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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22 11:20:20

필립왕 전쟁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

1. 개요

King Philip's War

백인들에게는 필립 왕이라고 알려진 메타코메트(Metacomet) 추장의 지휘 아래에 왐파노아그(Wampanoags) 부족들이 영국인들에게 대항하면서 일어난 인디언 전쟁.

2. 배경

왐파노아그 부족은 백인들에게 절대로 적대적인 부족이 아니었다. 메이플라워호로 이주한 필그림들의 생존과 정착에 결정적 도움을 준 부족이 바로 왐파노아그 부족이었다. 단적으로 추수감사절의 기원을 그린 그림에 나오는 인디언들이 바로 왐파노아그 부족이고 이들 간에는 상호불가침 협정이 맺어졌다.

문제는 영국인 식민지가 너무 빨리 확장되면서 시작됐다. 왐파노아그 부족의 도움으로 정착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주민들은 정착지를 확장해 나갔고 이는 기존 왐파노아그 부족의 영역을 파고들어가는 결과로 나타났다. 정착민들은 왐파노아그 부족에게서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고 왐파노아그 부족의 중심지 근처에 스완지 타운이 건설될 때는 주둔한 영국군의 무력을 동원한 협박까지 있었다. 정착민들은 왐파노아그 부족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1] 후기 정착민들 정도 되면 왐파노와그 부족에 대한 평가는 기독교도 모르는 사탄의 종자가 되었다.

결국 정착민들은 정착지를 늘리기 위해서 인근 부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1634년에는 네덜란드 정착민이 공격당한 것을 빌미로 와핑거족 80여명이 변명도 못 해 보고 자는 도중에 학살당했다. 1636년에는 피쿼트 전쟁이 벌어졌는데 피쿼트 부족은 왐파노아그 부족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정착민과 초기에는 친밀한 관계였으나 정착민들의 확장에 점점 밀려나가면서 대립이 시작되었고 정착민 살해를 빌미로 전투가 벌어졌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던 메타코메트의 형이자 바로 전 족장인 왐수타는 양측을 오가다가 의문사했다. 메타코메트는 암수트가 독살당했다고 믿었다.[2] 반면 기독교로 전향하면서 메타코메트와 사이가 틀어진 존 사사몬이라는 이가 살해당하자 플리머스 의회는 이 범행이 메타코메트의 심복이 한 짓이라고 선언하고 해당인물에게 사형을 언도했다.[3] 메타코메트의 입장에서는 이건 피쿼트 전쟁 이전의 재판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피쿼트 전쟁 이전에도 백인 정착민이 자신들간의 대립으로 죽은 것을 피쿼트 족의 짓이라고 몰아가는 재판이 있었고 이를 빌미로 피쿼트 족을 야간에 기습공격해서 전멸시켰기 때문이다. 메타코메트가 피쿼트 전쟁의 전개과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결국 메타코메트는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3. 전개

메타코메트가 스완지 타운 정착지를 공격하고 정착민들은 민병대를 소집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1675년에 시작되었는데 시작은 메타코메트 쪽이 더 유리하였다. 정착민들을 예비 적으로 생각했던 인근 부족들이 왐파노아그의 편을 들어서 연맹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연맹에 직접 가담하지 않더라도 정착미들의 군대에 대한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반면 소집된 민병대를 포함한 정착민들의 군대는 왐파노아그 부족의 주둔지로 진군했으나 메타코메트는 게릴라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전쟁을 해 보지도 못하면서 피해만 입었다.

그러나 1676년부터 아베나키 부족을 시작으로 모호크 부족과 모히칸 부족의 도움을 얻기 시작하면서 백인들이 더 우세해졌다. 이들은 포로가 된 원주민들이 전향하면 같은 군대로 싸우는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병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결국 포카셋족이 매복하고 있다가 메타코메트를 습격해 총으로 쏘아 죽였다. 이로 인해 부족간 동맹은 와해되고 백인들은 원주민들을 평정했다.

이 전투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요새 구축 등의 전통적인 군사 기술로 백인들에게 저항했다. 왐파노아그와 동맹을 맺었던 내러갠시트 부족이 로드 아일랜드의 Great Swamp에 만든 거대 요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요새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요새는 나중에 영국인들에 의해 불탔다.

이후 이 부족은 영국인들과 같이 일하면서 벽돌 만드는 기술을 배운 한 부족민의 도움으로 커다란 돌 요새를 만들었는데 이 요새는 1676년에 영국인들이 대다수의 부족민을 죽이고 부숴 버렸다고 한다. 수와 화력은 백인들이 위였음이 증명된 셈이다.

4. 결과

이 전쟁을 통해서 식민지인 600여명이 사망하였고 원주민 연맹은 6000여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결국 플리머스 정착 인근 원주민들은 정착민들에게 협력한 모히칸과 모호크 족 등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전멸했다. 기타 부족은 대부분 사망했으며 죽지 않은 이들은 인근 버뮤다노예로 팔려나갔다. 현대 버뮤다에는 이 시기를 계기로 팔려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후예가 상당수 거주하고 있다.

이 전투에서 양측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원인은 수발총의 도입에 있다. 백인 정착민들은 초기에 무거운 데다 사용하기 귀찮고 한 곳에 고정시켜 놓고 성냥으로 발화해야 하는 구식 화승총을 많이 사용했다. 이로 인해 초기에 백인들은 과 화살을 쓰는 원주민들에게 많이 압도당했다.

이를 대신해서 나온 것이 수발총이었다. 그러나 백인들이 이것을 쓰게 된 시기가 더뎠던 반면에 원주민들은 이 총의 장점을 알아차리고 대량으로 구입해 자신들이 스스로 이 총의 사용법이나 고치는 방법까지 터득했다[4]

이 잔혹한 전쟁에도 왐파노아그족은 절멸하지 않고 2010년 기준으로 약 2756명의 후손이 남아 있으며 추수감사절 무렵 '국가 애도의 날(National day of mourning)'이라는 시위를 열어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이 직면했던 역사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에 대한 인식을 가르치고 있다.



[1] 영어가 가능했던 티스콴툼(스콴토)만 예외로 신의 사자로 불렀다. 자신들이 정착하는 것을 신이 도와주기 위해서 보낸 사자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2] 현대에는 질병에 걸려서 죽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티스콴툼 시절 왐파노아그도 북미 해안을 오가던 스페인 탐험가들이 퍼뜨린 전염병으로 대다수가 사망했다. 필그림들이 처음 정착한 곳도 전염병으로 떠난 구 왐파노아그 마을이었다.[3] 배심원들은 두 부류였는데 하나는 백인 정착민들, 다른 하나는 존 사사몬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로 전향한 원주민들이었다. 참고로 이 사건의 진범이 메타코메트의 심복이 맞는가에 대해서는 현대까지도 불분명하다.[4] 당시에는 무기 사용 및 수리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금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