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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6-05 14:00:13

코르처


코르처
Korçë
파일:Flag_of_Korçë.gif
국가 알바니아
지역 코르처주
면적 806㎢
인구 60,754명
시간대 UTC+1 (서머타임: UTC+2)
코르처 (알바니아)


1. 개요2. 역사3. 경제4. 관광5. 자매도시

1. 개요

알바니아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코르처주의 주도이다.

2. 역사

코르처는 13세기에 에피스코피라는 이름의 작은 정착지였다. 하지만 이슬람교로 개종한 알바니아인 일리아스 호차가 코르처에 땅을 매입하면서 이 마을을 발전시켰다. 그는 술탄 바예지드 2세의 마굿간 주인이어서 술탄과 매우 친해서 여러 가지 특혜를 받았다. 이 시기 동안 코르처는 상업과 문화가 발전했으며, 특히 그리스 정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르처는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여 문화적 혼합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다양한 문화적 유산이 형성되었다.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던 코르처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섞인 지역으로 발전했다. 오스만 제국의 영향 아래, 코르처는 점차적으로 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를 받아들였고, 그리스 정교회와의 교류도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05년 코르처에는 1,300가구가 살고 있었고 그 중 3분의 2가 기독교인이었다.

알바니아의 독립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코르처는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였다. 19세기 말,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모국어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필요성이 커졌고, 1870년대 후반, 알바니아 애국자 위원회는 라틴어 기반 알바니아 문자를 고안했고, 이는 영국과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도 채택했다. 1870년대 후반에 설립되어 알바니아 문화 발전을 촉진한 알바니아 권리 수호 중앙위원회는 남학생을 위한 알바니아 중등 학교를 설립했다. 그렇게 코르처에 학교가 늘어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오스만 제국 정부는 학교들을 폐쇄시켰다.

1912년 알바니아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하자, 코르처에 살고 있는 그리스계 주민들은 그리스 편입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알바니아의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리스의 영향 아래에서 독립에 반대하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일어났다. 1912년~1913년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그리스군은 1912년 12월 6일 코르처를 점령하기도 했다. 1913년 코르처기 알바니아에 편입되자 그리스는 이를 북부 에피루스 지역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분쟁을 일으켰고, 코르처 지역에 거주하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군대의 개입을 요청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알바니아 정부에 의해 진압당했다. 그러나 1914년 10월, 이 도시는 다시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중 마케도니아 전선이 열리자 이 곳은 프랑스가 점령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있던 프랑스 장군 모리스 사리엘은 코르처의 시민들이 그리스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해 그리스군이 코르처에서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요구가 묵살당하자 사랄은 프랑스 군사 정책을 알바니아 민족주의 봉기를 지원하도록 바꿔야 한다는 전보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파리 강화 회의에서 코르처는 알바니아의 일부로 남았고, 그리스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장하기로 결정이 났지만, 알바니아 정부는 코르처에 있던 그리스 정교회 주교를 쫓아냈다.

이탈리아 군은 1939년 코르처를 나머지 지역과 함께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그리스 침공 때 코르처는 이탈리아 공군의 주요 전진 기지가 되었다. 하지만 알바니아인들은 이탈리아의 지배를 싫어하였고 1941년 코르처에서 알바니아 노동당이 창설되 파르티잔 운동을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코르처는 알바니아의 도시가 확실하게 되었다.

3. 경제

코르처는 알바니아 남부의 상업 및 농업 중심지로 주요 산업으로는 편물, 양탄자, 직물, 제분, 설탕 정제 등이 있다.

4. 관광

5. 자매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