당일 운행한 사람이 본래의 선장이 아닌 사람이었다. 자격, 면허증이 없는 갑판원이 운행했다.
- 안 좋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운항했다. 한성호가 출항할 때에는 각서까지 쓰고 갔다. 세월호 생존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세월호는 출발할 때 안개가 자욱했다고 한다.
- 사고 당시 정부의 대응이 소극적이었다.
- 대통령의 행적이 불분명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행적은 불명확하고 박근혜도 역시 불명확했다. 공교롭게도 둘은 부녀 사이이다.
안전의 중요성을 망각하면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3. 음모론
세월호 참사와의 유사점과 지리적 인접성 때문에 언론에서 한성호 침몰 사고로 가족을 잃었거나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에게 인터뷰를 했고, 이를 통해 참사는 되풀이될 수 있다고 강조한 적이 있다. # 그러나 음모론자들은 이를 확대해석해 한성호가 박정희 대통령의 부정선거를 사회적 이슈로 덮으려는 시도로 규정하고, 이를 기획한 인물로 당시에 박정희의 총애를 받었고, 세월호 사고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김기춘을 지목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이슈를 덮으려는 시도라고 하기엔 언론의 보도가 거의 없었다. 네이버 아카이브에서 1973년 전체를 검색해도 한성호 기사는 3개 언론사에서 총 20건밖에 나오지 않는다. 매일경제가 8건, 당시 반박정희 보도가 가장 많았던 동아일보가 7건이고, 친정부 신문인 경향신문이 5건으로 가장 적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인터넷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의 집에 TV도 없었으므로, 신문이나 라디오가 소식을 접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1] 당시 국민학교, 2012년 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