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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하이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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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마르틴 하이데거
Martin Heidegger
파일:martin-heidegger-2.jpg
출생 1889년 9월 26일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메스키르히
사망 1976년 5월 26일 (향년 86세)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튀빙겐현 지크마링겐군 메스키르히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직업 철학자, 작가
서명 파일:Heidegger_signature.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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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모교 성 콘라트 김나지움[1] (1903~06)
베어톨트 김나지움[2] (1906~09)
프라이부르크 대학교[3] (1909~13)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1914년 철학박사)[4]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1916년 하빌리타치온 합격)[5]
경력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조교[6] 및 사강사 (1918~1923)
마르부르크 대학교 원외 교수 (1923~27)
마르부르크 대학교 정교수 (1927)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교수 (1928~33)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총장 (1933~34)
배우자 엘프리데 페트리[7] (1917년 결혼)
파트너 엘리자베스 블로흐만[8] (1918년 ~ 1969년)
한나 아렌트 (1924년 ~ 1928년)
대표작 존재와 시간 (1927)
숲길 (1950)
학파 현상학, 해석학
정당
(1933 ~ 1945)
종교 가톨릭무종교[9] }}}}}}}}}

1. 개요2. 생애와 사상3. 저서4. 어록5. 관련 강의 영상6. 대중 미디어에서7. 여담

[clearfix]

1. 개요

20세기 초중반 세계 철학계를 대표했던 독일의 철학자. 20세기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전기에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문제 삼는 존재자'(현존재)를 분석하는 기초존재론을 주장[10]하였으며, 후기에는 현대의 과학기술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자연에서 받는 시적 감수성을 가지고 존재의 의미를 파악하는 철학적 작업에 몰두하였다.

현대철학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적 기여는 광범위하다.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 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대륙철학의 거의 모든 부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후 거의 모든 유럽 철학자들이 하이데거에게 일정 정도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11] 특히 프랑스철학계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나치 참여로 인해 철학적 업적이 부정당하기도 하는 등 현재까지도 논쟁이 끊이지 않는 문제의 인물이다.

2.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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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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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록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Die Sprache ist das Haus des Seins
『휴머니즘에 대한 서간』
인간은 존재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의 목자이다.
Der Mensch ist nicht der Herr des Seienden. Der Mensch ist der Hirt des Seins.
『휴머니즘에 대한 서간』
그도 그럴 것이 물음은 사유의 경건함이므로.
1953년 「기술에 대한 물음」이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마지막 말.[12][13]
과학은 사유하지 않는다.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대담 Martin Heidegger im Gespräch』[14]
지나친 밝음은 시인을 어둠 속으로 몰았다.
Excessive brightness drove the poet into darkness.
Essay : Hölderlin And The Essence Of Poetry, chapter from my copy of The origin of the work of art
네가 어떻게 읽었는지 말해준다면, 너가 누구인지 말해주겠다.
Tell me how you read and I'll tell you who you are.
모든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로 태어나서 한명의 사람으로 죽는다.
Every man is born as many men and dies as a single one.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1976년 데어 슈피겔과의 인터뷰 中..[15][16]

5. 관련 강의 영상

[navertv(19452491)]
하이데거 전문가 박찬국 교수의 강연

6. 대중 미디어에서

7. 여담



[1] 콘스탄츠에 소재. 교구 신부 카밀로 브란트후버와 기숙학교 사감 콘라트 그뢰버의 추천으로, 지역 재단 바이스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2] 프라이부르크에 소재. 엘리너 장학회의 후원을 받았다. 장학금을 받는 댓가로 프라이부르크의 김나지움과 대학을 다녀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다.[3] 셰츨러 재단의 후원을 받았다. 이 재단은 장학금 수혜자에게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과 신학을 보존하고 계승할 의무를 지웠다.[4] 아르투어 슈나이더 교수에게서 철학박사학위 취득. 논문 제목은 『심리학주의에서의 판단에 관한 이론』. 한국의 몇몇 책에서 하인리히 리케르트가 이 논문의 지도교수였다고 말하는데, 틀린 설명이다. 박사학위 논문이 아닌 하이데거의 교수자격 논문의 지도교수가 하인리히 리케르트.[5]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교수자격 논문 통과. 논문 제목은 『둔스 스코투스의 범주론과 의미론』. 지도교수는 하인리히 리케르트.[6] 에드문트 후설의 조교였다.[7] 1915년에 엘프리데 페트리(Elfride Petri)와 사귀기 시작했다. 작센 지방 고급장교의 딸인 엘프리데는 개신교도이며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국민경제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유겐트운동에도 관여한 자유주의 여권론자 게르트루트 보이머의 신봉자이다. 대학에서 서로 알게 된 하이데거와 엘프리데는 방학이면 친구들과 함께 라이헤나우 섬에 놀러 가서 며칠을 지내기도 했다. 1916년 말 하이데거는 엘프리데와 약혼했고, 석 달 후인 1917년 3월 뮌스터대학 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 중이라 결혼식은 화려하지 않았다. 연회와 축하객은 없었으며, 양가 부모도 축하 편지만 보내고 참석하지 않았다.[8] 엘리자베스 블로흐만은 엘프리데의 대학 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유겐트운동에서 깊은 감화를 받았는데, 이 모임에서 하이데거와 블로흐만, 그리고 엘프리데가 처음 만났다.[9] 부모가 독실한 가톨릭 집안이었고 본인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독실한 가톨릭 신앙이 있었지만, 30세 무렵에 종교에서 벗어나 철학자로서의 길을 걷기로 시작하면서 기독교와 결별한다. 장례식을 기독교식으로 치렀기 때문에 기독교를 다시 믿었던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지금까지도 받고 있지만, 하이데거 전문가인 뤼디거 자프란스키는 하이데거가 '기독교를 믿지 않았고 기독교 전통을 존중했을 뿐'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가벼운 산행을 하다가 교회나 예배당이 나오면 매번 성수를 손에 찍고 무릎을 꿇었는데, 한번은 제자인 막스 뮐러가, 교회에 거리를 두면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모순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하이데거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사유해야 하네. 그리고 기도를 많이 드리는 곳에는 신적인 것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가까이 있지."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715) 여기서 '신적인 것'은 기독교의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 후기 사상에서 사방세계 중 하나인 '신적인 것'을 말하는 것으로, '경이로움에서 비롯되는 신성스러운 것'을 의미한다.[10] 하이데거의 수제자인 가다머는 자신의 저서 《진리와 방법》에서 " 『존재와 시간』에 담긴 생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존재의 모든 의미와 객관성이 오로지 현존재의 시간성과 역사성에 의거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입증될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가다머 《진리와 방법 2 : 철학적 해석학의 기본 특징들》 임홍배 옮김, 문학동네, 2012, p.123 )[11] 금세기에 하이데거만큼 신학과 철학에 포괄적이며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또 없다. 개신교 영역에서 루돌프 불트만을 중심으로 한 마르부르크 학파, 해석학적 신학 및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와 알프레드 예거(Alfred Jager)를 들 수 있고, 가톨릭 영역에서는 소위 "가톨릭 하이데거 학파"가 형성될 정도이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로츠(Johannes B. Lotz), 묄러(Joseph Moller), 뮬러(Max Muller), 라너(Karl Rahner), 지베르트(Gustav Siewerth), 벨테(Bernhard Welte) 등이다. 또한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의 영향은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다. 하이데거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대표적 철학자는 베커(Oskar Becker), 비멜(Walter Biemel), 볼로브(Otto F. Bollnow), 핑크(Eugen Fink),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Hans G.Gadamer), 헤르만(Friedrich-Wilhelm von Herrmann), 요나스(Hans Jonas), 크류거(Gerhard Kruger), 란트그레베(Ludwig Landgrebe), 뢰비트(Karl Lowith), 마르쿠제(Herbert Marcuse), 페겔러(Otto Poggeler), 슐츠(Walter Schulz) 및 바이쉐델(Wilhelm Weischedel),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미셸 푸코, 조르조 아감벤, 사르트르 등이다.[12]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박민수 옮김, 북캠퍼스, 2017, p.653[13] 여기서 물음이란 모르는 것을 질문한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물으며 실존을 찾는다는 뜻이다.[14] 하이데거는 이 말이 과학을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과학이 갖고 있는 내적 구조의 확인일 뿐이라고 말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물리학적인 방법을 갖고 무엇이 물리학인지 말할 수 없다. 무엇이 물리학인지는 오직 철학적인 물음의 방식으로만 사유될 수 있다."는 것.[15] G.Neske / E.Kettering (편), 『답변. 마르틴 하이데거와의 대화 (Antwort Martin Heidegger im Gespräch)』, p.99. 앞뒤 맥락은 다음과 같다. "짧게 그러나 오랜 숙고를 통해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다. 철학은 세계의 현재 상태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이 것은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적인 사고와 노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직 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가능성은 사유와 시작을 통해 신의 출현이나 몰락 속에서 신의 부재를 예비하는 것이다. 부재 하는 신 앞에서 우리는 몰락한다." (#)[16] 여기서 신은 기독교의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무렵 하이데거의 신 개념은, 존재에서 가시화의 가능성이 나타나는 것에 경이를 느끼고 신성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범신론의 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신 개념이 우상 숭배로 향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17] 입문자들은 우선 하이데거 평전 등을 읽어서 대략적인 내용이 어떤 맥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편을 추천한다. 시중에 나온 책 중에 뤼디거 자프란스키가 지은 하이데거 평전이 제일 정확하지만 난해한 내용이 많아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좀 있고, 박찬국의 『들길의 사상가, 하이데거』는 가볍게(?) 읽기에는 좋으나 세부 내용(연도, 사건 순서, 인용 발언 등)에서 틀린 내용이 많다.[18] The book also includes a short and extraordinary afterword by Hermann Heidegger, son of Martin and Elfride Heidegger, in which he announces for the first time that at the age of 14 he was told by his mother that his natural father was a friend from her youth, his godfather Friedel Caesar - ‘I’m grateful to my niece for allowing me to make this declaration, in so doing freeing myself from a burden that has weighed upon and tormented me for seventy-one yea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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