邲戰鬪
1. 개요
춘추시대인 기원전 597년 북방의 맹주였던 진(晉)나라와 남방의 강국 초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맞붙은 두 번째 전투이다. 초나라의 군주였던 장왕 웅려는 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중원에 그 이름을 널리 떨쳤다.필은 현재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 부근의 싱양시이다.
2. 배경
기원전 632년, 진문공 희중이는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 장수 성득신의 군대를 격파하고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이후 진(晉)나라의 군주는 대대로 패자의 직위를 이어가며 중국의 여러 제후국을 호령했다. 반면 초나라는 성복 전투 패전 후 상승세가 꺾였고, 초성왕이 폐태자 웅상신의 반란으로 자결을 강요당해 죽는 등 지도부의 혼란이 심했다.하지만 초나라는 중원 진출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웅상신은 부왕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초목왕으로 즉위한 뒤, 주변의 여러 국가를 멸망시켜 초나라의 영역을 크게 확장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초장왕은 초기 3년동안 매일 사냥과 주연을 벌이며 국정에서 손을 놓다가, 대부 소종(蘇從)의 목숨을 건 간언을 받아들여 그때까지 자신에게 아첨하던 간신들을 모조리 숙청하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이후 촌 사람이었던 손숙오를 영윤으로 삼고, 토지 개간 및 화폐 개혁을 실시해 국력을 크게 길렀다.
초나라가 이렇듯 나날이 성장하고 있을 무렵, 진나라는 진문공 사후 점차 쇠락해지고 있었다. 진문공의 아들 진양공까지는 패권을 이어갔으나, 진양공의 아들 진영공이 간신배들을 중용하고 국정을 그릇되게 하다가 권신 조돈의 조카인 조천에게 피살되었다. 이후 진나라 후작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유력 씨족들이 권력다툼을 벌였다. 특히 호씨, 선씨, 극씨, 조씨, 난씨, 순씨, 서씨, 범씨, 위씨, 한씨, 양설씨 등은 제각기 막대한 영지와 사병을 거느리며 분란을 일으켰다.
이렇듯 상반된 분위기였던 두 나라는 한 국가를 놓고 세력 다툼을 벌였으니, 그 나라는 바로 정나라였다. 정나라는 초나라가 쳐들어오면 초나라에게 복속하고, 진나라가 쳐들어오면 진나라에게 복속하는 식으로 왔다갔다하는 약소국이었다. 정나라는 초나라가 중원으로 진출하는 교두보에 위치했기 때문에, 이 나라를 속국으로 삼는 건 초나라로선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기원전 604년, 초장왕이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진나라는 순림보를 파견해 정나라를 구원했다. 기원전 600년 초나라가 다시 정나라를 치자, 이번에는 극결이 출진해 초나라군을 막아냈다. 이에 정양공은 기원전 598년 진나라의 언릉 땅에서 회맹하여 진나라의 속국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초장왕은 포기하지 않고 기원전 597년 대군을 일으켜 정나라를 공격했다.
이에 정양공은 동맹을 맺고 있었던 진(晉)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당시 진나라는 진성공이 죽고 진경공이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상경인 극결도 사망해서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진경공은 극결을 대신해 순림보를 중군 원수로 삼고, 선곡에게 보좌를 맡겼다. 상군 원수는 사회가 맡았고, 유병을 보좌로 삼았다. 하군 원수는 조삭이 맡았고, 난서가 하군 보좌를 맡았다. 이렇게 구성된 상, 중, 하 3군은 정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다.
하지만 초나라군은 진나라군이 채 도착하기 전에 정양공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정양공은 웃옷을 벗은 채 성문을 열고 나와서 초군을 영접했다. 그리고 초장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동생인 공자 거질을 인질로 바쳤다. 초나라 군신들은 정나라를 병합하자고 제안했지만, 초장왕은 이를 거절하고 다시 정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얼마 후 진나라군이 황하를 건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초장왕이 모든 장수들에게 물었다.
"진군이 이곳으로 오는 중이다. 우리는 돌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싸워야 하는가?"
영윤 손숙오는 정나라를 굴복시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철수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초장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오삼은 정나라를 영구히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진나라마저 쳐야 하며, 진나라 장수들은 새로 임명되어 단결력이 약하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주장했다. 손숙오는 일개 장수인 오삼이 자기 의견을 반대하자 화가 나서 한 마디 내뱉었다.
"만약 싸웠는데 이기지 못한다면, 네 고기를 먹어도 좋은가?"
오삼이 답했다.
"싸워서 이기면 영윤께서는 계략이 못한 것이고, 패한다면 진군에게 제 살을 빼앗길 텐데 어떻게 먹으실 수 있겠습니까?"
초장왕은 두 신하의 언쟁을 중지시킨 뒤 모든 장수에게 분부했다.
"모든 장수는 각기 자기의 의견을 손바닥에 써라. 싸워야 한다는 자는 '전(戰)' 자를 쓰고, 물러가야 한다는 자는 '퇴(退)' 자를 써라."
'퇴' 자를 쓴 이는 중군 원수 우구와 연윤 양로, 비장인 채구, 거래 등 4명이었고, 그 외 장수들의 손바닥엔 '전' 자가 쓰여 있었다. 이에 초장왕은 고민한 끝에 영윤 손숙오의 건의를 받아들여 철수하기로 했다. 그날 밤 오삼이 막사로 찾아와 간곡히 설득했다.
"진나라의 정치를 잡고 있는 자는 경험이 적고 군신은 화합하지 못합니다. 싸운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또 적장은 일국의 재상이며 우리 군의 총수는 일국의 군주인데, 여기서 물러난다면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초장왕은 오삼의 설득에 마음을 바꾸고 진나라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황하에 도착한 진나라군은 정나라가 이미 초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순림보는 일이 틀어졌으니 돌아가려 했고 사회도 동의했다. 그러나 선곡이 공세를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순림보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제멋대로 자기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이에 진나라 원수부는 선곡이 패전하면 모두가 책임을 질 것이라 보고, 할 수 없이 전군을 이끌고 황하를 건넜다.
이리하여 결전은 임박했지만, 양측은 감히 함부로 맞붙지 않고 사절을 여러 차례 보내 화친을 논의했다. 그러나 선곡이 계속 반대해서 화친이 이뤄지지 않았다. 게다가 정양공이 진군과 초군의 싸움 결과에 따라 어느 쪽을 섬길지를 결정하려는 계산으로 진나라 군영에 대부 황술을 보내 초나라와의 싸움을 부추겼다.
"정나라가 초나라에 굴복한 것은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이지, 진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초나라군은 연전연승으로 교만해졌고, 수개월간 원정을 떠나느라 피로하며 장비도 갖추지 못했으니, 어서 공격하십시오."
하지만 순림보는 여전히 망설이다가 위기와 조전을 보내 초장왕과 화친을 다시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강경파인 두 사람은 내심 화친을 싫어했고, 초군 진영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돌연 공세를 감행했다. 이리하여 정나라의 지배권을 둘러싼 필 전투의 서막이 올랐다.
3. 전투 경과
대초 강경파였던 위기와 조전은 화친의 사자로서 별동대를 이끌고 초나라 군영으로 접근하다가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태도를 바꾸고 공격했다. 하지만 초나라군의 수비가 견고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퇴각했다. 이에 초장왕은 본영의 군대를 이끌고 이를 추격했고, 그 행렬은 진나라군 한 가운데까지 이르렀다. 이걸 본 영윤 손숙오는 초장왕이 고립될 걸 우려해 전군에 출격 명령을 내렸다.당시 진나라군은 위기와 조전이 초왕과 화친 논의를 한창 진행할 줄 예상하고 방비를 소홀히 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초나라군이 쳐들어오자 당황했다. 순림보는 전군에 강을 건너 퇴각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중군과 하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패잔병들은 황하 쪽으로 달아났으나, 배는 적고 추격해오는 초나라군이 가까이 오고 있어서 상황이 위급했다. 이에 순림보가 급히 북을 치며 명령했다.
"먼저 황하를 건너는 자에겐 상을 주겠다."
그러자 진나라군 병사들은 먼저 배를 타려고 서로 밟고 죽이며 아우성을 쳤다. 배들은 순식간에 꽉 찼고, 뒤에 온 자들은 올라타려고 뱃전을 까맣게 붙들었다. 그 바람에 여러 배가 가라앉았고, 배에 탔던 이들은 물 아래로 떨어져 익사했다. 이에 선곡이 배 위에서 명령했다.
"매달리는 놈들의 손을 쳐라!"
이에 병사들이 배를 붙잡은 아군 병사들의 손을 사정없이 마구 쳤다. 이걸 본 다른 배에서도 똑같은 짓을 했다.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고 무수한 손가락과 팔이 배 안에까지 굴러 떨어졌다. 강을 건너지 못한 진나라 패잔병들은 초나라군을 상대로 한동안 항전하다가 끝내 항복했다. 이 과정에서 초나라의 노장인 연윤 양로가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한편, 사회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하고 매복병을 숨겨뒀다가 초나라 병사들의 추격을 막았고, 덕분에 그가 이끄는 진나라 상군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고 황하를 건널 수 있었다.
진나라군이 황하를 건너자, 오삼이 초장왕에게 속히 추격하여 모조리 무찌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초장왕은
"성복의 패전을 충분히 복수했으니, 이제 진문공이 한 것처럼 강화를 해야 한다."
고 답했다. 이리하여 필 전투는 초나라군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4. 결과
필 전투 이후, 정양공은 친히 필성으로 가서 초장왕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형옹 땅에서 초나라의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리하여 정나라의 지배권을 확고히 장악한 초장왕은 본국으로 돌아온 뒤 장수와 군사들에게 논공행상을 베풀었다. 이때 대진 강경파였던 오삼은 1등 공신이 되어 대부로 승진했다. 하지만 퇴각을 주장했던 영윤 손숙오는 보잘 것 없다고 괄시하던 오삼이 1등 공신이 되자 크게 부끄러워하다가 얼마 안가서 숨을 거두었다.한편, 진나라로 쓸쓸히 귀환한 총사령관 순림보는 주군인 진경공에게 사형에 처해달라고 청했고, 분노한 진경공은 이를 따르려고 했다. 이때 사악탁이 초성왕이 성득신을 참수했을 때 진문공이 크게 기뻐한 일을 거론하며, 순림보를 용서하여 공을 세울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진경공은 이를 따르기로 하여 순림보를 용서하고, 대신 제멋대로 행동하여 전군을 패망으로 몰고 간 선곡과 그 일족들을 참수했다.[1]
필 전투 이후, 초장왕은 계속 승승장구했다. 기원전 595년 9월, 초나라군은 송나라를 공격하여 도읍인 송성을 포위했다. 송나라는 구원을 호소했으나 진나라군은 구원병을 보내주지 못했고, 송나라는 양식이 떨어지는 바람에 백성들이 서로 자식을 바꿔 뜯어먹는 지경에 이르자 이듬해 3월에 투항했다. 송나라가 투항하자 노나라도 두려워하여 초장왕에게 복종 의사를 밝혔다. 이로서 초장왕은 중원의 패권을 확립했고, 진나라는 언릉 전투 이전까지 초나라를 이기지 못했다.
[1] 순림보는 3년 뒤 노나라군을 크게 물리쳤고, 진경공은 순림보에게 큰 상을 내리는 한편, 사악탁에게도 순림보를 함부로 해치지 않게 한 공로를 인정하여 큰 상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