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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8:35:49

토미 페이지

<colbgcolor=#9a5b18><colcolor=#ffffff> 토미 페이지
Tommy Page
파일:tommy-page.jpg
본명 Thomas Alden Page
토마스 앨든 페이지
출생 1970년 5월 24일
미국 뉴저지주 글렌리지
사망 2017년 3월 3일 (향년 46세)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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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183cm
학력 뉴욕 대학교
직업 아이돌, 싱어송라이터
데뷔 1985년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데뷔 초2.2. 전성기2.3. 아시아에서 활동2.4. 음악계 뒷선으로2.5. 음악활동 복귀2.6. 뜻밖의 비보
3. 여담4. 디스코그래피
4.1. 앨범4.2. 싱글

[clearfix]

1. 개요

파일:tommy02.jpeg.jpg
<colcolor=#ffffff> 90년대 초 전성기 시절의 토미 페이지

80년대 후반에서 10년대까지 활동한 미국의 틴팝 아이돌, 싱어송라이터이다.

대표곡으로 "A Shoulder to Cry on"과 "I'll Be Your Everything" 등이 있다. 전성기 때는 빌보드 Hot 100 1위를 차지했지만 주로 아시아에서 더 집중적인 활동을 했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학창시절을 보낸 한국인이라면 그의 노래와 이름이 친숙할 것이다.

2. 생애

2.1. 데뷔 초

<colcolor=#ffffff> 90년 <아모르초콜렛> 광고.
국내에서 여학생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는 8살 때 첫 피아노레슨을 받고 스스로 뮤지션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 형과 밴드를 결성하기도 했는데, 록큰롤을 지향했던 형과 달리 본인은 댄스음악을 하고 싶어서 해산했다. 뉴욕 대학교에 진학 후 낮에는 학업을, 밤에는 클럽에서 일을 병행했다. 그러던 중, 친한 DJ의 소개로 마돈나의 프로듀서에 눈에 띄어서 가수로 데뷔할 수 있었다. 당시는 틴팝 돌풍이 불던 시기이다. 따라서 데뷔 음반은 댄스 음악을 주로 선보였다. "A Zillion Kisses" 등이 대표적.# 하지만 인기를 얻은 것은 발라드곡 'A Shoulder to Cry on'이였다. 당시 아팠던 친구를 위해 쓴 곡이라 특히 토미가 생전에 소중히 여겼다. 그가 국내 초콜렛 CF를 찍을 때 배경으로 깔렸던 곡이다보니, 크게 각인되었다.[1] 특히, 소녀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책받침의 남신에 등극했다.[2]

2.2. 전성기

<colcolor=#ffffff> <I'll Be Your Everything> 뮤직비디오

"I'll Be Your Everything"이 빌보드 핫 100 1위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 뉴 키즈 온 더 블록, Tiffany의 투어에 오프닝을 섰는데, 리무진 안에서 도니 월버그는 "T는 히트곡이 필요해"라고 말했다고 한다.[3] 그리고 3주간 멤버들과 공동 작업에 돌입했다. 그 때 나온 곡이 빌보드 1위곡 "I'll Be Your Everything"과 또다른 수록곡 "Turn on the Radio"이다. 당시 포인트상으로 매우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빌보드 관계자로부터 1위를 했다는 전화를 받자 그는 전화기를 떨구고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2집 앨범에서 싱글을 3장을 더 내고 그 중 "When I Dream of You"가 42위에 오르는 등 반응이 있었다. 하지만 이후 얼터너티브, 힙합, 알엔비 등이 인기 장르로 자리잡으며 틴팝 가수들의 인기는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토미도 이후로 본토에선 큰 히트곡을 내지는 못했다. 스스로도 이 부분을 아쉬워한 반면, 자신의 노래가 빌보드 잡지의 1위곡 특집 기사에 실린 걸 늘 자랑스러워 했다.

2.3. 아시아에서 활동

파일:tommy04.jpg
<colcolor=#ffffff> 이후, 아시아 활동에 집중

하지만, 미소년 컨셉과 감미로운 미성이 아시아에 어필되어 팬덤을 크게 형성했다. "Under the Rainbow" 시절 미모를 감상하자. 우리나라, 홍콩, 싱가포르,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 등에서 매우 큰 사랑을 받아, 커리어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88년부터 2000년까지 약 12년의 기간동안 무려 7장의 정규 앨범을 냈으며 베스트 앨범도 발매한다.[4]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으며, 12번이나 한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90년에는 잠실체육관에서 첫 단독콘서트를 열었는데, KBS2에서 방영해줬다.# 또한 주말의 오락프로그램에서 엔딩을 맡기도 했다.# 곧, 청소년 잡지를 중심으로 팬클럽까지 결성했으며, 라디오에도 고정으로 방송 출연을 했다.[5]
당시 청순형 가수로 엄청난 화제성이 있던 하수빈에게 "I'm Falling in Love"를 주고 "Lisa"라는 영어이름도 지어줘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수빈을 소개하기 위해 공연중에 깨알같이 등장하기도 했다.#
파일:tommy05.jpg
<colcolor=#ffffff> 국내 활동하던 시절의 토미와 하수빈

3집 <From The Heart>는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먼저 발매되었다.[6][7] 프로모션으로 내한을 했으며 2집 음반의 더블 플레티넘(당시 기준 약 24만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연예가중계', '한바탕 웃음으로' 등 당대 인기프로에 다수 출연하여 리드싱글 "Whenever You Close Your Eyes"를 열창했다. 6집 <Loving You>까지는 새 앨범이 발매되면 늘 프로모션으로 내한을 왔고, 각종 티비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거나 사인회를 열었다.

대만의 유명가수 엽천문과 듀옛을 하기도 했으며, 90년대 중반에는 아예 일본 레이블인 포니캐년으로 소속사를 옮겼다. 이 때 발표한 음반들은 말레이시아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6집의 리드싱글, "Missing you"는 아시아 차트 1위를 차지했다. 뮤직비디오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더이상 미소년 컨셉을 유지하진 않았고 남성다운 이미지와 성숙한 사운드를 강조했다.[8]
<colcolor=#ffffff> <Missing You> 뮤직비디오

2.4. 음악계 뒷선으로

파일:tommy06.jpg
<colcolor=#ffffff> 빌보드 발행인으로 활동

그러나 90년대 말 한국과 같이 일본도 경제 위기를 직면한다. 그의 소속사는 부도가 났다. 다시 뉴욕 대학교로 돌아간 토미는, 경제학과(Stern)를 마친다. 그리고 마지막 정규음반인 "Ten 'Til Midnight"을 2000년에 발표한다. 팬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작업한 음반이다보니 온라인으로만 소량으로 판매했고 현재는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가수 시절 활동했던 음반 레이블인 워너브라더스에 직원으로 들어간다. 가수시절 리무진을 보내주던 회사였지만, 직원이 된 뒤로는 아무도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제2의 커리어에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조시 그로반, 마이클 부블레, 엘라니스 모리셋, 그린데이 등 슈퍼스타들과 일을 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중역이 되었다. 조시 그로반에 따르면 그가 커리어를 시작하던 시절 싱글을 작업하고 고르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10년대에는 빌보드 발행인으로 이직한다! 이후로도 여러 레이블과 음악관련 대기업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가수로서 경험을 살려 그이외 커리어도 상당히 잘 풀린 셈이다.

2.5. 음악활동 복귀

2003년 그의 홈페이지를 통해 DVD 뮤직비디오 모음집을 발매하기도 했다.

2013년 음악활동을 개시하며, 페이스북 계정을 꾸준히 운영해왔다. 12[9] 현재도 그의 유족들이 종종 메세지를 올려준다. 트위터도 꾸준히 했으나 현재는 정지가 된 상태다.

2013년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한적이 있는데,# 그는 여전히 한국을 그리워하며, 자식들과 함께 유튜브를 검색해서 초콜렛 CF를 보곤 한다고 말했다. 또한 케이팝 붐과 관련해 원더걸스의 "Like Money"를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국팬들과 곧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바램이 끝내 이뤄지진 않았지만...특별히 한국 팬들을 위해 자신의 히트곡들을 피아노 연주와 함께 불러줬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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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13년~16년 동남아시아 투어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매년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말레이시아 공연에도 참여했다. 인도네시아 공연은 무려 18년만의 입국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공연을 찾았다. 동세대의 여성팬들이 정말 많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많은 세월이 지났지만 본인을 잊지 않은 팬들에 상기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티비를 통해 방영됐다. 유튜브를 통해 전체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2015년에는 자신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싱글 "I Break Down 2015"을 싱가포르 레이블을 통해 발표하기도 한다. 뮤직비디오에서 그는 미중년의 모습으로 출연한다.#[11] 목소리는 20대 시절 미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6년 18곡의 발라드를 담은 베스트, My Favorites을 발표했다.

2.6. 뜻밖의 비보

파일:tommy07.jpg
<colcolor=#ffffff> 고향 뉴저지에 영원히 잠들다.

하지만 2017년 3월 3일 오랜 팬들에게 비보가 들렸다. 우울증으로 병원에 1차례 실려가기도 했던 그는 결국 자살을 한것으로 알려졌다.[12] 향년 46살의 젊은 나이였다.[13] 파트너였던 찰리와 슬하에 3명의 아이에게 유서를 남겼다. 특히 한국과 인연이 많았던 그라 팬들은 더욱 슬퍼했다. 이제는 중년이 된 팬들의 어린 시절 추억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14] 고향인 뉴저지의 Prospect Hill 묘지에 20년, 21년 각각 사망한 그의 부모님과 함께 묻혔다.

그가 사망했을때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멤버들, 티파니, 데비 깁슨 등 동시대 동료들은 물론 조시 그로반 등 그와 인연이 있던 많은 스타들이 추모 메세지를 SNS를 통해 남겨줬다. 동료가수로 친했던 데비와 티파니가 각각 추모공연을 해줬다.#, #

2017년 4월 7일, 그가 가수이자 임원으로 활동한 워너브라더스에서 토미를 위해 추모 행사를 열어줬다. 그의 가족들은 물론, 데비깁슨, 조시 그로반, 다이앤 워랜 등을 포함한 수백 명의 음악관계자들이 참여해서 토미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관련영상

3. 여담

관련영상

동성애자였다. 업계에 '소수자'인 남자보컬리스트로서 활동하는게 너무 힘들다는 말을 팬과 이야기할 때 토로한 바 있다고 한다.(그가 주로 활동한 80~90년대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더더욱) 다만 틴팝 아이돌이였던 만큼 활발히 활동하던 시점에 사생활을 언급하는 것을 꺼렸던 듯 하다.

그를 만나러 아예 이민을 해서 미국 집근처로 이사온 한국인 팬도 있었다고 한다.

젊었을 때 엘비스 프레슬리를 많이 닮았다. 종종 관련 코멘트를 받은듯 하다. 엘비스의 노래 중에선 "Can't Help Falling in Love"를 좋아했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의 조던 나이트와 많이 친했다. 그가 토미에게 프리스타일의 댄스와 리듬에 맞춰서 핑거스냅하는 방법을 알려줬다고 한다. 중년이 된 시점에도 공연중에 이 손동작을 유지했다. 이후로도 어느정도 친분이 있었던것 같다.#
그밖에 Tiffany와도 많이 친해서, "Close Our Eyes"를 듀엣으로 부르기도 했다.

생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많이 아꼈던것으로 보인다. 인터뷰마다 아이들에 대한 언급이 많은 편이다. 2013년, 약 18년만에 방문한 인도네시아 공연에선 세 아이의 사진을 관객들에게 스크린을 통해 보여준 뒤, 딸인 루비가 가장 좋아한다는 "I Think I'm in Love"를 열창했다.#

데뷔초 틴잡지와 인터뷰에서 곤충이 되고 싶다면 "나비"가 되고싶다고 말했다. 자유롭게 날아갈 수있고 아무도 헤치지 않으니까.
이 당시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아티스트는 마돈나라 가리키며 "그녀는 나의 히어로"라고 답했다.
그밖에 피아니스트인 조지 윈스턴과 뉴에이지 음악,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좋아했다.

한국계[15]라고 알려지며 우리 나라에서도 더욱 많은 사랑을 받았다. 미소년이였던 그는 '책받침의 남신'으로 아이돌계를 평정했었다.

한식중에 불고기를 가장 좋아하며, 한국에서 자주 활동했을 때, "보물섬"인 제주도, 롯데월드, 이태원 등을 다녔다고 언급했다. 다시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광고 촬영 당시 방문했던 제주도 해변을 거닐며 홀로 파도 소리를 듣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음 팬카페 "Tommy Page"가 있다.
오랜 팬들의 사이트로 06년 쯤에는 약 2천명을 자랑하기도 했다.[16]

4. 디스코그래피

4.1. 앨범

토미 페이지 발표 앨범
연도 앨범명
1988 《Tommy Page》
1990 《Paintings in My Mind》
1991 《From the Heart》
1992 《A Friend to Rely on》
1994 《Time》
1996 《Loving You》
2000 《Ten 'Til Midnight》
《Greatest Hits: Dedicated to You》
2016 《My Favorites》

4.2. 싱글

토미 페이지 발표 싱글
연도 곡명 비고
1988 The Shag
Turning Me On
A Shoulder to Cry on <아모르초콜렛> CF
I Think I'm in Love
1989 A Zillion Kisses
1990 I'll Be Your Everything 빌보드 1위
Turn On the Radio
When I Dream of You
You Make Christmas Feel Like Heaven
1991 Whenever You Close Your Eyes
Under the Rainbow
My Shining Star
1994 Tell the World
1995 Close Our Eyes Tiffany와 듀옛
2015 I Break Down 2015


[1] 아시아에서 그의 시그니쳐곡이라 할 수있다.[2] 한국 대중문화 붐 이전이다보니, 해외 스타들의 인지도가 많이 높았다. 특히 토미나 소피마르소 등 당대의 하이틴 스타들은 CF도 찍고, 책받침의 단골로 등장했다.[3] 여기서 "T"는 토미에게 그가 붙여준 닉네임이다.[4] 그는 아시아에 있는 팬들 덕분에 음악을 포기할수 없었다고 밝혔다.[5] 당시 윤종신이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 게스트로 나왔다. '토미 페이지, 오늘은 몇 페이지?...' 식으로 같이 개그를 했다고 한다.[6] 국내 인터뷰를 통해 아시아 팬들에게 헌정하는 음반이라고 밝혔다.[7] 마이클 볼튼과 다이엔 워렌이 참여했고 이전보다 성인취향의 음악을 지향했다. 완성도면에서 전작들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8] 데뷔곡에선 다소 마른 편이였는데 이 시기는 운동을 많이 해서 매우 건장해졌다. 미소년 이미지를 기억하던 팬들이 이 뮤비를 보고 조금 당황했다는 썰도 있다.[9] 2는 2011년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계정인듯하고 1은 2013년 음악활동을 재개하며 새로 연 공식계정이다.[10] 2015년에도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한국과 대만 등에서 공연을 열고 싶다고 언급했지만 성사되진 않은듯하다.[11] '나는 무너진다'는 내용의 가사와 멜로디가 현 시점과 겹쳐서 팬들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원곡은 어느정도 비트가 있었는데 슬로우 버전으로 재편곡해서 더욱 스산한 분위기가 난다.[12] 다만, 원인 등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보니 의문을 제기하는 주변인이나 팬들도 있다.[13] 다만 비석에는 67년생으로 쓰인걸로 보아 실제 나이는 다를 수 있다.[14] 그의 비석에는 대표곡의 제목인 "A Shoulder to Cry on"이 새겨졌다.[15] 할머니가 한국인이라고 밝혔다. YTN에 따르면 외증조할머니가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한다.[16] 그가 80~90년대 활동한 뒤 오랫동안 공백이 있던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