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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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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근대화의 지연3. 범아시아 조약기구 체제 하에서

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등장하는 일본을 의미한다. 소설에서의 행적을 요약하면 원역사대로 열강이 되진 못했으나 그래도 지역 2인자는 먹은 국가

2. 근대화의 지연

일본은 막부와 삿초동맹의 대립까지는 원 역사와 같이 진행되었으나,[1], 이후 우호국인 조선이 만주까지 팽창하며 잘 나가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다른 길로 나아간다. 막부가 조선의 전쟁으로부터 경제적 반사 이익을 챙기며 정치적 권위가 하락하는 것을 막고 삿초동맹과 비등한 대결을 하게 되었고, 이후에 신선조와 삿쵸 쪽의 무사들 사이의 분쟁 중에 막부가 천황가를 원역사와 달리 확실히 확보, 막부가 정통성 확보까지 성공하며 뒤이을 무진전쟁에서의 승기 또한 잡게 되었다.[2] 근데 삿초동맹이 꽤 밀렸으면 전쟁하는 권역이 규슈권이라 서남전쟁 아닌가? 문제는 삿초동맹도 세력이 꺾인 것은 아니어서 전쟁이 장기화된 것.

전쟁이 본격 진행되며 삿초동맹의 본산인 조슈는 육지로 연결되어 초토화. 토사번은 항복해서 살아남았으나 사쓰마번은 그 똥고집 마인드로 일관, 초반에는 규슈 전역을 장악하는 등 버티는듯 하다가 시모노세키 근방에서 있었던 해전에서의 패배로 막부군의 상륙을 허용하고 이후 지속적으로 밀리면서 패배가 확실시[3] 다시 영국의 지원을 받을 때까지 버티려고 류큐로 도망가서 점거한다. 그러나 탈출한 유구 국왕이 대한제국에 원병을 요청하고, 결국 대한군 1개 중대가 상륙해 해적(삿초 패잔병)들을 때려잡았다.

이렇게 내전을 끝냈지만 초토화된 본토를 경제적으로 복원시키는 문제가 남은 데다 그 동안 외부 사건에 개입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운이 무섭게 성장하면서, 원역사와는 달리 대한제국과 거래한 영국의 대전략에 따라 극동의 러시아 해군에 맞설 장기말로 전락했다. 자국력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규모의 해군을 무슨 수를 써서든 양성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덤으로 이 처지가 가장 최악인 점은, 수십년에 걸쳐 극동최강의 함대를 만든다 한들, 그때쯤이면 그 극동최강의 함대를 하루아침에 불량재고로 만들 천상계 전함 드레드노트(전함)와 그 후예라 할만한 후소급 전함, 리슐리외급 전함, 넬슨급 전함,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미친듯이 뽑혀나올 것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 야마토급 전함은 못 나올 수도 있겠다 다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찍 시작되어 벨 에포크가 인수분해되고 열강들도 기진맥진에 10년 뒤의 2차전을 준비하느라 육군에 집중하고 있으므로 노급 전함의 첫 출시가 실제 역사보다 훨씬 늦춰질 수도 있었는데... 이형이 직접 실역사보다 더 빨리 드레드노트급의 개념을 세계에 풀어놓는 방향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이웃한 강국인 대한제국은 경제침탈을 할 생각이 한가득에, 대만은 서양 열강 4개국, 류큐는 영국 세력권에 들어갔기 때문에 확보는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단 러시아와 싸워서 이기는 걸로 뭘 좀 뜯어낸 다음에야 뭔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될 상황에 몰렸다. 하지만 이 '따갚'조차도 막힌 것이, 해군에 강제로 올인해 육군 만들 돈이 없어서 무조건 대한제국과 함께 싸워야 한다. 지면 당연히 죽는 거고, 이겨서 따내도 대한제국이 한입 크게 베어먹은 뒤 던져주는 나머지로 배를 채워야 하는 처지다. 이겨 봤자 눈앞의 경쟁자와의 차이는 줄어들기는 커녕 더 벌어진다는 것. 설령 육군이 있더라도 일본이 혼자서 전쟁을 벌이는 것을 대한제국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애초에 육군을 만들지도 못하게 할 테고. 영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다 쳐도 대한제국의 '2중대 역할'에서 벗어나기는 사실상 요원하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동맹이지만 경제적으로 계속 침탈당할 수밖에 없고, 반항하고 싶어도 경제 종속이 기본이라 그것도 못한다. 그저 조선이 시키는대로 군대 움직이고 지속적으로 상납할 수밖에.
하지만 이 처지엔 장점도 있다. 세계 최강의 열강과 지역 최강의 열강이 국체를 보장해 준 상황인데다 대한제국이 "뜯어먹을 데가 있는 정도"의 체급까지는 키워줄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 일본 입장에서는 가장 절실한 시간을 받아냈으며, 동시에 최소한의 근대화도 보장받은 것이기에 해당 사항을 '통보' 받은, 4개 섬 중 하나 정도는 할양당하고 공장 하나 없이 지하자원만 캐서 헐값에 뺏기는 신세까지 예측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먼저 도게자를 하며 '성은이 망극합니다'를 외쳤을 정도다.[4]
이후 냉전기 협약을 베이스로 한 협력 조약을 대한제국과 맺으면서, 작중 표현으로는 '경제 침탈을 막을 모든 방어수단이 해체'되고, '일본군이 독립적으로 활동할 수단이 거세'되었으며, '독자적인 외교 주체가 될 가능성을 파괴'당했다.

하지만 이것도 19세기 기준으로는 굉장히 온화하며, 대한제국이 실제 역사에서 당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대우다. 수십년 뒤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일단 동맹인지라 일제강점기 때처럼 문화나 인권 탄압 같은 것까지 당할 일은 없고 그저 피만 계속 적당히 빨릴 뿐이니 식민지에 비하면 한결 나은 셈. 게다가 자치권도 보장받는다. 적어도 고종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불가능하지만, 어쩌면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 자립할지도 모른다. 평범한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현 상황이 최선. 하지만 사학도였던 고종이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 원세개 같은 경우에는 황궁의 위병임에도 너무 어린 나이+낮은 지위라서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이토 히로부미 같은 위인이 일본의 국익을 위해 일하는 걸 두고 볼 리가. 여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체 왜인지 쿠노이치를 데리고 도주하며 성욕과 권력욕을 불태우다 결국 안중근에게 체포됐다.

그러나 공화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각종 이념이 지연된 근대화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이 사태는 근본적으로 일왕 도쿠가와 가문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탓이 큰데, 국제정세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아주기구 회맹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면서 정작 내부의 개혁에는 어중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경제를 개혁하고 싶어하지만 지주 세력을 적으로 만들 생각은 없고, 사무라이로만 한정된 군부 탓에 제대로 된 병력 확대도 어려운 상황.

다이묘들을 지번사로 격하시키고 군권 등의 여러 권리를 박탈했지만 정작 중요한 법률과 행정 등은 여전히 지번사들이 넘나들기 쉬운 구조다. 제일 모순된 점은 도쿠가와 가문이 스스로를 여전히 다이묘, 사무라이라고 여기고 있어서 지번사들과 싸워 나라를 정리할 생각이 없다. 아주기구에서 일하면서 선진적인 대한제국에 매혹된 신흥 지식인 층은 이런 상황의 타개를 요구하다 축출당하기 일쑤.

3. 범아시아 조약기구 체제 하에서

천명대전에서는 강남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난민의 일부를 막부군으로 갈아엎은 구 삿초 동맹의 지역인 관서(조슈 번)와 큐슈(사츠마 번)에 수용, 친막부 세력으로 양성해 안정화시킬 계획을 짜고 있다. 이는 요시노부가 조슈 번과 사츠마 번의 토착민들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대한의 견제를 받아 본격적인 천명대전에 참전하지는 못했다. 종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동아시아의 No.2 지위를 노리고 발전에 힘쓰고 있는 상황.

별개로 일본도 내부적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 의회에 교토의 귀족들과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끌어들였기에 의회가 있으나마나에 가까운 대한제국에 비하면 미약하게나마 힘이 있긴 하지만, 무진전쟁으로 삿초 동맹이 붕괴된 이후로도 여전히 각 지역의 실권을 잡고 있는 지방의 다이묘들이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어서 순순히 봉토를 내놓으란 말을 안 듣고 반항하느라 중앙집권화도 제대로 안 되고 있는 판. 개화도 겉으로만 되고 있는 척 정도라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일본에서 유일하게 통일된 거라고는 내전 기간 동안 다이묘들의 사병들이 삽질 벌이는 거에 빡쳐서 회수한 군권뿐이고, 그거 말고는 지방별로 세수도 행정도 법률도 죄다 따로따로라고 한다.

문화적으로는 대한제국이 딱히 강요하지 않아도 한류가 일본에 퍼질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중화사상이 뼛속까지 깊은 중국에서도 조선을 배우자고 나서는 상황에서 정한론자들이 갈려나간 일본에서야... 특히 현재 일본어에 영어를 비롯한 외래어의 비중이 의외로 상당한 점을 생각하면, 이에 대한 영향도 나타날 전망. 거기다 일본의 오덕 문화 자체도 19~20세기 프랑스나 유럽의 예술 문화의 영향이 컸다. 게다가 소설 상황에서는 대한제국과 프랑스가 절친한 관계인 만큼 문화 교류도 활발해질 수밖에 없다. 거기다 소설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대한제국의 경제가 성장한 만큼 문화도 발전할 것이다. 원래 문화 발전이란 경제적 기반이 생긴 후에 이뤄지기 때문이다.[5] 주인공이 노렸던 것도 범아시아 조약기구를 통해 적극적으로 친한파를 육성하고 한국 문화를 침투시켜 대들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죽여버리는 것이었다.[6]

물론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인 요시노부는 대한제국 주도의 질서 하에서 2인자 자리를 굳혀야 일본이 산다는 생각이 확고한지, 소총 개발이나 경제 협력 등 대한제국이 뭔가를 하면 일본도 이에 참여하여 뭔가를 얻어내려 노력하지만, 이걸 모를 리 없는 이형 또한 그가 얻을 이익을 줄이기 위해 맞불놓기 식의 견제조치를 더한다.

게다가 베를린 종전 협상에 대한제국 전권대사 자격으로 참석한 박규수 총리가 미국 전권대사로 파견된 러더퍼드 B. 헤이스 오하이오 주지사의 주선을 통해 러시아 전권대사로 온 알렉산드르 대공과 '캄차카 조약'을 맺으면서, 자국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한제국의 예니세이 강 동쪽 전 영토 획득을 위해 캄차카를 얻는 조건으로 90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을, 영국에 빚을 져가면서까지 러시아 제국에 지불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재주는 일본이 부리고 돈은 대한제국이 챙긴 상황. 자고 일어나니 빚쟁이

서유럽 금융공황의 여파로 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가 북해와 지중해 양면을 통해 바다로 진출할 길이 열린 만큼, 영국으로선 금융공황의 직격탄을 제대로 맞아 돈줄이 궁해졌다지만 태평양이라도 저지해야 할 필요가 생기면서 어떻게든 900만 달러를 조달해 일본에 빌려주고 캄차카 반도 구입을 명령해야 하는 상황이 됐는데, 그 자금의 출처가 대한제국과 미국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영국은 물론 두 나라에 더 강하게 종속되는 시나리오가 전개될 가능성이 열려버렸다.

참고로 일본이 받게 된 캄차카 반도는 개척이 너무 어려워 현대에도 한반도보다 약간 큰 면적에 인구 수가 30만에 불과한 극악의 인구 밀도를 보이는 곳이다. 러시아는 항구도 있고 군 기지도 있다면서 가격을 올렸지만 관계자들 말대로 바가지가 따로 없다. 그나마 기온이 온화하고 토지가 어느 정도 비옥하니 농사를 못 짓는 건 아니고 임업 및 벌목업도 가능하며 오호츠크해와 베링해의 수산자원도 풍부하지만 사할린이나 쿠릴 열도도 일본 영토가 된다고 하더하도 접근성이 너무 낮아서 19세기 일본의 국력만으론 관리가 거의 불가능하다. 못해도 해상운송 기술과 항공산업이 발달해야 가능.

귀국한 박규수 총리와 이형이 일본에 대해 언급하길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스탠스가 강한 이웃나라를 대하는 정도에 불과하다.'라며, '번국으로서 상국을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논했으니 앞으로 '국가 단위의 시집살이' 수준으로 시달릴 일이 더 많을듯 하다.

겨울에 한양에서 홍역이 퍼진 것[7]을 계기로 극동 보건기구 출범을 의논하는 과정에서 베를린 회담을 통해 다극체제에 호의적인 박규수의 진언으로 대한제국이 주도권을 가지려는 이형이 생각을 바꾸어 일본이 이끌도록 하였다. 오래 전부터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여 서양의학에 익숙한 의사들이 많았던 것도 있지만, 보건기구 정도로는 전체 조약기구 전체의 주도권에서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으로 사신을 파견하면서 한성의 홍역 방제를 위한 의사들이 같이 따라갔고 방제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

한편으로는 캄차카 조약을 통해 획득한 새 영토를 요시노부 측에서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그 대가로 떠안게 된 900만 달러를 일반 대중들이 몰랐기 때문. 자세한 내용이야 영자 신문이나 도막파 측의 언론을 통해 기사화되고 있으나 대부분의 민중들은 영어를 읽지 못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

요시노부를 비롯한 막부파 측에서도 이런 사실이 나중에 일으킬 문제들을 잘 알고 있기에 재정적 문제만이라도 해결하고자[8] 에도에 볼모로 잡혀 있는 전국 다이묘들의 가족을 견회조신센구미를 통합해 출범한 국가헌병대로 경호케 하여 협박,[9] 이를 토대로 호적과 토지대장을 교토가 아닌 에도의 조정에 바치게 하고, 덴노의 조정을 에도로 옮긴 뒤 높이 5미터의 콘크리트벽으로 둘러버리는(...)[10] 사실상의 감금 조치를 취하는 등 본격적인 막부 주도의 중앙집권화를 추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라이를 폐지하지도 국민군을 창설하지도 못해, 다이묘들은 각지의 세습총독으로 여전히 세력이 남고 의회는 각 번의 협조로 만들었기에 힘은 있지만 안에서 세력다툼이 일어난다. 이러다보니 조선이 급성장하는 와중에도 일본은 각지에서 민란, 즉 잇키가 일어나 골치를 앓고 있다. 토지개혁을 하려고 해도 조선보다 사이즈는 20% 정도 크고 지주=사무라이 세력이라 더 어려운데 예산이 들어올 곳이 없다고. 조선과 중국의 쌀값 조정책으로 농민들이 피해를 보고 있는데, 아직 빈약한 산업공장들의 물건을 사주는 곳은 범아시아 조약기구뿐이라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방관하고 있다.[11] 범아시아 조약기구가 사주는 공산품 값이 아니면 불평등조약을 맺은 열강에게 국내산업이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대한은 별 수 없어도 해군력을 육성해[12] 다른 열강에게서 벗어나고 태평양으로 진출할 꿈을 꾸지만, 이 와중에 파나마 운하 건설로 아시아-태평양 최강 해군이라는 꿈에도 발목이 잡혔다.

그나마 파나마 운하는 미국 대서양함대가 단시간에 태평양으로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문제인데, 한국이 경제성장하고 작게는 제후국과의 아시아 무역, 크게는 태평양을 넘은 대미 무역의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한국 해군에도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대한제국은 영국과 혼인동맹을 실시하고 그 대영제국에서도 금시초문인 스팀터빈 엔진을 개발해 초고속 어뢰정을 건조하는가 하면[13] 100화 즈음부터 말이 나왔던 '기존 전함을 모조리 퇴물로 만들어버릴 괴물'의 개발을 진행중에 있다. 10년 이상 걸릴 장기 계획이라지만 세계 최고의 조선/개발능력을 지닌 영국이 스팀터빈과 혼인동맹을 받고 참가하면... 아울러 황제가 미리 정해둔 이 신형 무적전함의 함명은 충무공 이순신 함. 일본: "우리가 뭐 잘못했습니까!?" 라는 감상이 올라오기도 했다.

대한제국의 조약기구 합종군 파견 요청에 열정적으로 나서서 사무라이들을 비롯한 정예를 파병했다고 한다. 오히려 러시아가 생각보다 빨리 물러나자 전공이 부족해서 아쉬워했다고. 프로이센의 교류요청에는 다른 열강의 선생 역할이 시원찮으니 받아들이자고 한다. 물론 요시노부의 이면에는 프로이센과 교류역사가 더 긴 일본이 조약기구에서 위상을 높일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영국과 대한제국 사이에서 최대한 이득을 많이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고종은 쑨원 같은 중국 사상가가 일본으로 숨어들 경우에 대비해 요시노부에게 그런 녀석들을 발견하면 조용히 사라지게 만들라고 주문했다. 근대화의 지연과 사회구조의 모순이 결국 사고를 터뜨리게 되는데, 질소비료 개발에 성공한 대한에 의해 식량농업기구가 강하게 각국에 간섭하면서 수천만의 인력과 천문학적 자금을 동원해 신농유업 사업을 진행하는데, 이에 각 지번사들이 중앙에게 완전히 눌리는 것을 우려해 협조하지 않았고, 그 결과 각 지번마다 중앙의 지원을 가지고 알아서 신농유업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조약기구의 맹주인 대한제국은 그간 식량농업기구의 실질적인 고용주란 말을 들으면서도 여러 번 양보했고 특히 이번 신농유업 대사업에서는 눈에 띄게 숙이고 나왔는데 대놓고 효율 떨어지는 각자도생을 하겠단 일본이 다른 가맹국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좋게 말하면 식농기구를 무시할 정도로 강국이란 소리지만 나쁘게 보면 아주기구 창립 이래 최대 사업이고 맹주 대한과 다른 가맹국들도 모두 숙이고 들어가는데 혼자만 국내정치를 핑계로 편한 대로 받아가겠단 일본의 태도에 다른 가맹국들이 실망한 것.

아니나다를까 식농기구에서 파견한 감찰원들이 열심히 일했음에도 효과는 번마다 따로 놀았고, 공공연히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회맹에서도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에 아주기구에서 일하며 그 힘과 권위에 매혹되어 일본이 기구 내에서 지분을 넓혀가길 바라던 아시아주의자들은 크게 분노해 그간 지지하던 도쿠가와 왕가에게서 돌아서 반체제 세력을 결집했고 마침내 홋카이도에서 마쓰마에번을 중심으로 뭉쳐서 중앙을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식농기구의 방침을 수용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마쓰마에번은 대한의 인정을 받으면 독립까지 가능하다는 계획을 가졌고 일본정부는 다급히 대한제국에 중립을 부탁하는 친서를 보낸다. 대한제국은 내부단속도 못한 결과 사단을 낸 일본의 분열을 부추길까, 분열을 저지할까 고민하다 대한제국은 일본정부의 요청대로 중립을, 식농기구에서는 마쓰마에번의 편을 들고 여기에 평시 일본과 사이가 좋지 않던 초와 청이 가담하면서 중앙에서 강제적으로 지방에도 식농기구의 방침을 수용하게 해 일단락되었지만, 일본의 위신과 신뢰에 큰 손상이 갔으며 중앙과 지방의 마찰은 더 심해졌다.

이후 이형이 이간질을 위해 일부러 식농기구에 일본인을 많이 기용하면서 이념간 대립이 점점 심해지다 결국 유교 민주주의로 인해 중원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난 이후 학생운동이 일어났다.

문제는 낙후된 지번의 지번사들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학생운동을 탄압한 것. 특히 규슈에서는 내전 수준으로 시위가 커지자 마침내 대한제국에서 이순신급 전함을 끌고와 개입하게 되는데, 이때 치쿠슈번에서 선제공격을 하는 바람에 한국군이 전면적으로 개입한다. 그동안 일본의 전통을 수호하려고 나름 애쓰던 요시노부는 이 일로 그러한 노력을 포기하고, 한국군의 힘을 빌려 폐번치현을 달성하고자 한다.

이후 후일담에 따르면 주인공 사후에 흔들리는 조약기구에서 미적지근하게 행동하며 미국과도 손을 잡는 등 이중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결국 일시적으로 조약기구를 탈퇴하는 지경에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30년만에 재가입했다는 언급이 마지막.


[1] 사카모토 료마는 고종 즉위 후 3년 후에 사망했다.[2] 오키타 소지는 무진전쟁 중에 병사했다.[3] 실상의 사쓰마번의 개역이나 영지감봉이 자체가 안된다. 텐쇼인이 사쓰마 출신이고 오오쿠의 큰 어른이기고 전직 미다이도코로(ぉ御台所)이므로 사츠마 관련 내지(內旨)내리면 현직 쇼군조차도 거부 못한다.[4] 이것을 적절한 비유로 본다면, 장기 다 털릴 각오하고 왔는데 막상 요구받은 건 지속적인 헌혈. 그것도 맨입으로 피만 뽑아가는 것이 아닌 몸 상태 관리 같은 것도 다 도와주겠다는 거다. 성은이 망극합니다가 나올 수밖에 없다.[5] 실제 역사에서도 이전보다 상공업이 발전하는 17~18세기 조선에서도 '벽치(癖癡)'라 불리는 문화애호가들이 많이 나타났다.[6] 이후 이게 상당히 잘 먹힌 듯 임진왜란의 경우 히데요시가 노망 나서 저지른 대실패로 기록되고 있으며 원균은 아예 일본에서 사전에 침투시킨 트롤러 정도로 여겨져서 팔자에 없던 일본식 이름까지 붙었다.[7] 이때 막 태어났던 차남 이강도 홍역을 앓았다.[8] 이번 영토 강매는 요시노부에게 정치적으로도 여러가지로 악재다. 강매받았다고 공표해버리면 그동안의 한국 황제와의 친분과시가 무너지고, 그렇다고 전공을 인정받았다고 하기에는 지난 전쟁에서 한 게 없다는 점이 걸린다. 그렇다보니 오로지 한국 황제와의 친분으로 선물 받았다고 주장하는 수밖에 남지 않는데, 이렇게 되면 양국의 상하관계가 너무나 명확해진다.[9] 신선조 인원들이 국가헌병대에 들어가다보니 천연이심류가 존속할 가능성이 높아졌다.[10] 현실이었다면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정실이자 오미다이도코로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 요시노부의 어머니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 친왕(有栖川宮織仁親王)의 딸 요시코 여왕(吉子女王)이나 고셋케 가문들, 아이즈 번주 마츠다이라 카타모리와 번사들이 반발해서 콘크리트 벽보다는 오오쿠에 사실상 감금 조치 수준으로 될 듯 하다.[11]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대한제국과는 달리 공화주의나 사회주의의 세력이 점점 확대되는 상황이다.[12] 여담으로 수병이 전부 사무라이다. 지금은 어찌어찌 굴러가지만 병력풀이 제한되기 때문에 실역사의 1~2차대전 같은 대규모 소모전에서 어찌 될지가 큰 약점. 요시노부도 알고는 있지만 지금도 불만이 많은 사무라이들을 다독여야 해서 국민군 창설은 꿈도 못꾼다.[13] 실제 역사에서의 찰스 퍼슨스는 영국에서 터비니아라는 초고속함을 개발해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 관함식에 난입해서 헤집고 다녔다. 이 아저씨도 만만찮게 매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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