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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23:05:47

태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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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edc89><colcolor=#94153e> 이조 2대 황제
太宗|태종
파일:이태종 이불마.jpg
묘호 태종(太宗)
시호 대행황제(大行皇帝)
연호 티엔탄(天成) 1028 ~ 1034
통투이(通瑞)1034 ~ 1039
년깐푸흐우다오(乾符有道) 1039 ~ 1042
민다오(明道) 1042 ~ 1044
티엔깜탄부(天感聖武) 1044 ~ 1049
숭흥다이바오(崇興大寶) 1049 ~ 1054
성씨 리(Lý, 李/이)
펏 마(Phật Mã, 佛瑪/불마)
부왕 태조(太祖)
모후 영헌정명황후(靈獻貞明皇后)
황후 영강금천황후(靈感金天皇后)
좌국황후(佐國皇后)
입원황후(立元皇后)
입교황후(立教皇后)
생몰기간 1000년 7월 29일 ~ 1054년 11월 3일
재위기간 1028년 ~ 1054년 11월 3일

1. 개요2. 묘호와 시호3. 생애
3.1. 내력과 초기3.2. 3왕의 난3.3. 즉위 후3.4. 국력을 증진하다3.5. 농존복의 반란3.6. 참파 정벌3.7. 농지고의 반란3.8. 사망3.9. 기타
4. 평가5. 가계도6. 참고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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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베트남 리 왕조의 제2대 황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대행황제(大行皇帝). 휘는 리펏마(Lý Phật Mã, 李佛瑪)이며, 다른 이름은 리둑친(Lý Đức Chính, 李德政/이덕정)이었다.

부황를 돕고, 모반을 꾸미려고 하는 형제들을 토벌한 리씨 왕조의 수성군주라는 점에서 중국의 당 태종 이세민, 조선태종 이방원과 공통점이 많다. 그리고 태종이 황제로 즉위한 후에 베트남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과거 제도를 실시,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중국과의 대등한 입장을 유지했으며 베트남의 국력을 발전시켰다. 차이점은 리 태종은 앞의 두 태종과 달리 적장자였으며, 황태자로 내정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존호는 개천통운존도귀덕성문광무숭인상선정리민안신부용견체원어극억세고공응진보력통현지오흥륭대정총명자효황제(尊號開天統運尊道貴德聖文廣武崇仁尚善政理民安神符龍見體元御極億歲功高應真寶曆通玄至奧興龍大定聰明慈孝皇帝)이다.

2. 묘호와 시호


묘호는 태종이다. 시호는 없고 단순 대행황제[1]로만 모셨다는걸 보면 전 레 왕조처럼 리 왕조 시기에도 시법이 완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 존호는 생전 재위기간 당시의 수많은 업적에 근거하여 태종을 높이는 의미로 여러 글자가 점점 덧붙여졌다.

보통 성(왕조)을 따서 다른 나라, 왕조의 태종들과 구분하기 위해 '이태종(李太宗), 리 태종'이라 칭한다.

3. 생애

3.1. 내력과 초기

태조 이공온의 맏아들로 1000년 7월 29일 레 황후 소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공온은 당시 전여조의 신하로 일하고 있었다. 《대월사기전서》에는 이불마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머리 뒤에 별똥별처럼 7개의 점이 있었다고 하며 어려서부터 인(仁)에 밝았고, 6예(六藝), 문무(文武)에 능했다고 한다.

이후 와조제가 죽고 조정에 내분이 일어난 후 이공온이 추대받아 태조로 즉위하자 이불마는 태자로 책봉되었고, 개천왕(開天王)에 봉해졌다. 총명함을 인정받은 이불마는 원수(元帥)직에 임명되었고, 남방의 강국 참파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며 참파군의 장수 포령(布令)을 생포한 후 귀환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도 전쟁에서 여러 공적을 세웠다.

3.2. 3왕의 난

1028년 태조가 붕어하자 무덕왕(武德王), 익성왕(翊聖王), 동정왕(洞征王)이 태자 이불마가 즉위한다는 소식을 듣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성내로 잠입해 이불마가 나타나는지 계속 확인했다. 이불마는 이들을 피해 장소를 옮겼으며 모든 문을 잠그고 궁중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장을 갖추도록 했다.

처음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형제들을 공격한다는 점에서 망설였지만 충신 이인의(李仁義)의 말을 따라 군사를 보내 그들을 진압했다. 관군과 반군의 전투 중 한참 승부가 나지 않았는데 화가 난 여봉효(黎奉曉)란 자가 큰 소리로 무덕왕의 말을 잡고 무덕왕을 죽이자 지휘관을 잃은 반군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반란이 종식된 후 여봉효가 상황을 보고하자 이불마는 그의 공덕을 칭찬했고, 다음날 즉위식을 치렀으며 반란의 주역이자 살아남은 동정왕과 익성왕을 용서하는 대인배스러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3.3. 즉위 후

이후에도 체주(彘州), 화주(和州), 환주(驩州)등에서 잦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능숙한 군 통솔력으로 반란을 평정했고[2] 얼마 후 북송으로부터 교지군왕에 정식 책봉되었다.

1039년부터 완비된 관료 체계를 조직했으며, 경작용 소를 보호하는 법을 만들었고, 편리하고 빠른 유통을 위해 전국에 전용 길을 만들었다. 또한 당시 대구월은 법률에 문제가 많았는데, 태종은 이 부분에도 관심을 기울여 형법의 총집편인 《형서》를 편찬했으며, 형을 다스리는 법이 명확해 민간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이 책은 베트남의 법률 발전에 매우 중대한 의의를 가지기도 한다.

군사적으론 군대의 정비에 주력하여 군을 12위(衞)로 나누고 무기를 발행하여 군대에 수여했다. 또한 , 봉황, 물고기, , 호랑이, 표범, 앵무새를 본뜬 전함을 건조했다.

태종은 각종 반란때 태자에게 감국을 명하고 친정했으며 능숙한 통솔력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농지고(儂智高)[3]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맞붙어 성을 무너트린 적이 있었다.

3.4. 국력을 증진하다

잦은 전쟁으로 친정했지만 태종은 내치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민심을 중시했고, 기근이 들거나 전쟁을 벌일 때마다 2~3년 동안 세금을 감면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특이한 행적을 보여줬는데, 1038년 2월 태종은 농사를 짓기 위해 남해문으로 떠났다. 직접 농기구를 잡고 논에 내려가 농삿일을 하는 등 독특한 모습을 보였으며 중국의 제도를 본떠 1040년 전용 관복을 만들도록 명령했고, 궁녀에게 옷을 짜는 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5품 이상에겐 비단옷을, 9품 이상에겐 능직옷을 선사했다. 조정에서 북송의 비단과 능직을 없애도록 했고, 이후부터 북송의 옷을 사용하지 않았다.

3.5. 농존복의 반란

1039년 당유주(州)의 수령인 농존복(儂全福)이란 자가 동생과 처남을 죽이고 땅을 빼앗는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자신을 소성황제(昭聖皇帝)라 칭하고,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지역을 장생국(長生國)이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더이상 리 왕조에 칭신하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태종은 직접 친정했고 농존복은 무리를 이끌고 달아나 숨었으나 진압군의 지속적인 추적으로 결국 사로잡혔다. 태종은 농존복을 붙잡고 그 성을 허물어버렸으며 귀환한 후 농존복과 일당 5인을 처형했다.

그러나 농존복의 다른 아들 농지고는 살아남았으며, 농존복의 뒤를 이어 칭제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3.6. 참파 정벌

1044년 태종은 참파 정벌에 나서 자야 신하바르만 2세[4]와 그 처첩들을 생포했으며 포로를 부속(部屬)에 배당하여 등주의 영강진에 거주하게 했다. 또한 등주에 향읍을 만들어 참파의 옛 마을 이름을 사용하게 했고 11월 개원하여 연호를 '천감성무'(天感聖武)로 바꾸었다.

3.7. 농지고의 반란

1052년 농지고란 자가 자신을 인혜황제(仁惠皇帝)로 칭하고 국호를 대남(大南)으로 칭한 뒤 북송의 국경선을 넘어 횡산채(橫山寨)를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옹주로 돌아갔는데, 옹주로 돌아간 후 송나라의 군인과 민간인 10,000여 명에게 피해를 끼치자 북송의 적청, 항장이 농지고를 처단하기 위해 송 인종에게 간하여 처단권을 부여받았다.

북송의 적청은 군을 거느리고 옹주에 도달했으며 농지고가 나가 싸워 적청을 무찌르는 등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송군이 이내 돌아와 싸우자 격전 끝에 대남군을 궤멸시켰다. 농지고는 도주했고 리씨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자 태종은 무이(武珥)에게 지원을 명령했다. 이내 적청이 농지고를 공격하자 이길 가능성이 없다 판단한 농지고는 대리국으로 도망갔다. 그러나 대리 국왕은 농지고를 잡아 참수시켜 북송으로 보내 농씨 세력의 씨를 말렸다는걸 알렸다. 이로써 농씨 세력이 붕괴했다.

3.8. 사망

1054년 태종은 몸이 안좋아짐을 느꼈고 태자 이일존에게 모든 정사를 관장하도록 명했으며 곧 거동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일 54세를 일기로 붕어했고 이일존이 즉위해 개원했다.

묘호는 태종으로 정해졌지만 따로 시호는 정해지지 않아 대행황제(大行皇帝)로 올려졌다.

3.9. 기타

태종에겐 전설이 하나 엮어져 전해진다.

1029년 6월 건원전에 용 한 마리가 내려오는 일이 있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말하길
신룡(神龍)이 발현한 것을 보니, 기반이 흔들리고 건원전이 무너질 것 같도다! 그 땅은 많은 이들이 용흥(龍興)의 승지(勝地)라 했고, 천지의 중앙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러니 규모를 확장하고 그 방향을 바로 잡도록 하여라.

그리하여 건원전을 확장하고 천안전(天安殿)이라 개명했다. 좌측에 선덕전을 세웠고 우측엔 연복전을 만들었으며 천안전 앞에 있는 지(墀)를 '용지'(龍墀)라 명하고 용지의 동쪽엔 문명전, 서쪽에 광무전을 세웠다.

용지의 좌우엔 종루를 세웠으며, 그 종루에 올라가 만백성의 억울함을 경청했다. 용지의 네 주위는 모두 기둥을 세우고 처마를 씌운 랑(廊)을 만들었다. 신하들이 모여 토론할 수 있게 하고 궁궐 외곽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그 성을 용성(龍城)이라 칭했다.

4. 평가

깊은 공손은 한나라광무제와 같고, 4번의 정벌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기에, 당 태종(唐太宗)에 견줄 수 있다.

리 왕조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으며, 아버지 못지 않은 선정, 정벌전쟁의 승리, 반란 진압을 연이어 성공하며 명확하고 올바른 형법을 제정했다.

아버지 태조가 붕어하자 신생 리 왕조는 잠시 몰락할 위기에 처했으나[5] 3왕의 난을 진압하고, 형제들을 용서하는 관용을 베풀며, 불교를 허용하고 직접 농사를 지어 백성의 삶을 느끼며 민심을 의식하는 통치를 행하는 등 백성을 우선시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방원과 비슷하게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볼 수 있으며 이세민과도 공통점이 있다.

5. 가계도

6. 참고 항목



[1] 아직 묘호(시호)가 정해지지 않은 붕어한 황제.[2] 동국태자를 감국(監國)에 임명하고 직접 친정했다.[3] 국호를 대남(大南)이라 칭하고, 인혜황제(仁惠皇帝)를 참칭했다.[4] 참파 왕국의 왕. 대월 역사서에는 '작두'(作斗)로 기록되어 있다.[5] 이전 왕조인 응오 왕조와 딘 왕조 그리고 전 레 왕조 모두 창업군주가 죽자마자 삐걱대고 곧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