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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8 15:04:52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라틴어: Hilarius Pictaviensis, 프랑스어: Hilaire de Poitiers)

1. 개요2. 생애3. 아리우스파 논쟁과 유배4. 신학 사상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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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4세기경 프랑스 푸아티에의 주교이자 기독교 신학자, 성인이다. 그는 아리우스파 논쟁에 맞서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한 인물로, '서방의 아타나시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2. 생애

힐라리우스는 310년경 프랑스 푸아티에의 이교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신플라톤주의 철학에 심취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350년경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얼마 후 푸아티에의 주교로 선출되었으며, 아리우스파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3. 아리우스파 논쟁과 유배

당시 아리우스파는 예수가 신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펼치며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했다. 힐라리우스는 이에 맞서 니케아 신경의 정통 교리를 옹호하며 아리우스파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썼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이 강했던 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는 힐라리우스를 아리우스파를 지지하는 갈리아 주교들의 종용으로 인해 356년 프리기아로 유배 보냈다. 유배지에서도 힐라리우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여러 신학 저서를 집필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360년 유배에서 돌아온 그는 아리우스파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데 힘썼으며, 367년경 푸아티에에서 사망했다.

4. 신학 사상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며,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의 신성을 공유하는 동등한 존재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성자의 신성을 강조하며, 성자가 피조물이 아니라 영원한 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힐라리우스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경계하며, 성경의 영적인 의미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신학적 주장을 담은 '삼위일체론' 등의 저서를 남겼다.

5. 평가

4세기 기독교 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아리우스파 논쟁에서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옹호하며 기독교 교리의 확립에 기여했으며, 그의 신학 사상은 후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힐라리우스는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축일은 1월 1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