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기뉴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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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1914~1930) | → | 프레기뉴 (1930) | → | 불명 (1930~1934) |
브라질의 前 축구선수 |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 프레기뉴 Preguinho | |
본명 | 주앙 코엘류 네투 João Coelho Netto | |
출생 | 1905년 2월 8일 | |
브라질 제1공화국 히우지자네이루 | ||
사망 | 1979년 10월 1일 (향년 74세) | |
브라질 연방 공화국 히우지자네이루 | ||
국적 | [[브라질| ]][[틀:국기| ]][[틀:국기| ]] | |
포지션 | 스트라이커 | |
신체조건 | 176cm / 63kg | |
등번호 | -[1]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 플루미넨시 FC (1925~1939) |
국가대표 | 3경기 4골 (브라질 / 1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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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라질의 전 축구선수.2. 생애
2.1. 클럽
주앙 코엘류 네투. 흔히 줄여서 프레기뉴(Preguinho)라는 별명으로 불린다.[2]그의 아버지는 브라질의 유명한 작가인 코엘류 네투였고 상당히 다양한 운동을 즐겼다. 이미 11살 때부터 플루미넨시의 유소년 팀에 소속되어 축구를 접하였다.
데뷔는 20세가 되던 해인 1925년에 이루었다. 4월 19일 이날 오후 프레기뉴는 주 수영 챔피언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메달을 목에 건 채 택시를 타고 라랑제이라스 구장으로 가서 데뷔전을 치렀다. 이 시합에서 플루미넨시는 방구와 1대1로 비겼다.
하지만 방구 역시 프레기뉴에게 계약 제시의 의미로 형 마누의 사진을 준 적이 있어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3] 하지만 결국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와 최종 계약하였고 방구를 상대로 커리어에서 총 17골을 기록하였다.
2.2. 국가대표
프레기뉴는 1930년 초대 월드컵[4] 당시 주장[5]으로 출전하여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였는데, 이 골로 브라질 대표팀 최초의 월드컵 득점자가 되었다. 하지만 프레기뉴의 골은 너무 늦게 나왔고 브라질 팀의 월드컵 첫 경기 역시 2대 1 석패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결국 브라질은 이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여 4강 진출에 실패했다.[6]2.3. 이후
프레기뉴는 선수 은퇴 이후에도 플루미넨시와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플루미넨시의 축구팀 임원으로서, 그리고 고문으로서 오래 활동하였고 꽤 중요한 인물로 대접을 받았다. 그는 1979년에 폐병으로 사망하였다.3. 만능 스포츠맨
브라질판 디온 샌더스 또는 보 잭슨. 그는 총 10개의 스포츠에 참가했는데 그 중 축구, 수영, 조정, 수구, 다이빙, 농구[7], 배구, 육상 등 8개의 종목에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롤러 하키와 탁구에서는 챔피언이 되지는 못했고, 그렇게 따낸 메달이 총 55개라고 한다.4.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활약 당시에는 만능 스포츠맨이자 브라질의 아이돌이었고 현재에도 브라질 대표팀의 기록 초반부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나는 100권 이상의 책을 썼지만 거리에서는 프레기뉴의 아버지로 더 많이 불린다.
코엘류 네투(프레기뉴의 아버지)
코엘류 네투(프레기뉴의 아버지)
5. 뒷이야기
- 프레기뉴가 수영을 잘하게 된 이유에는 아픈 과거가 있었는데, 어린 시절의 프레기뉴는 왕따를 당했었다. 8살 무렵의 프레기뉴를 물에 끌고가 빠뜨린 적이 있었는데 허우적대는 모습이 못(포르투갈어로 prego)과 비슷해서 프레기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 이후에는 수영 연습을 열심히 해서 대회에서 메달을 딸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다.
- 브라질 축구계도 프로화가 되었지만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로부터 돈을 받기를 거부하고 은퇴할 때까지 무상으로 뛰었다.
6. 어록
뭐라 말을 해야 정확할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플루미넨시는 이미 나의 영혼이고 심장이자 몸입니다.[8]
7. 수상[9]
7.1. 클럽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우승 3회: 1936, 1937, 1938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준우승 4회: 1925, 1927, 1933, 1935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시조 대회 우승 2회: 1925, 1927
7.2. 개인
- 캄페오나투 카리오카 득점왕 2회: 1930, 1932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또는 프레구(Prego)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3] 형 마누는 프레기뉴와 사이가 매우 좋은 형이었고, 각종 운동을 함께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1922년. 시합 중에 복부를 가격 당했고 내부 장기 출혈로 인해 사망하였다[4] 13개국 본선 진출 대회[5]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브라질 대표팀 주장 중 가장 앞순위에 꼽히는 인물이다. 1930년 월드컵 이전에는 주장이 누구인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6] 브라질 1930월드컵 6위(13강 조별리그)로 1930월드컵은 13강 조별리그 다음 각 조 1위만 4강 토너먼트에 진출하였으며, 8강전이 없었다.[7] 농구에서도 통산 711점을 올려 클럽 내 최다 득점자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릴 정도였다.[8] 1952년 1월 22일, 플루미넨시로부터 최고의 공훈 선수로 선정된 자리에서의 소감.[9] 프레기뉴는 플루미넨시 원 클럽 맨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