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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하라 코노미/종전기념일 관련 게시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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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3. 반응

1. 개요

원본 포스팅[1]

2020년 8월 15일 성우 코하라 코노미인스타그램에 추모글을 올리면서 일어난 논란.

2. 전개

파일:comic_new2-20200815-235654-000.jpg
이 날은 잊어서는 안돼.

제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열심히 살았던 사람을요.

남의 일이 아니다.
그 사람들이 있으니까, 있었으니까,
지금의 우리가 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8월 15일
#오늘도 하늘은 너무 예뻐
#지키기 위해 살다
#댓글 고마워요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 계시기 바랍니다

8월 15일은 한국에선 광복절이지만 일본에선 '종전일', '종전기념일'(보통은 시쳇말로 이렇게 불린다), '전몰자를 추도하여 평화를 기원하는 날(戦没者を追悼し平和を祈念する日)' 등으로 부르는데, 종전기념일이나 종전일이라는 수사법만' 똑 떼고 보면 가치중립적 수사법이라 착각하기 대단히 쉽지만, 일본에선 무엇보다 2차대전이나 8·15가 관련될 경우 '일본군을 위시한 일본인 사망자에 국한하여 전몰자란 용어를 사용'''하는걸로 해석할수 있는 행간이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선 2차대전의 발발 경로와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 없이 단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을 기리자"는 자의적인 선언만 반복하면서 주변국에 물의를 빚고 있다.

8월 15일엔 야스쿠니 신사에서 전범들을 포함한 200만여 위의 전몰자들을 애국 용사로 추모하는 행사가 대대적으로 거행되는데 2020년에도 36도가 넘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1년 전보다 서너배 많은 인파가 참배객으로서 야스쿠니를 방문했다.# 이날 야스쿠니를 방문한 어느 여성(68세)은 "유족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 행복하게 사는 것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의 덕"이라고 발언했고 같은 날 부도칸에서 열린 전국전몰자 추도식에 참가한 아베 총리는 "우리들이 향유하고 있는 평화와 번영은 전몰자 여러분의 고귀한 희생 위에 쌓아 올린 것"이라고 강조했는데# 코하라의 인스타 게시물이 이런 극우적 시각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맹점이 있다.

차라리 두루뭉실하더라도 "전쟁을 통해 희생당한 수많은 분들의 명복을 빈다"는 식으로 얘기했다면 한결 나았겠지만 코하라의 게시물은 반전, 평화 메시지가 없이 단지 "전몰자의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일본이 있다"는 방어적인 논리만 드러냈으며 게다가 여기에 "지키기 위해 살다"라는 해시태그를 달았다. '선열들이 목숨을 바치면서 남긴 유지를 지키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해석한다고 쳐도 '일본을 위해 희생된 선열들의 유지'라는 개념 자체가 애초에 2차대전과 식민주의에 얽힌 선후 관계를 전부 무시한 채 도출되기 때문에 역사 왜곡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지키다'라는 동사가 주는 임팩트가 크다 보니 관점에 따라선 "일본이 침략당했다"는 식으로 읽힐 수도 있다. 실제로 코하라의 게시물을 본 많은 한국 네티즌들이 이런 식으로 해석하였다.

어찌했듯 댓글들을 통해 항의를 받은 탓인지 "지키기 위해 살다"는 스스로 삭제했다. 하지만 몇몇 한국인들을 제외한 대부분이 코하라를 응원하였기 때문에 게시물 자체는 그대로 놔 두었다가 다음날인 8월 16일에 삭제했다. 비슷하게 정치적 논란을 일으켰던 성우들[2]이 그러했듯 이 포스팅에 대해 제대로 해명을 할 확률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추후 코하라의 역사관을 둘러싼 논쟁이 매번 재발될 가능성이 커졌다.

3. 반응

이 발언은 한국에서는 의견이 나뉘었다. 농민이나 민간인 등의 희생자들을 제외한[3] 뉘앙스의 발언이다.

하지만 욱일기 사건으로 논란이 된 노지마 켄지기미가요로 인해 논란이 일었던 토야마 나오처럼 일본의 역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다. 코하라의 나이대를 생각해 보면 이쪽이 더 설득력이 있다.

성우 본인과 배역의 이미지에 타격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국 비하가 없는 게 어디냐"는 반응과 본인도 인지했는지는 확실하진 않지만 글을 삭제했으니 우익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반응도 있었다. 실제로 해당 포스팅만으로는 확실한 근거가 부족하고 코하라 본인이 명확히 해명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요원하기 때문에 극우파로 확정하긴 어렵다. 비록 의심은 피할 수 없지만 이런 행동이 절대적인 수준의 지표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4]

중국에는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는지, 아니면 별로 심각하지 않다고 본 건지 중국 게임인 영원한 7일의 도시아사나[5]역에 캐스팅되기도 하고 여론도 이 문제에 대해 잠잠한 편이었다.


[1] 코하라 본인이 삭제함.[2] 카와하라 요시히사, 시라이시 미노루, 오가타 메구미, 마츠카제 마사야, 노지마 켄지 등.[3] 왜냐하면 일본 극우들이 주로 추도하는 대상은 병사들이 아니라 기시 노부스케, 도조 히데키, 이시이 시로 등의 A급 전범들인 데다 전쟁의 희생자이고 큰 피해자 중 하나이자 최전선에서 자살행위를 강요받은 징집자들을 어리석은 야망 하나 때문에 지옥으로 내몬 제국군 간부들과 제국군 수뇌부, 당시 제국 내각 일원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묻힌 진짜 전몰자를 추모하기는커녕 정작 본인들이 나서지 않으면서 학병이나 일제의 소년병 징집을 정당화하고 선제침략을 자위권으로 왜곡하는 등의 답도 없는 전범들을 피해자로 여기고 자신들 역시 그들의 후손이라는 인식을 가진 이가 많다.[4] 거기다 선배인 카야노 아이야스쿠니 신사 참배라는 수습조차 하기 어려운 사고를 크게 터뜨리면서 한국과 중국에서의 이미지가 큰 하락을 겪은 걸 상상한다면 코하라가 저지른 사고는 약과란 말도 있다.[5] 여담으로 이 배역도 본래는 비슷한 사건을 일으켰던 카야노 아이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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