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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08 13:01:31

카이사/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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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돌아온 소녀3. 괴물4. 틈으로 엮인 인연

1. 장문 배경

두려움을 모르는 공허의 사냥꾼 카이사에게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이라면, 그녀가 처음에는 눈에 전혀 띄지 않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이었다. 카이사는 대대로 전사를 배출한 부족 가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슈리마의 대지 아래 도사리고 있는 미지의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머나먼 곳에서 소환된 것도 아니었다. 카이사는 평범한 소녀에 불과했다. 혹독하기 짝이 없는 기후의 남쪽 사막을 고향으로 삼은 부모에게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고, 낮에는 친구들과 놀며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어른이 되었을 때의 삶을 상상했다.

소녀 카이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뀐 것은 태어나서 열 번째 여름을 맞이한 무렵이었다. 카이사는 너무 어렸기에 그해에 마을을 휩쓴 이상한 사건들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낯선 존재들이 떠돌아다니며 땅 아래 도사린 어둠의 힘에 제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파다했다. 어머니는 카이사에게 집 밖에 나가 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카이사와 친구들은 그 소문을 믿지 않았지만, 어느 날 저녁 카이사는 마을 주민들이 제물로 바치기위해 유목민에게서 염소 무리를 사들이는 모습을 목격했다. 카이사는 여덟 살 생일 때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칼로 염소들을 묶은 밧줄을 자르고 가까운 협곡에 풀어주었다. 어린아이의 악의 없는 장난쯤으로 넘어갈 일이었지만, 곧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땅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고, 번뜩이는 빛줄기가 하늘을 그슬렸다. 아이들은 죽음을 피해 마구 내달렸다.

공허가 깨어난 것이었다. 거대한 균열이 발생하여 지반을 쪼개버렸고, 카이사의 마을과 주민 전체를 집어삼켰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진 자리에는 칠흑처럼 새까맣고 이리저리 뒤틀린 기둥이 우뚝우뚝 솟은 모래벌판만이 남았다.

카이사는 땅밑 세계에 갇힌 상태에서 의식을 되찾았다. 온몸을 짓누르는 공포 때문에 질식할 지경이었으나 아직 희망은 있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이 외치는 비명 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려왔던 것이다. 주민들은 꺼져가는 목소리로 서로의 이름을 되풀이해 불렀다. 마치 그 이름들이 주문이라도 되는 듯. 하지만 사흘이 지나자 그 목소리들도 잦아들었고, 이제 카이사의 귀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목소리뿐이었다. 친구도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것이었다. 소녀는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그렇게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무렵, 카이사의 눈에 저 멀리 아련한 빛이 보였다.

카이사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헤지긴 했지만 물이 약간 남은 가죽 부대와 다 썩어가는 복숭아 등, 마을이 붕괴된 자리에 남은 보잘것없는 먹을거리 덕분에 간신히 굶어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는 또다시 굶주림보다 더 먹먹한 두려움에 직면했다. 소녀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동굴로,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보라색 불빛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게다가 카이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동굴 안에는 카이사보다 크지 않은 체구에 끔찍스러운 형상을 한 생명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중 한 놈이 이쪽으로 다가왔고, 카이사는 양손으로 칼을 쥐고 놈의 공격에 대비했다. 놈이 달려들어 카이사를 땅바닥에 쓰러뜨렸지만 카이사는 칼을 휘둘러 놈의 급소를 정확히 공격했고 둘은 더 깊은 심연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처음 그녀에게 달려든 괴물은 이미 죽은 듯했지만, 기이하게도 놈의 시커먼 겉껍질이 카이사의 팔에 착 들러붙었다. 껍질에 감싸인 팔 부분은 따끔거리고 얼얼했으며, 손으로 만져보면 강철처럼 딱딱했다. 카이사는 극심한 공포에 휩싸여 칼로 껍질을 뜯어내려 했지만 칼은 부러져 버렸다. 곧이어 덩치가 더 큰 괴물들이 다가왔고, 카이사는 어쩔 수 없이 껍질로 싸인 팔을 방패처럼 사용하여 간신히 도망쳤다.

카이사는 깨달았다. 이 껍질은 이제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매일 매일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던 시간은 이윽고 몇 년으로 늘어났고, 껍질도 점점 더 넓어졌다. 카이사의 다짐도 더욱 굳어졌다.

이제 그녀에겐 희망뿐만이 아니라 계획이 있었다. 악착같이 싸워서 살아남자. 그래서 돌아갈 길을 찾자.

카이사는 더 이상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모르는 생존자가 되었다.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카이사는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두 세계의 틈에서 살며 두 세계가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아왔다. 공허의 굶주린 생명체들은 슈리마 곳곳에 흩어진 마을들뿐 아니라 아예 룬테라 전체를 먹어치우려 한다. 카이사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카이사는 그동안 셀 수도 없이 많은 공허 생명체를 물리쳤지만, 그녀가 그토록 기를 쓰고 보호하는 인간들은 그녀를 괴물로 취급하기 일쑤다. 카이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녀의 이름은 전설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했고, 불운한 이케시아를 떠도는 고대 공포의 괴물들을 상기시키게 되었다.

“카이사”는 이제 공허의 이름이 된 것이다.

2. 돌아온 소녀

“내 말 잘 들어.” 나를 빤히 바라보는 어린 소녀에게, 나는 말을 걸었다. “시간이 많이 없어. 귀담아들어야 해.”

소녀는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눈에는 두려워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말해줘요.”

이 애 마음에 드는데. 내 얼굴 근육이 움직이더니 미소라고 할 만한 표정을 만들었다. 대체 얼마 만에 웃어보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일단 이건 아니야.” 나는 소녀가 한 손에 든 화살을 가리켰다. 아이는 그걸 마치 창처럼 쥐고 있었다.

공허가 나를 내 가족에게서 갈라놓을 때, 나는 아직 어린아이었고 그래서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무지한 데다 제대로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제물이든, 공물이든, 희생양이든,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그것에는 어차피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신이 아니기에, 뭘 바친다거나 기도를 한다고 달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전 세계를 집어 삼키고 싶어 할 뿐이다.

“그걸 처치하고 싶니? 박살 내 버리고 싶어?” 내가 물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굶겨 죽여야 해.”

그러자 마치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하듯, 내 살갗을 파고드는 무수한 바늘 같은 감각이 더 심해졌다. 무시무시한 살기가 우리 주변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의 두 번째 피부가 된 겉껍질이 활시위를 당기듯 팽팽하게 죄어들었다. 내가 크게 숨을 들이켜는데, 놈들이 다가오는 기척이 선명해졌다.

발밑의 모래사장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잔주름이 잡혔고, 모래시계 속 모래알처럼 밑으로 가라앉았다. 으스스하게 고동치는 빛줄기가 뻗어 나가 하늘에 스며들었다. 공허 생명체들이 슈리마의 밤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로 울부짖으며, 역겨운 침을 줄줄 흘리면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어깨 주머니 안에 에너지를 충전했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가 풀었다.

열기와 고통이 환하게 피어나며 재빠르게 표적을 찾았고, 비처럼 쏟아져 내리며 생명체들을 막아섰다. 놈들은 바람을 만난 낙엽처럼 사방으로 내팽개쳐졌다. 신맛이 느껴지는 악취와 겉껍질이 녹아내리는 쉬이이익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이제 곧 저들의 흔적은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라. 나는 무수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가시기를 기다렸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내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거, 아픈가요?” 소녀는 낮게 물으며, 한 손을 뻗어 내 팔에서 은은한 빛을 내는 껍질을 만지려 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뺐다. 하지만 소녀는 전혀 주춤하지 않았다.

“뭐 가끔.” 나는 수긍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소녀가 사는 마을은 아직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오직 이 어린 소녀만이 호기심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소름 돋게 무서우면서도 상상력을 한껏 자극하는 환상적인 이야기와 동화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공허충 야수들이 나타나 사냥을 하고 더 많은 공허 생명체를 불러낸다는 민담을 확인하고 싶어서.

소녀는 전설을 직접 보고 싶었던 것이다. 저 바위산 너머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마을 어른들이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공경하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내 살갗이 다시 조여들기 시작했다. 무수한 바늘들, 끊임없이 쿡쿡 쑤시는 감각…

나는 눈을 깜박였다. “미안한데, 네 이름을 아직 못 들었구나.”

소녀는 자부심 넘치는 몸짓으로 어깨를 펴더니 화살을 휘둘렀다. “난 일리라고 해요. 우리 가족을 저 괴물에게서 지키려고 온 거예요.” 소녀는 고작해야 열 살 정도로 보였다.

“그래, 일리… 하지만 도망치는 게 최선일 때도 있어.”

“당신은 도망치지 않잖아요.” 소녀는 인상을 쓰며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 그런가요?”

아주 영리한 애야. “음, 더 이상은.” 나는 인정했다.

“그럼 나도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일리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게다가 용감하기까지 해.

하지만 이 애는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지 전혀 모른다. 마을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물을 바친다 어쩐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부 놈들에게 우리가 여기 있으니 먹어치워 달라고 알려주는 꼴일 뿐.

“일리, 네가 사람들한테 알려야 해. 어른들을 설득시키는 거야. 초승달이 뜰 무렵 춤을 추는 것도, 말뚝에 가축을 묶어놓고 공물로 바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말이야. 공허는 그렇게 제물을 바친다고 자비를 베풀지 않아. 삼켜버리거나 죽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야.”

내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던 날, 내게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 아마도 그래서 내가 지금껏 살아남은 것인지도 몰라.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죽어갔지만.

하지만 생존자는 생존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지. 이 세계로 돌아오는 길을 발견한 날부터 지금까지 그 대가를 치르고 있고…

“저기요.” 소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날 찾아서 이리로 오고 있어요.”

돌아볼 필요는 없었다. 사람들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마치 본능처럼, 공허의 껍질이 목을 타고 올라와 얼굴을 뒤덮기 시작했다. 일리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서워하지 마.” 하지만 내 목소리는 이미 기이하게 뒤틀려 있어서 말뜻과는 정반대로 들렸다.

“무서워해야 하나요?” 일리가 당돌하게 반문했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지만 일리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지금까지 내 이런 모습, 껍질인지 뭔지가 내 전신을 덮은 모습을 본 사람은 몇 명 없다. 그리고 그중 두 명을 빼고는 모두 죽었다.

일리의 마을 주민들은 꽤 능력 있는 사냥꾼들이겠지. 여기선 능력이 있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 이제야 일리가 이렇게 용감한 아이인 이유가 짐작이 갔다. 소녀를 찾아 나선 사람들이 쳐든 횃불이 밤의 어둠 속에서 너울거렸다.

“아빠!” 일리가 느닷없이 소리쳤다. “내가 찾았어요! 돌아온 소녀를 찾았다고요!”

마을 주민들이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손에는 갖가지 무기를 단단히 틀어쥐고, 눈에는 분노의 불길을 담은 채. “일리!” 아이의 아빠가 외치며, 화살 하나를 시위에 메웠다. “그… 그 괴물한테서 떨어져!”

아이는 아빠의 말에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기야 일리만 한 나이의 소녀라면 열에 아홉은 나를 보자마자 달아나 버렸겠지. 나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안다. 마을 토담에, 협곡의 바윗돌에, 사람들이 새겨 놓은 공포심을 읽었으니까.

괴물이 되어 돌아온 소녀를 조심하라.

하지만 저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사람들에게 나는 결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존재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막연한 어둠이 형체를 갖추고 돌아다니며 싸우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 이름을 입에 올리기를 그렇게 주저하는 것이겠지.

10년 전에는 나도 일리처럼 평범한 소녀였다. 밤하늘을 장식하는 수많은 별처럼 아름답고 다채로운 미래를 꿈꾸었다. 하지만 공허가 나를 집어삼킨 그 날, 그런 미래는 사라져 버렸다.

무수한 바늘로 찔리는 감각이 다시 돌아왔다. 내 양팔에서 음산한 빛을 뿜는 무기들이 생겨나는 바람에 일리는 내 손을 놓았다. “어서 가.” 내가 말했다. “아빠한테 가야지.”

“일리, 어서 도망쳐!” 소녀의 아버지가 애처롭게 외치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활시위를 당겼다.

“싫어요!” 일리가 소리를 지르며 내 쪽으로 돌아섰다. “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일리에게 그쪽으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아니야, 일리. 넌 전사의 자질을 타고났어. 저 사람들한텐 네가 필요해.”

일리는 몇 걸음 옮기다가 되돌아왔다. “사람들한테 뭐라고 말할까요?”

“사람들한테… 대비를 하라고 말해.”

공허는 내게서 너무나 많은 것을 앗아갔지만, 나는 내 전부를 빼앗기는 것만은 한사코 거부했다. 바로 이런 순간들, 다정함과 인간다운 애정이 빛을 발하고, 천진무구함과 신뢰가 공포심을 누르는 순간을 겪을 때마다, 내 마음에는 희망이 차오른다. 이 세계의 발밑에서 끝없이 흐르고 있는 치명적인 독의 물결을 우리가 막아낼 수 있다는 희망이.

처음으로 공허의 심연을 벗어날 수 있었던 날, 나는 그 일을 혼자서 해냈다.

저들도 언젠가는 그 일을 해낼 수 있으리라.

3. 괴물

파일:kaisa-monstrous-splash.jpg

만약 어디를 '어떻게' 봐야 할지 알고 있다면...

땅속에도 빛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빛이 없어도 볼 수 있었다.

내 눈은 오직 어둠만을 봐 왔지만, 지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채로웠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색들이 색조와 음영을 통해 괴물들을 막고 있는 벽을 드러냈다. 벽은 전혀 단단하지 않았다. 마치 연극 무대에 쳐 놓은 배경막처럼 얇았다.

이렇게 보이는 세상이 싫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적응하지 않았다면 난 오래전에 죽었을 것이다.

가끔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뒤에 있는 남자는 내가 보는 것을 보지 못한다. 사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게 거의 없을 것이다. 광원이라곤 희미하게 반짝이는 내 어깨 주머니뿐이었으니까.

그 정도 빛만 가지고 인간은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우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겁을 먹은 남자는 움직일 때마다 발을 헛디뎠다.

이곳 지하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지상에서 그는 사막 정착지의 지도자였다.

이자를 데려온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보여줘야 주민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나는 남자를 반쯤 업다시피 한 채로 끌고 갔다. 하지만 생체 갑옷 덕분에 힘들진 않았다.

갑옷은 내 피부 전체에 밀착되어 있었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바늘이 살 속에 파고든 듯했다. 울퉁불퉁하고 뻣뻣한 그 갑옷은 내 몸과 더 이상 구분하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웠던 적도 있다. 몸 전체를 감싸고 있는, 마치 고양이 혀 같은 그 느낌이 싫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갑옷이 몸 위로 번져나갈 때, 그것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고통과 고독으로 미쳐버리지 않으려고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게 내 목소리이길 바랐다.

발아래의 바닥은 부드럽고 매끄러웠다. 녹은 바위가 흐르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땅속 깊은 곳의 '존재들'이 마치 썩은 꿀열매 속을 헤집고 다니는 벌레처럼 위로 올라오면서 만든 길이었다.

이러한 현상과 그 '실체'를 보고 위쪽 사람들은 지하 세계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공허'.

하지만 공허라는 이름은 이 암흑세계의 '진짜' 위협과 공포를 담아내기엔 부족했다. 이곳에서 오래 살아온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땅 위로 올라가 살육을 일삼는 괴물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아래에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존재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누구도 한때 이케시아 왕국이 존재했던 이 지역에 가까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었다. 과거의 공포는 시간이 갈수록 무뎌졌고, 피와 고통으로 깨우친 교훈은 여행자들이 모닥불에 앉아 풀어 놓는 괴담이나 민간 신화로 전락했다. 그저 달빛 진주를 난로 위에 달고 나서스에게 가정의 안녕을 기원하거나, 굶주린 괴물들의 허기를 달래 줄 염소를 바깥에 매어 두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공허의 생명체들은 일반적인 포식자들과 달랐다.

어렸을 때, 크미로스 한 무리가 다친 스칼라시를 사냥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거대하지만 온순했던 그 동물이 죽는 걸 보고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크미로스를 미워하진 않았다. 먹기 위해 사냥하는 것은 동물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크미로스는 악하지 않았다. 그저 굶주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공허 태생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인다.

"부탁입니다."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렸을 때쯤, 남자가 애걸했다. "제발 날 좀 풀어 주시오."

이동을 멈추고 남자를 벽으로 강하게 밀치자, 그는 꼴사납게 훌쩍이기 시작했다.

내가 자신을 죽이리라 생각해서인지, 아니면 놓아 주리라 생각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 내 손의 칼날이 치명적인 보라색 빛을 내며 부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전환되며 남자의 몸속을 흐르는 피에서 빛나는 마력 줄기가 보였다.

남자가 숨을 헐떡이고 눈물을 흘릴 때마다 마력 줄기는 공중으로 퍼져갔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했지만, 공허 포식자들이 냄새를 맡고 마치 배설물에 이끌린 모래파리처럼 몰려들기에는 충분했다.

생체 갑옷이 남자를 먹어 치우길 원했다. 나는 움찔했다. 내 마음속에서도 같은 욕구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지상의 인간 모두가 그렇듯 남자는 나약했다. 어쩌면 지하의 괴물들에게 영혼이 '해체'되기 전에 내 빛의 칼날로 숨통을 끊는 것이 더 자비로운 일인지도 몰랐다.

'안 돼! 난 그들을 보호해야 해. 그래서 다시 돌아간 거잖아.'

나는 갑옷의 살인 충동을 억눌렀다. 그러자 뻣뻣해진 손가락에서 빛이 희미해졌다. 나는 몸서리치며 심호흡을 한 뒤, 주먹을 쥐었다.

시야도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내가 생각했던 장소가 아니었다.

우리는 예상보다 지면과 더 가까웠다. 따라서 눈앞의 광경이 나타내는 심각성은 더욱 컸다. 터널은 마치 지하 호수를 품은 동굴처럼 빛을 받아 일렁였다. 그 빛은 지상의 인간들이 전혀 알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그곳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의 가장자리였다. 마치 조안사의 모래 바다와 같이 두 세계의 경계는 밀고 밀리기를 반복했다. 어지러운 빛을 받아 빛나는 바다처럼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흐트러졌다가 새로워졌다. 그곳은 막대한 에너지를 품고 있어, 잠수한 레비아탄이 머무른다는 이야기 속 그곳처럼 가끔 기괴한 형태로 변했다.

이렇게 가까이 가는 것은 위험하지만, 남자는 이 광경을 꼭 '봐야' 했다.

영혼이 없는 검은 눈들이 합쳐지더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물질의 소용돌이가 흉측한 모습을 갖추었다.

구부러진 척추가 펼쳐지고 탐욕스러운 팔다리가 길게 늘어나더니 갈고리발톱이 액체 속에서 만들어졌다. 반투명한 육체를 지닌 괴물들이 광기 어린 진화를 거친 후 날카로운 괴성을 질렀다.

'놈들이 왔다...'

"눈을 떠."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갑옷의 마스크 때문에 목소리가 왜곡되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았다. 남자는 못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마치 목구멍에 뭔가 엉긴 듯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시 생각한 뒤 갑각 투구를 뒤로 젖혔다. 투구는 마치 곤충이 등딱지 안으로 날개를 접듯 접혀 들어갔다.

"눈을 떠." 다시 말하자 남자가 알아들었다.

인간의 얼굴을 한 나를 보고 남자는 두려움에 비명을 질렀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일까?

예전과 많이 다를까? 공허에 더 '어울리는' 존재처럼 보일까?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확인한 건 오래전 일이었다. 아직 기억 속 모습 그대로이면 좋겠는데.

빛이 차오르자 남자는 고개를 돌려 심연을 바라봤다.심연 속 생명체들이 떼를 지어 위로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마침내 내 의도를 알아차린 남자는 공포에 사로잡혀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의 중심과 그 너머까지 뻗어 있는 광기의 바다에서 올라온 수천 마리의 괴물들이 그곳에서 떨고 있었다. 진짜 정체가 뭔지, 어디에서 온 것인지는 나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세상을 파괴하려는 끝없는 충동을 지닌 이 괴물들이 지상으로 올라가면 끔찍한 악몽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이었다.

괴물들이 기세를 더하고 있는 지금, 악몽을 막을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몸을 숙이며 물었다. "저놈들이 보이나? 무슨 상황인지 '이해'돼?"

겁에 질린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놓아주었다.
나는 지상의 빛을 향해 기어오르는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바위를 긁는 발톱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팔이 심연의 가장자리에 걸쳐 있었다. 그 뒤로 삐걱거리는 갑옷과 돌출된 뼈, 죽음의 빛을 내는 살점을 지닌 끔찍한 괴물이 기어 올라왔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여전히 축축하고 번들거렸지만, 상체 갑각에 달린 검은 눈에서는 무한한 악의가 느껴졌고 해쓱한 배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팔다리가 달려 있었다. 입술이 없는 입에는 하얗게 빛나는 송곳니가 나 있었고 그 사이로 체액이 흘러내렸다.

곧이어 다른 괴물들이 올라왔다. 크기는 작았지만, 사납기는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존재만으로도 공기를 뒤틀리게 했으며, 발톱 아래의 땅은 검은 연기를 내며 녹아내렸다.

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끔찍한 악취가 진동했다. 나는 몸에 열기가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위협을 감지한 팔다리에서 힘이 차올랐다.

예전에는 이런 충동을 애써 떨쳐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가 죽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힘 때문이었다.

갑각 투구가 내려와 내 얼굴을 가렸다. 시야도 다시 전환되었다.

한때는 이 변신 과정이 불편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반가웠다.

나는 빛을 통해 사냥감의 약점을 파악했다. 나는 다시 포식자가 되었다.

어깨에 붙은 갑옷의 형태가 바뀌었고, 주머니가 열리며 눈부신 빛을 드러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괴물들을 향해 작열하는 미사일을 연사했다.

몸집이 작은 괴물들이 보라색 체액을 내뿜으며 폭발했다.

내 몸에 놈들의 액체가 튀자 곡선형의 갑옷이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흡수된 피는 영양분이 되겠지만, 나는 역겨움에 속이 뒤틀렸다.

나는 팔을 뻗으며 앞으로 달려가 빛의 칼날을 손에 장착한 후, 터널 벽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거대한 괴물을 향해 보랏빛 불꽃을 발사하자 괴물의 몸이 산산이 부서지며 시커먼 체액이 쏟아져나왔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기이하게 뒤틀린 팔을 휘둘렀다.

나는 착지해 몸을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쪼그려 앉은 채 또다시 미사일을 발사했다. 미사일은 맹렬한 빛을 내며 괴물의 살을 불태웠다. 동족이 만들어낸 불꽃보다 공허 생명체에게 더 치명적인 것은 없었다.

괴물이 쓰러지려 하자 나는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직 죽은 건 아니었다. 공허 태생에게 '죽음'은 그 의미가 달랐다.

놈은 팔다리를 통해 작은 괴물들의 피와 정수를 빨아들였다. 마치 찢어진 담요를 꿰매듯이, 빛줄기와 꿈틀거리는 물질이 놈의 살을 다시 기워 붙였다. 거대한 몸통은 경련을 일으키며 상처를 아물게 하고 약점은 더욱 보강하며 새로운 팔다리를 만들어냈다. 갈라진 살 사이로는 작열하는 검은 광선이 솟아 나와 마치 채찍처럼 지면을 때렸다.

딱딱한 돌바닥이 마치 밀랍처럼 녹아내렸다. 그때 광선 줄기 하나가 무릎을 스치자 나는 비틀거렸다. 갑옷의 일부가 검은 연기로 변하며 사라졌다.

나는 갑옷 안에 숨겨져 있던 살갗을 보았다. 마치 바위 아래로 숨는 사막의 파충류처럼 내 피부에서는 생명력이나 활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왠지 속이 메스꺼웠다. 죽어버린 듯한 내 피부를 봐서인지, 아니면 예전 내 모습이 떠올라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탓에 몸놀림이 둔해졌다.

비록 찰나였지만, 공허충과 사냥꾼들이 몰려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 몸집의 두 배나 되는 괴물이 발아래에서 나를 집어삼켰다. 발톱이 가슴팍을 할퀴었고, 머리 위로 이빨이 닫히며 내 투구에 구멍을 냈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요동치는 목구멍에는 이빨이 빽빽이 솟아나 있었고, 괴물의 혀는 들어갈 구멍을 찾고 있었다.

나는 괴물의 몸에 주먹을 박아 넣고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러자 괴물의 몸이 폭발했고 살아 있는 갑옷은 그 에너지를 흡수했다.

발톱과 이빨이 내 쪽으로 날아들었다. 나는 옆으로 굴러 공격을 피하며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계속 발사했다. 하지만 심연 속에서 끝없이 괴물이 쏟아져나왔다. 놈들이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다.

갑각과 발톱으로 무장한 적들이 맹렬한 기세로 몰려들었다.

어깨 주머니에서 강렬한 불꽃이 분출됐지만, 적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공허에 증오라는 감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들은 나를 적잖이 싫어하는 것 같았다. 놈들은 나를 같은 공허 태생으로 여기면서도 동시에 처치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지상의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까?

나는 괴물들에 둘러싸인 채, 과거 크미로스가 스칼라시를 사냥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하지만 나는 먹잇감이 아니었다. 내게는 맞서 싸울 힘이 있었다.

나는 발뒤축으로 회전하며 불타는 주먹을 휘둘러 내 주변에 보랏빛 불꽃으로 고리를 만들었다.

불꽃의 위력에 괴물들이 물러서자 여유가 생겼다. 나는 탈출 경로를 확인한 후 적들 사이를 헤집으며 이동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즐비했다. 나는 초자연적인 속도로 움직이며, 망연자실한 듯 어슬렁거리는 괴물들을 불꽃과 검으로 해치웠다.

그리고 포위에서 벗어났다.

나는 뒤돌아서 심연으로부터 멀어졌다.

놈들과 거리를 유지하되 아예 멀어지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잊어버렸다.

어둠 속에 있을 때는 종종 그렇게 된다.

가끔 태양의 모양이나 그림자로 시간을 알아내는 법을 잊어버릴 때도 있었다.

뜨거운 사막 지대 출신으로서 태양을 잊어버릴 때면 나는 울고 싶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 하늘에 떠 있는 황금색 눈, 숨 쉴 때마다 가슴에 차오르던 기쁨의 열기는 아직 기억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 기억들은 나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직접 알고 느낀 게 아니라 마치 누군가 말해준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을 밀어냈다.

기억에 정신이 팔리면 둔해진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나는 작은 소녀였다. 그 아이는 옛 기억을 들추고, 예전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심연의 괴물들은 여전히 나를 쫓고 있었다. 놈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톱을 세운 채, 터널을 가득 메웠다. 나는 남자를 놓아준 곳과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더 깊은 사막으로, 놈들이 탄생한 잊혀진 땅을 향해 이동했다.

전부터 수없이 해왔던 일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나는 포위되지 않도록 싸우다 도망치기를 반복했다.

마치 춤과 같았다.절대 끝나지 않는 춤.

괴물들은 명백히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죽여도 줄어들지 않았다.

놈들의 수가 무한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생각에 사로잡혔다간 내 의지가 꺾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직 지상에 소중한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계속 싸워야 했다.

태양처럼, 그들의 이름과 얼굴이 점점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여전히 위에 있었다. 나는 하늘이 어땠는지 잊어버렸거나 악의로 가득 찬 공기가 지겨워졌을 때 가끔 지상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올라갔던 건 오래전 일이었다. 지상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수록, 그 공기는 내게 점점 뜨겁게 느껴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나를 지상 세계가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인지 두려웠다.

위에서 만난 한 소녀가 생각났다.

예전의 내 모습 같았던 어린 그 소녀는 날 싫어하지 않았다. 나를 보고도 겁에 질려 도망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변하기 전의 내 모습을 그 소녀는 보았다.

내 갑옷을 본 사람들은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파괴 본능을 느꼈다.

어쩔 수 없었다. 난 그들을 원망하진 않았지만, 마음이 아팠다.

과거의 나는 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나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존재로 변하여 혐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어도 여전히 인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작은 소녀였던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면 내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을 뭔가 고귀한 것으로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도 점차 내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그 소녀마저도 잊어버리면 난 어떻게 될까?
공허 생명체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놈들의 목적이 바뀌었다는 것을 난 즉시 느낄 수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를 향한 추격이 시들해졌다. 마치 내게 관심이 없어진 듯했다.

놈들의 파괴 본능을 충족시킬 더 나은 표적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괴물들에게서 벗어났다.

갑옷의 힘으로 놈들보다 빠르게 구부러진 비밀 통로를 통해 터널을 돌았다. 계속 움직이면서 추격의 강도가 약해진 것을 확인한 후, 긴장으로 가득한 지상 세계로 올라갔다.

나는 그동안 지상의 정착지에서 먼 곳으로 괴물들을 유인했다. 하지만 뾰족한 바위탑의 숨겨진 틈으로 빠져나와 햇빛을 받는 순간, 내 생각이 얼마나 틀렸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내가 괴물들을 유인했다고 정말 믿고 있었다.

바위탑 꼭대기에는 거대한 머리뼈가 표지판처럼 놓여 있었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나타내는 경고였다.

확실했다. 내가 놓아둔 것이기 때문에 잘 알았다.

나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사람들로 가득한 정착지를 내려다봤다.

제대로 보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투구를 벗었다.

아래에는 햇볕에 말린 벽돌로 정교하게 지은 건물 사이로 정돈된 거리가 뻗어 있었다. 정착지 남쪽 끝에는 비단 차양으로 덮인 북적이는 시장과 신전인 듯한 건물 지붕에 달린 황금색 원판이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바위탑까지 들려왔다.

구운 고기와 가축의 분뇨, 자극적인 향신료의 냄새도 맡을 수 있었다.

지상 세계의 '삶'이자 일상의 냄새였다.

잠깐이지만 나는 반쯤 잊어버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아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모래 속에 도사리고 있는 존재가 떠올랐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졌다.

심장이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졌다.

이들은 자신들이 처한 위험을 알고 있을까?

갑옷의 안쪽 면이 몸을 강하게 옥죄자, 나는 고통을 느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갑옷은 굶주려 있었다. 나 자신과 갑옷, 어느 쪽이 내 행동을 더 많이 결정하는지 나는 궁금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워 공허의 존재들을 탐색했다.

놈들은 아주 가까운 사막 아래에서 지면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놈들의 공격이 임박한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다시 투구를 쓰고 시야를 전환해 빛과 열의 형태를 확인했다.

정착지 쪽을 바라보자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나는 정착지 끝의 연병장으로 눈을 돌렸다. 남녀 가릴 것 없이 수십 명의 사람이 무장한 채 정렬해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채로 그들을 바라보다 비로소 깨달았다.

그들은 전투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뜨거운 용기를 불어넣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진 못했지만, 그 남자의 얼굴은 마치 눈앞에 있는 듯 뚜렷했다.

그는 내가 지하에 데려갔던 그 지도자였다.
나는 바위 사이를 뛰어내리며 정착지 쪽으로 내려갔다.

근처에 공허 생명체가 있어서인지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머지않아 이곳에 들이닥칠 기세였다.

우리 안으로 뛰어들자 내 냄새를 맡은 가축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처음엔 날 알아보지 못했지만, 곧 갑옷과 결합된 내 몸을 보고 하나둘씩 비명을 질렀다.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끼며 지도자에게 곧장 달려갔다.

내가 보여줬는데! '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지?' 지하 괴물들을 보고 느낀 공포를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해 줬어야지!

하지만 결국 나는 그의 저항 의지를 북돋운 꼴밖에 되지 않았다.

여기서 누군가 죽는다면 전부 내 잘못이자 내 책임이었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고 싶었지만, 결국 나 때문에 이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사람들은 무기를 쥐고도 내 모습에 겁에 질려 흩어졌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전의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지금 증오로 변해 있었다.

이자는 내가 자신을 죽이러 온 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투구를 벗고 남자 앞에 섰다.

"왜 아직 여기에 있지?" 난 소리를 질렀다. 뜨거운 사막 공기와 정착지 아래에 있는 공허 생명체의 냄새가 느껴졌다. 마치 구리 동전을 입에 넣은 느낌이었다. "어서 가!"

"꺼져라, 이 악마!" 남자가 소리쳤다. "너는 재앙의 전조일 뿐이야!"

나는 잠시 후에야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괴물들을... '불러온다고' 생각해?"

"네 정체는 잘 알고 있다." 남자는 내게 다가서며 말했다. "너는 공허의 딸이야. 네가 어딜 가든 괴물들이 뒤따르지."

난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말을 부인하려는 순간...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를 가든 항상 공허 태생의 생명체들과 마주하고 싸웠으니까.

나는 손을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처럼 가는 보라색 광선이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이 힘을 내 몸의 일부로 보았다. '내'가 이 '능력'을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처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다면? 나는 곧바로 확인했다. 빛줄기가 내 의지대로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사실일까? 공허의 생명체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일까?

아니,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다. 내가 놈들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면 '분명' 알아차렸을 것이다.

내 마음속 의문은 분노로 변했다. 손에 달린 빛의 칼날이 번득였다.

"난 이미 너를 한 번 따돌렸다." 남자가 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제 네가 이끄는 괴물들과 맞서 싸우겠다."

"날 따돌렸다고?" 기가 막혔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남자는 칼을 휘둘렀지만,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다. 검술이 뛰어나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손쉽게 공격을 피했다. 남자가 계속해서 칼을 휘두르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이 몰려들어 나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남자의 공격과 주민들의 적대심에 살아 있는 갑옷이 반응하기 시작했고, 내 몸에서는 전투 본능과 '살인 충동'이 끓어올랐다.

사람들은 내 두 번째 피부를 보고도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위험한 건 공허가 아니라, 바로 '나'였다.

이들은 갑옷 밑에 숨어 있는 소녀를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으려 했다.

이들에게 괴물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믿는 게 더 편했다.

분노와 배신감으로 인해 내 가슴은 냉담해졌다. 왜 이들을 구해야 할까? 상실감 때문에 상처가 될 뿐인데, 왜 인간성을 지키려고 싸워야 할까?

그냥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괴물이 되어 버릴까?

그러는 편이 더 쉽지 않을까?

그때 나는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 직접 지은 집 문간에서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들,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수많은 사랑과 작은 친절이 이 세상에 있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괴물들과 싸우는 이유였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이들을 대신해서 싸웠다. 나처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 할 수 있을까?

그저 방관한다면, 내 안에 남은 소녀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다. 난 이미 수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이번 역시 내가 나서야 했다. 비록 피를 흘리는 건 내가 아니겠지만, 그 짐은 내 몫이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모두가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주민들이 의지하는 사람이자, 이들이 정착지에 머무르도록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이기거나 타협할 수 없고, 살육과 함께 더욱 강해지는 적과 싸우도록 용기를 불어넣는 존재였다.

주민들의 몰살을 막으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나는 남자의 어설픈 공격을 쳐낸 뒤, 안으로 파고들어 손에 달린 빛의 검을 휘둘렀다.

작열하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가자 남자의 혈관과 신경, 뼈가 눈부시게 빛나더니 곧 큰 폭발이 일어났다.

마음이 아팠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속이 뒤틀릴 정도로 공허의 습격이 임박해 있었다. 공기의 질감도 급격하게 바뀌었다. 공허 괴물들이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는 뜻이었다.

놈들은 이곳을 향하고 있었다.

모랫바닥 위로 남자의 시체가 떨어졌다. 나는 겁에 질려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서 어깨 주머니에 광선을 충전했다. 그대로 발사하고 싶은 충동이 마음속에서 들끓었다.

나는 나선형의 광선을 발사해 버려진 곡물 저장고를 박살 냈다. 씨앗과 바구니들이 불붙은 채 쏟아져 내렸다. 곧이어 시장에 불꽃을 발사하자 비단 차양이 사막 쾌속선의 돛처럼 불타올랐다.

밝은 보라색 불길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정착지의 집들을 파괴하자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그들은 나를 끔찍한 괴물로 보았다.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투시경으로 확인한 후, 사람이 없는 건물만 파괴했다.

사람이 없는 장벽과 방어벽 등, 공허와 맞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을 줄 만한 구조물은 모조리 무너트렸다.

난 그들을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 그저 '도망치길' 바랐다.
바위탑에서 불타는 정착지를 내려다보는 사이 밤이 찾아왔다. 나는 경고의 표시로 놔둔 머리뼈에 한쪽 발을 올리고 있었다. 공허 태생의 괴물 무리가 송곳니를 드러낸 채 기이한 모양의 팔다리를 휘저으며 아래에서 기어 올라왔다.

그 소리는 마치 추수철 곡식을 휩쓰는 곤충 떼 같았다.

수를 세기는커녕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이빨과 발톱이 큰 덩어리가 되어 걷잡을 수 없는 파괴력을 내뿜었다.

놈들은 내 위치를 감지했지만, 난 도망치지 않았다.

적어도 놈들이 나를 쫓는 동안 정착지 주민들은 안전할 테니까.

지평선 위로 소름 끼치는 불빛이 일렁였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밝은 보라색 광선이 사막 깊숙한 곳에서 갈라지며 솟아났다.

정착지 주민들은 이미 도망간 뒤였다. 그들은 가축이 묶인 형형색색의 수레에 필요한 살림을 싣고 떠났다. 고대의 도르문 기수처럼 길게 줄지어서 서쪽으로 멀리 벗어났다.

그들은 새로운 강을 찾아 다시 정착할 때까지 모랫길을 따라 이동할 것이다.

내가 바라던 대로 됐다. 다시 정착하려면, 우선 '살아 있어야' 했다.

집을 떠나던 주민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바위탑 위에 있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저주했다. 공포와 증오가 가득했던 그 표정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들은 계속 날 증오하며, 괴물이 되어 버린 버림받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위대한 지도자를 죽이고 마을을 파괴한 그 날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슈리마 제국의 전설처럼 내 이야기는 점점 과장되어,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죽인 무정한 살인마로 둔갑될 것이다.

선두의 괴물들이 절벽 위로 올라왔다. 나는 갑각 투구로 얼굴을 덮고 손에서 보랏빛 불꽃을 발사했다. 그리고 몸이 점점 뜨거워지며 익숙한 흥분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난 상관없었다.

그런 짐이라면 기꺼이 질 수 있다.

'내가 그들의 괴물이 되면 된다.'

4. 틈으로 엮인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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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 입구에서 밖을 내다보는 카이사는 마치 세상의 끝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거대한 틈은 어찌나 깊은지 바닥에 햇빛이 닿지도 않았다. 다른 수십 개의 터널 입구가 틈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지면 아래 깊숙한 곳에 있는 바위가 파여 생긴 것으로 이제는 모습이 드러나 바스러지는 중이었다.

한때 어마어마한 공허 생명체 군단의 집이었던 곳이다. 이 터널들은 무작위로 파괴되어 형성된 공허 생명체의 굴이었다. 급하게 꺾이는 모서리, 막다른 길, 빙빙 똬리를 튼 굴은 모두 세상을 먹어 치우겠다는 일념으로 계획 없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공허였다. 아무 생각 없이 현재만을 살아가며 싸우고 먹어 치우고 파괴하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같은 유기체. 수없이 많은 공허 생명체를 죽인 카이사는 그게 전부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카이사가 서 있는 터널은 달랐다. 무작위로 파괴된 게 아니었다. 카이사는 사실상 북쪽으로 쭉 뚫린 직선이나 다름없는 길을 나흘 가까이 따라왔다. 이 터널, 이 '통로'는 어떠한 의도와 목표를 지니고 만든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상황을 파악하려면 이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 이 거대한 틈을 맞닥뜨렸다.

카이사는 반대편에 난 구멍들에 시선을 주었다. 얼마나 깊은지 확인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저 중 하나가 지금 자신이 서 있는 통로와 이어진다는 데 두 번째 피부를 걸 수도 있었다.

카이사는 어깨를 돌렸다. 생체 갑옷이 깨어나며 카이사의 몸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며 카이사의 곁을 지킨 유일한 것이었다. 카이사의 가족과 마을을 죽인 공허충 야수 중 하나였다. 그 껍질로 뒤덮인 카이사는 언제나 괴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게 없으면 공허로부터 세상을 지킬 수 없었다.

이게 없으면 카이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카이사가 첫 번째 표적을 선택하는 것과 동시에 어깨에 있는 비늘 주머니가 움직이며 그 안에 박힌 수정이 빛났다. 수정의 열기에서 플라스마 미사일이 생겨났다. 카이사는 그 미사일을 지면 아래 깊은 곳에 있는 한 터널 입구로 발사했다. 미사일이 틈을 건너는 데만 6초가 걸렸다. '정말 거대하군.' 잠시 후 미사일이 모퉁이에 맞았다. '아니야.' 카이사가 찾는 통로는 아니었다.

이후로는 조준하고 쏘는 일의 반복이었다. 미사일은 대부분은 입구에 들어간 후 1, 2초가 지나면 벽에 맞았다. 하지만 카이사는 인내심을 빼면 시체였다. 얼마가 걸리든 해낼 작정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카이사가 찾던 터널이 발견되었다. 카이사는 미사일이 틈을 넘어가자 시간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저거다. 저게 이 통로와 이어진 곳이야.'

카이사는 씩 웃으며 터널 입구 주위에 미사일을 연사해 표식을 남겼다. 아까 쏜 미사일은 아직도 날아가고 있었다. 그때 뭔가 미사일에 맞고 끔찍한 괴성을 질렀다.

어깨 주머니를 안쪽으로 돌려 빛이 새어 나오지 않게 누른 카이사는 조용히 사냥감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또다시 귀에 거슬리는 괴성이 들렸다. 반대편 통로에서 공허충 생명체가 나타났다. 카이사는 수년간 싸우며 다양한 공허충을 목격했다. 저건 처음 보는 종류였다. 미사일에 맞아 다친 공허충이 긴 아래턱을 벌리자 둥글고 매끄러운 몸체가 변형되었다. 입 안을 가득 채운 바늘 모양의 반투명한 이빨이 위험한 각도로 돌출되어 있었다. 공허충의 옆구리가 수축하고 팽창했다. 마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아니면 냄새를 맡는 걸지도.' 카이사는 생명체가 몸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눈이 없어도 날 찾을 수 있어.' 카이사는 공허충을 조준했다. 수평선 밑으로 해가 가라앉았다. 공허충은... 빛나기 시작했다. 공허충의 입에서 혀 같은 게 나오더니 부드럽고 푸르스름한 빛을 냈다. 마치 광산에 걸어 놓는 등불 같았다. '저런 공허충은 처음 봐.' 카이사는 공허충의 상처에서도 빛이 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등불이라고 불러야겠군.' 카이사는 미사일을 날렸다. 등불이 자세를 바꾸더니 날카로운 소리를 길게 내지르며 카이사의 공격을 피했다. '젠장.' 카이사는 다시 미사일을 날릴 준비를 했다.

등불 뒤쪽에 있는 터널이 온통 푸른빛으로 빛났다. 입을 열고 빛나는 혀를 들어 올린 수백 마리의 등불이 선두에 있던 등불과 합류했다. 카이사는 천천히 호흡했다. 지금보다 더 안 좋은 상황도 있었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군. 잘됐어.' 카이사는 한 방에 모든 공허충이 쓰러지길 바라며 미사일을 퍼부었다.

미사일이 건너가는 동안 모래처럼 쏟아져 나온 공허충들이 거대한 틈의 벽에 달라붙었다. 미사일은 아무런 해를 주지 못하고 지나갔다.

'저게...'

공허충들은 다친 등불의 주도하에 하나처럼 움직이며 카이사를 향해 다가왔다.

'...뭐야?'

카이사는 양손을 들고 공허충 무리를 향해 미사일을 빠르게 발사했다. 몇 마리에 명중했지만 수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거리는 이미 사 분의 일 정도 좁혀진 상태였다. 카이사는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현재 위치에서 싸운다. 뒤쪽 통로로 달아난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아래로 뛰어든다. 지면으로 기어 올라가서 싸운다.

카이사는 위를 힐끗한 후 공허충 무리를 바라봤다. 거리는 절반으로 좁혀졌다. '올라가자.' 바위에 지그재그로 네 번 미사일을 쏜 카이사는 각 자리를 손으로 잡고 발을 디뎌 균형을 잡았다. 그리고 몸을 당겨 절벽을 오르기 시작했다.

쏘고 잡고 당기고. 쏘고 잡고 당기고. 카이사는 최대한 빨리 나아갔다. 카이사의 어깨 주머니가 무리를 향해 미사일을 쐈다. 거리가 가까웠지만 카이사의 속도는 빨랐다. 벌써 절반 가까이—

그때 카이사의 손이 모래에 닿았다.

카이사는 다시 미사일을 쐈다. 미사일이 꿰뚫을 만한 곳이 없었다. 미사일이 적중한 자리에는 더 많은 모래가 흘러내려 빈 공간을 채울 뿐이었다. 잡을 곳이 없었다. 지면까지 점프할 수 있을까? 이를 악문 카이사는 괴물들을 돌아봤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최대한 많은 수를 끌고 갈 생각이었다.

그때 공허충 주변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벽은 결국 바스러졌다.

수백 마리의 등불이 돌과 함께 떨어지자 거대한 틈의 어둠이 등불의 빛을 삼켰다. 카이사를 쫓는 남은 등불은 세 마리뿐이었다. 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었다. 거리는 등불의 혀에 돋은 가시가 보일 정도로 가까웠다.

미사일 세 발이 발사됐다. 등불 두 마리가 떨어졌다. 남은 것은 한 마리였다.

등불이 가시 돋은 혀를 휘둘러 카이사의 갈비뼈를 쳤다. 카이사의 몸이 바위에 충돌하며 갑옷 밑 갈비뼈에 금이 갔다. 카이사는 갑옷이 회복되는 동안 숨을 쉬려고 애썼다. 왼손으로는 벽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등불의 혀에 돋은 가시 바로 밑을 잡았다. 보랏빛 힘이 밀려들었다. 카이사의 손에 붙들린 등불의 혀가 녹아내렸다. 등불은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카이사는 등불을 조준했다.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았다.

'좋아.' 카이사가 숨을 쉬었다. '좋아. 이제 다음 단계야.' 지면까지 올라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모래에서 네모난 돌이 튀어나와 있는 게 보였다.

'아까는 없었는데.' 카이사는 손을 뻗어 돌을 잡았다. 딱 잡기 좋은 크기였다. 무게를 살짝 실어 보았다. 끄떡없었다. 의아해진 카이사는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 위를 올려다봤다. 팔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간격으로 네모난 돌이 줄줄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행운의 정체가 무엇이든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카이사는 한 번에 하나씩 돌을 잡으며 빠른 속도로 올라가 밖으로 나왔다. 달빛에 비친 주변에는 모래 언덕과 암벽만 보일 뿐 눈에 띄는 지형지물이 없었다. 멀리서 모래 폭풍이 일었다. 카이사는 거대한 틈을 내려다봤다. 눈을 가늘게 뜨면 희미한 빛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바람이 거세졌다. '폭풍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어.' 카이사는 몸을 돌려 폭풍을 마주 봤다. 폭풍 한가운데에는...

'여자아이?'

발밑에서 땅이 폭발했다. 카이사는 금이 간 갈비뼈를 팔로 감싸며 폭풍을 향해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공중에서 자세를 바꾼 카이사의 어깨 주머니가 카이사 앞에서 공성퇴처럼 접혔다. 공격한 자가 카이사를 유인하려고 했다면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무엇인가 카이사의 어깨 주머니와 손목을 칭칭 감더니 카이사를 끌어 내려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갈비뼈가 불타는 것 같았다. 땅과 부딪힌 머리 부분의 투구에는 금이 갔다.

자리에서 일어선 카이사는 묶인 손목을 힘주어 떼어 냈다. 돌이 달린 붉은 스카프가 떨어져 나갔다. 카이사는 거친 고함을 지르며 양손에 불을 붙였다.

그러다 소녀의 얼굴에 떠오른 놀란 표정과 공포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누군가 자신을 괴물처럼 바라보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카이사.' 카이사는 다시 손을 들어 올리며 공격할 준비를 했다.

"혹시 '인간'이야?"

카이사는 자신이 투구의 금이 간 부분을 통해 소녀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내가... 보여?" '그건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들은 카이사가 인간이라는 걸 알든 모르든 항상 카이사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소녀의 표정은 카이사에게 어리석은 희망을 주었다. 이번에는 다를지도 몰랐다. 카이사는 조심스레 머리에서 투구를 벗으며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드러냈다.

소녀는 무릎을 털썩 꿇었다. 카이사의 숨이 턱 막혔다. 소녀가 입을 열었다. "정말 미안해. 나는 네가—"

"괴물인 줄 알았다고?"

"응." 소녀가 거대한 틈을 가리켰다. "사람들은 이렇게 붕괴된 곳에서 오래 살아남지 못하거든." 소녀는 카이사의 두 번째 피부를 빤히 바라봤다. "그런데... 인간처럼 보이지 않더라고. 처음에는 말이야."

소녀는 카이사가 생각했던 것만큼 어리지 않았다. 카이사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더 많아 보였다. 카이사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스카프가 돌이 달린 끝자락부터 떠오르는 모습을 바라봤다. "돌이군." 카이사가 조용히 말했다. "돌을 조종하는구나." 스카프가 마법처럼 날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소녀의 목을 감쌌다. "모래에서 튀어나온 네모난 돌도 네가 만든 거고."

소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누군가 밑에서 그 괴물들이랑 있는 게 느껴져서 도우려고 했지." 소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몇 주 동안이나. 몇 달인가? 얼마나 됐는지 기억도 안 나네."

카이사가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눈이 따가웠다. '나 말고도 공허와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니.' 카이사는 깨달았다. '나랑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넌 누구지?"

미소가 돌아왔다. "내 이름은 탈리야야."


탈리야의 야영지에 들어서자 춤추는 불빛이 두 사람을 반겼지만 카이사의 주의를 끈 것은 고기를 굽는 냄새였다. 카이사는 탈리야가 먼저 가서 다른 이들에게 괴물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 굶주리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먹어 치우려고 드는 생체 갑옷을 입고 있으니 다들 두려워하는 게 당연했다.

천 조각과 단단한 석판을 꿰맞춰 만든 천막은 탈리야의 작품 같았다. 서른에서 마흔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야영지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 아이와 노인이었다.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움츠린 채 카이사를 바라봤다. 지독하게 익숙한 시선이었다.

'공포다.' 카이사는 누구와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이건 저들을 위해서야.' 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탈리야는 두 팔을 크게 벌리고 카이사를 소개하며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 극적으로 이야기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이는 것은 깜빡이는 불꽃뿐이었다. 탈리야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고요와 정적만이 흘렀다.

"꼭 머물 생각은 없어." 카이사가 중얼거렸다.

탈리야는 고개를 저었다. "다쳤잖아. 먹지도 쉬지도 않은 상태로 그냥 보낼 순 없어. 그건 안 되지."

키가 탈리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아이가 일어섰다. 어깨에 붉은 천을 두른 남자아이였다. "정말 인간 맞아?"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위장 같은 걸지도 모르잖아." 아이는 좀 더 나이가 많은 여자아이 둘이 힘을 주어 끌어 앉히는 바람에 뒤로 자빠질 뻔했다.

탈리야가 웃음을 터뜨리며 응수했다. "공허 괴물이 웃는 것도 봤니, 사미르? 난 못 봤거든."

다들 기대에 찬 표정으로 카이사를 바라봤다. 카이사는 최선을 다해 미소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지나쳐 보이지 않게 입은 다물었다. 아이들이 겁먹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성공이었다.

사미르라는 남자아이가 다시 일어섰다. "좋아." 카이사 쪽으로 걸어온 사미르는 반쯤 먹은 고기가 꽂힌 꼬챙이를 내밀었다. "내 모래뱀 꼬치 줄까?"

카이사가 음식을 받아 들자 다들 한숨이 놓인 듯했다. 카이사는 꼬챙이에 꽂힌 고기를 물어뜯은 후 씹지도 않고 삼켰다. 갑옷이 만족한 듯 그르렁거렸다. 사미르를 끌어 앉힌 여자아이 중 머리카락을 구슬로 장식한 자이파라는 아이가 음식을 더 내밀었다. 이번에 카이사는 천천히 씹으며 계피, 시큼한 레몬, 연기 냄새가 밴 울타와트 열매의 맛을 음미했다.

옛 기억이 떠오르는 맛이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아버지가 화로 위에서 요리하는 동안 어머니는 절굿공이로 울타와트를 빻곤 했다.

카이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몰아냈다. 과거를 곱씹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나머지는 굳이 먹을 필요가 없었다. 배는 충분히 차서 벌써 갈비뼈가 회복되는 중이었다.

야영지에는 어느새 긴장이 풀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식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카이사에게 등을 돌린 사람도 있었다. 신뢰의 표시였다. 희망으로 빛나는 탈리야의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발 머물러 줘. 벌써 가지 마.'

카이사는 고집을 꺾었다. "잠깐 머물게. 몸이 나을 때까지만."

통로는 내일도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카이사는 밤새도록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다들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의 집이 어떻게 모래 속으로 떨어졌는지, 부모와 형제가 얼마나 보고 싶은지 얘기하며 곧 다시 만날 날을 기대했다.

'그들은 죽었어. 우리 가족이 그랬던 것처럼, 공허에 의해서.' 카이사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어떤 노인들은 태양의 축복을 받은 초월체 전사 이야기를 했다. 다른 이들은 마지막 황제의 이야기와 그가 죽자 발생한 혼돈에 대해 말했다. 자이파는 초월체를 타락시켜 광기와 악으로 몰고 간 어둠에 대해 얘기했다. 그중 믿을 만한 내용은 없었지만 카이사는 열심히 들었다.

돌로 된 팔 보호대를 찬 큰 여자아이, 카디라가 해 준 이야기는 제일 말이 안 됐다. 카디라는 사이 칼리크 너머에 있는 졸란이라는 곳이 천 년 동안 마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했다. "낙원이라고 하더라." 카디라가 한숨을 쉬었다. "도서관이랑 정원이 있고, 눈으로 좇을 수 없는 곳까지 물이 흐른대. 다들 두려움 없이 안전하게 살고 말이야."

카이사는 카디라와 아이들의 시선을 느끼고 자신이 코웃음을 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공허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어. 사이 칼리크와 그렇게 가까운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그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야."

카디라가 우겼다. "진짜야.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른 말 없이 일어선 카이사는 계속해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자리를 떠났다.

천막에 몸을 기댄 채 자이파, 사미르와 정신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탈리야가 보였다. 불빛보다 달빛이 환한 곳이었다. 자이파가 펼쳐진 두루마리를 따라 쭉 손가락을 그었다.

"정말 그 졸란이라는 곳을 찾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카이사의 말은 질문이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믿고 사이 칼리크를 건너는 건 너무 위험해."

탈리야가 자이파와 눈빛을 교환했다. 자이파는 카이사에게 두루마리를 건넸다. 슈리마 동부의 지도였다. 자이파가 사이 칼리크 북쪽에 있는 점을 가리켰다. 졸란이었다. '북쪽. 통로가 향하는 곳과 같은 방향이야.' 카이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탈리야가 설명했다. "이 사람들이 안전히 있을 만한 곳은 여기뿐이야. 다들 집이 파괴됐고, 가족과... 헤어졌어. 이 사람들에게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필요해."

"거짓 희망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아. 공허에 대응할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빠르길 바라면서 도망치는 것뿐이지."

탈리야가 고개를 저었다. "사이 사막을 돌아가면 식량이 떨어질 거야. 가만히 있어도 식량은 떨어지지. 돌아가면 마을이 사라진 자리만 남아 있을 테고. 대체 어디로 도망치라는 거야?"

카이사가 탈리야를 바라봤다. "사이 칼리크에 뭐가 사는지 알아? 뭐가 '사냥'하는지 알아?"

"제르사이. 우리도 이야기는 들었어."

"아니. 졸란이야말로 이야기에 불과하지. 제르사이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야. 난 떼로 몰려온 녀석들과 싸운 적이 있어. 여긴 제르사이가 우글거리는 곳이야. 여길 건너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나도 공허 생명체와 싸웠어. 내가 구해 준 거 벌써 잊은 거야?"

"그건 제르사이가 아니었어."

"그게 뭐였든 네가 물리치지 못한 걸 난 물리쳤잖아." 이를 악문 탈리야의 모습에서 굳은 결심이 느껴졌다. "졸란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면 난 거기로 모두를 데려갈 거야."

"게다가 계획도 세워 놨는걸." 사미르가 신이 나서 말했다. "탈리야가 모래 위로 다리나 벽 같을 걸 만들면 다 같이 사람들을 건너게 할 생각이야."

'내가 공허에 끌려갔을 때랑 비슷한 나이 같은데.' 카이사가 큰 소리로 물었다. "너도 돌을 움직일 줄 안다고?"

"나만 한 바위타기 명수는 처음 만날걸?" 사미르가 자신만만하게 씩 웃었다. "내 샌드보드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은 없어. 좀 빠르다 싶어도..." 사미르가 땅에서 폭발이 일어나는 시늉을 했다. "탈리야가 '바위 폭발'로 물리쳐 버리지."

"어린애처럼 말하는군." 카이사가 내뱉듯이 말했다. 사미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렉사이의 아이들은... 그저 먹어 치울 뿐이야. 놈들의 앞을 가로막는 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카이사가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너희 소리가 들리면 쫓아올 거야. 너희를 물어뜯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겠지."

"당신 때문에 겁먹었잖아." 자이파가 진정시키듯 사미르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무랐다.

"잘됐네. 겁먹어야 해."

탈리야가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럼 같이 가자. 네가 모두를 지킬 수 있게 도와주면 되잖아."

"아니. 그곳으로는 가지 마." 카이사가 사미르를 가리켰다. "이 애들을 그런 위험에 몰아넣어선 안 돼. 죽을 거야. 사이 사막을 돌아서 가. 최대한 많은 인원을 데려가. 뒤처지는 사람은 버리고 그 식량으로—"

"그럴 순 없어!" 사미르가 정면에 서서 카이사를 노려봤다. "탈리야가 우릴 지켜 줄 거야. '내가' 우리를 지킬 거야." 사미르는 가슴을 크게 부풀렸다. "난 '모두' 사막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게 도울 거야. 왜냐하면...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사미르가 모닥불 쪽으로 쿵쿵거리며 돌아가자 자이파가 그 뒤를 쫓아갔다.

카이사가 조용히 말했다. "그 방법뿐이야. 아니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다름없어."

"아니." 탈리야가 카이사 앞으로 다가와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붙들었다. "이 세계는 융단이고, 모든 생명은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실과 같아. 한 올 한 올이 전체를 더 아름답게 만들지."

'비유를 하시겠다?' 카이사가 답했다. "그럼 공허는 불꽃이야. 닿는 것을 닥치는 대로 없애 버리지. 네 융단에 불이 붙는다면 전체가 타 버리겠지만... 그을리는 실을 잘라 낸다면 나머지는 살릴 수 있어."

"틀렸어. 올이 하나라도 나가면 전체가 불안정해지면서 풀리기 쉬워지지." 지평선에 햇빛이 나타나며 탈리야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난 '누구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야영지는 낮의 열기를 피해 잠이 들었다. 카이사는 해가 지기 몇 시간 전 일어났다. 사람들이 짐을 지고 보따리를 싸며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납작한 빵과 치즈를 나눠 주었다. 한 아이가 카디라의 로브를 당기며 '무서운 여자'한테 음식을 대신 가져다주면 안 되냐고 수줍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탈리야는 돌로 만든 구조물을 다시 땅으로 무너뜨렸다. 구조물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카이사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빵을 최대한 천천히 씹었다.

탈리야가 말했다. "여전히 우리랑 같이 갈 생각은 없나 보네?" 땀으로 번들거리는 탈리야의 이마가 카이사의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힘든 일인가 보군.'

"그래. 따로 가야 할 곳이 있어." 카이사가 한숨을 쉬었다. "너도 생각을 바꾸지 않은 모양이네."

탈리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가야 할 곳이 있거든." 탈리야는 다시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쉽다. 넌 공허 괴물을 잘 상대하잖아. 사람들한테 도움이 많이 됐을 텐데."

'그 공허 통로를 만든 게 뭔지 알아내는 게 내가 도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야. 그건 어떤 목적을 지니고 만든 통로지... 그 사실이 날 두렵게 해.' 카이사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 혼자서도 충분하길 바랄게."


통로는 카이사가 지나온 만큼 길게 직선으로 이어졌다.

'전과 달리 외롭군.' 괜히 탈리야와 함께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사는 지하에 사는 공허 괴물들만 상대하며 인생의 절반 이상을 홀로 보냈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가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깨닫지 못했다.

생각에 잠긴 카이사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몰랐다. 곧 통로 벽에 간간이 뚫려 다른 곳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터널들이 보였다. '제르사이 터널이야. 여긴 사이 칼리크 아래인가 보네.' 하지만 제르사이의 모습이 보이거나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다.

한 터널 아래가 푸르게 빛나는 게 보였다. 카이사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움직여 어둠으로 이어지는 구멍을 내려다봤다.

전에 상대하고 이름을 지었던 작은 종류의 제르사이가 여러 마리 보였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이족 보행을 하며 먹이를 움켜쥘 수 있는 턱발톱이 달린 울음충 한 무리가 서로 재재거렸다. 울음충은 사막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로 다른 제르사이들에게 새로운 사냥감의 존재를 알리곤 했다. 그 옆에는 이미 울음충보다 크지만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뾰족뾰족한 새끼 제르사이들이 서 있었다. 놈들은 수십 마리의 등불을 에워싸고 있었다.

등불 한 마리의 옆구리에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푸른빛으로 빛나는 자국이 있었다. '내가 쏜 녀석이야.' 카이사는 경악했다. '탈리야의 공격에도 죽지 않았어. 어쩌면 한 마리도 죽지 않았을지 몰라...'

계속 지켜보자 새끼 한 마리가 푸른 자국이 있는 등불에게 접근했다. 등불은 혀를 길게 내밀어 새끼의 뿔을 만졌다.

부드러운 푸른빛이 새끼를 휩쌌다. 새끼는 은은하게 빛났다.

갑자기 울음충들이 재잘거리기 시작하자 카이사의 숨이 턱 막혔다. '뭐 하는 거지?' 더 많은 새끼와 울음충이 빛을 받으려고 등불 무리를 향해 다가가는 모습에 카이사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제르사이를 더 강력하게 만드는 건가?' 카이사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몰아내고 푸른 자국이 있는 등불을 조준했다.

'뭔지 몰라도 막아야 해.'

그때 커다란 폭발음이 땅을 뒤흔들었다.

거대한 제르사이 모래 언덕 파괴자가 여덟 개의 눈 위에 솟은 칼날 같은 뿔로 돌벽을 뚫었다. 턱을 따라 달린 발톱이 바위를 할퀴자 깊이 파인 자국이 남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흔들리며 사냥감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모래 언덕 파괴자는 쉭쉭거리며 등불 무리를 향해 뿔을 휘둘렀다. 단번에 세 마리가 쓰러졌다.

'등불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야.'

등불들은 괴성을 지르며 카이사가 있는 통로를 향해 달아났다. 카이사는 익숙한 힘이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몸과 갑옷을 투명하게 했다. 때맞춰 등불 무리와 모래 언덕 파괴자가 차례로 카이사를 지나치며 북쪽으로 돌진했다. 모래 언덕 파괴자의 뿔이 통로 위쪽을 가르며 깊은 틈이 생겼다. 천장이 안쪽으로 휘어졌다.

'통로가 무너질 거야.'

카이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서 거대한 제르사이를 쫓아가기 위해 앞으로 돌진했다. '이 통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아야겠어. 반드시 알아내야 해.'

그때 뒤쪽 어딘가에서... 비명이 들렸다. 인간의 비명이었다.

카이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황급히 지면으로 올라가자 밑에 있는 통로가 완전히 무너졌다. 카이사는 투구가 햇빛에 다시 적응하는 동안 눈을 깜빡였다.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리고 요란한 낙석 소리가 귀를 울렸지만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카이사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앞을 보니 모래 언덕 파괴자의 뿔이 통로 천장을 가른 곳에 깊이 틈이 생겨 있었다. 가장자리에는 돌로 된 판이 매달려 있었다. 대부분은 모래 위에 있어 아슬아슬하게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돌판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한 사람만은 침착했다. '탈리야. 탈리야의 돌다리군. 탈리야 덕분에 떨어지지 않고 있는 거야.' 탈리야는 힘이 잔뜩 들어가 떨리는 팔로 천천히 돌판 앞쪽을 들어 지면으로 돌렸다.

밑에서 아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통로로 떨어졌어.'

카이사는 탈리야에게 달려갔다. "물러서야 해!" 카이사가 외치는 것과 동시에 다리가 떠올랐다. "움직이지 않으면 밑에 있는 게 다 무너질 거야!"

마침내 다리가 쿵 소리를 내며 지면에 안착하자 탈리야가 소리쳤다. "저 밑에 사미르가 있어! 사미르를 두고 갈 순 없어!"

탈리야가 힘겹게 소리를 지르며 한 손으로 공중을 밀었다. 다리가 탈리야로부터 멀어지며 끌리는 소리가 났다. 붕괴 지점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까지 다리를 밀어낸 탈리야는 틈 속으로 뛰어들었다.

카이사는 가장자리 너머를 바라봤다. '내가 돕지 않으면 저 밑에서 죽을 거야.'

카디라와 자이파가 다리에서 달려왔다. 카이사는 둘의 발치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뭐 하는 거야?!" 카디라가 깜짝 놀라 물러서며 외쳤다.

"그 거대한 제르사이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여기를 빠져나가."

"탈리야와 사미르가 무사한 걸 확인하기 전까진 아무 데도 안 가." 자이파가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우리도 도울게."

'이럴 시간 없어.' 카이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깨 주머니를 펼쳤다. 수정이 힘으로 타닥거렸다. '이 둘을 죽이면 나머지는 알아서 달아날 테지.'

카디라와 자이파는 손을 맞잡되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사는 모닥불 주위에서 저들이 해 준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들이 나눠 준 음식을 떠올렸다. 자신을 향한 저들의 공포와 하룻밤 사이 그 공포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떠올렸다.

'...해치고 싶지 않아.' "내가 내려가서 도와줄게. 너희는 돌아가. 저들에게는 의지할 만한 사람이 필요해."

"좋아. 대신 두 사람 다 꼭 데려와야 해." 자이파가 내뱉듯 말하며 카디라와 함께 다시 다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래. 약속할게.' 카이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점점 커지는 구멍 속으로 뛰어내렸다.

카이사는 보통 사람이었다면 뼈가 부러졌을 정도로 세게 바닥에 착지했다. 멀리서 빛나는 공허충 무리가 보였다. 등불뿐 아니라 등불의 힘으로 변한 새끼 제르사이와 울음충까지 전부 매끄러운 반구형 돌을 둘러싸고 있었다. '탈리야와 사미르가 있는 곳일 거야.'

멀리서 들려오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모래 언덕 파괴자가 방향을 돌렸어. 등불을 쫓고 있다면... 곧장 여기로 돌아오겠지.'

카이사는 생체 갑옷의 힘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보라색 빛이 카이사의 손목을 감싸더니 사라졌다. 다시 투명해진 것이다.

카이사는 울음충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다섯 마리 모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었다. 새끼들은 공격이 날아온 곳을 찾아 몸을 돌렸다. 카이사를 찾을 수 있는 것은 앞을 못 보지만 공기를 감지할 수 있는 등불뿐이었다. 카이사는 위치가 정확히 발각되기 전 빠르게 새끼들을 해치웠다.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수십 마리의 등불이 카이사를 향해 돌진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이사는 최대한 빨리 달렸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미친 듯이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몇 마리만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한 마리가 카이사의 발목을 붙들더니 혀에 돋은 가시로 갑옷을 베었다. 카이사는 더 많은 공격을 피하려다가 넘어졌다. 등불들은 카이사의 갑옷이 회복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사방에서 공격해 왔다. 카이사의 팔다리와 뺨에서 피가 흘렀다. 입술 위로 흐르는 피에서 비릿한 쇠 맛이 느껴졌다.

그때 밑에서 무엇인가 폭발했다. 등불들은 뒤로 멀찍이 밀려났다.

혼란에 빠진 등불들이 주춤거렸다. 반구형 돌 위에서 머리를 빼꼼 내민 탈리야가 뭐라고 소리쳤다. 카이사의 투구가 형태를 바꾸자 탈리야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으로 와!"

카이사는 몸을 웅크렸다. "추진력을 보태 줘!"

밑에서 땅이 폭발하며 카이사를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공허충 무리를 넘어 탈리야 쪽으로 날아간 카이사는 멀쩡한 발목으로 착지해 질주하려고 했다. 무리였다. 결국 다시 갑옷의 힘에 몸을 맡긴 카이사는 갑옷이 자신의 남은 힘을 흡수하게 해 발목이 회복하는 속도를 높였다. 오래는 달리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등불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탈리야는 다시 한번 카이사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날렸다. 이번에 카이사가 착지한 땅에는 전과 달리 날카로운 혹 같은 게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었다. 카이사는 그 위를 달리며 등불들이 탈리야에게 가지 않도록 유인하려고 애썼다. 앞쪽에 푸른 자국이 있는 등불이 보였다. 등불은 다시 카이사에게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 폭발이 일어나며 등불이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카이사는 충격에 얼어붙었다.

탈리야가 외쳤다. "계속 달려! 그래야 폭발이 일어나!"

카이사는 탈리야 주변을 빙빙 돌며 계속 달렸다.

등불 몇 마리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가 탈리야의 '바위 폭발'에 목숨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고 속도를 늦춘 다른 등불들은 카이사가 날리는 미사일의 표적이 되었다.

등불의 수는 금세 줄어들었다. 하지만 모래 언덕 파괴자가 돌아오며 나는 우르릉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중이었다. '시간이 별로 없어.'

남은 등불은 많지 않았다. 지친 카이사는 반구형 돌 옆에 서서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 미사일을 날렸다. 미사일은 지뢰밭 때문에 속도가 느려진 등불에게 모두 적중했다.

카이사는 씩 웃으며 탈리야를 돌아봤다. 하얗게 질린 탈리야는 모래 먼지 때문에 기침을 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사미르는 탈리야의 팔을 어깨에 두르고 힘겹게 부축했다.

탈리야가 헐떡였다. "더는... 땅이... 너무 불안정해. 더는 못 버티겠어..."

카이사는 탈리야를 안아 들었다. 사미르에게는 자신의 등에 매달리라고 손짓한 후 구멍의 벽을 향해 달려갔다. '나도 한계야. 이런 상태로 지면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갑자기 탈리야가 카이사의 손에서 벗어나 뛰어오르며 발밑에 떠오르는 돌판을 소환했다. 탈리야는 카이사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후 돌판을 위로 올렸다. 탈리야의 힘은 지면에 닿기 직전 바닥났다. 가장자리를 붙잡은 카이사와 탈리야는 온 힘을 다해 버텼다.

그때 흙과 먼지로 뒤덮인 십여 개의 손이 내려왔다. '꿈인가?' 카이사가 손을 뻗으며 생각했다. '꿈이 아니야.' 위를 올려다보자 탈리야의 야영지에 있었던 얼굴들이 보였다. 카이사의 손목을 잡은 손 중 하나는 카디라의 손이었다. '날 구해 주고 있어.'

"자이파!" 다시 단단한 땅으로 올라선 탈리야가 외쳤다. "카디라! 돌아와 줬구나!"

"도와줄 사람도 데려왔고." 카이사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고마워."

아래에서 모래 언덕 파괴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돌아왔다. 카이사는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움직이지 마.' 모래 언덕 파괴자는 소리가 나거나 느껴지거나 움직임이 보이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조용히 있으면 살 수 있어.'

축 처진 등불의 사체를 뿔로 쿡쿡 찌른 모래 언덕 파괴자는 이리저리 움직이며 빛나는 울음충과 새끼 제르사이의 사체를 발견했다.

적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만족한 모래 언덕 파괴자는 다시 바위를 파고들며 땅 밑으로 사라졌다.

카이사는 모래 언덕 파괴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움직여도 된다는 신호를 보냈다. 지쳐서 창백하게 질린 탈리야가 땅에서 다른 돌다리를 들어 올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모두를 옮겼다. 진이 빠진 카이사와 다소 얌전해진 사미르는 맨 뒤를 지켰다.

"나 혼자서도 올라올 수 있었을 거야." 사미르는 피곤한 기색으로 카이사를 향해 씩 웃었다. "그래도 도와주러 와서 고마웠어. 나 때문에 이동이 지체될 뻔했으니까."

사미르를 곁눈질한 카이사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난 최고의 바위타기 명수가 위험에 처했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잖아?"


모닥불에서 밝은 불이 활활 타올랐다. 사이 사막에서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탈리야의 돌다리는 야영지를 둘러싼 벽이 되어 있었다.

카이사는 불빛이 있는 곳에서 떨어져 있었다. 아직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먹는 것보다 쉬는 게 나아.' 카이사는 우울하게 생각했다. 까맣게 탄 양배추 냄새가 카이사 쪽으로 흘러왔다.

탈리야가 앉더니 아무 말 없이 양배추와 수수로 가득한 그릇을 권했다. 카이사는 그릇을 밀어냈다.

"배 안 고파?"

"화가 났거든."

탈리야는 깜짝 놀란 듯했다. "왜?"

카이사가 매섭게 말했다. "내 말을 들었어야지. 넌 네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어. 우릴 공격한 공허충은 네가 죽인 줄 알았던 그 녀석들이야. 하마터면 모두 몰살할 뻔했어. 내가 거기 있지 않았다면 그랬겠지." 탈리야의 일그러진 입술과 앙다문 턱에서 후회가 엿보였다. "그리고 넌 네가 가장 필요한 순간 사람들을 버렸지.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확실하지도 않은 사람 하나를 구해 보겠다고 모두를 죽게 내버려 둔 거야."

탈리야는 잠시 말이 없었다. "고맙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네가 날 도우러 내려온 것도 결국 같은 일이라는 거 알지?"

카이사는 할 말이 없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카이사가 입을 열었다. "졸란으로는 가지 마. 내가 따라가다 무너진 공허 통로는 너희가 가는 경로 바로 밑에 있었어. 아마 졸란으로 이어지는 통로였을 거야. 그곳도 이미 공허에 당했다는 뜻이지."

탈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탈리야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전할게."

"전한다고? 너는 어쩌고?"

"난 졸란으로 갈 거야."

"탈리야—"

"너도 거기로 가는 거지?" 탈리야가 한숨을 쉬었다. "난 내가 이 사람들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어.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 줄 알았지. 하지만 네 말이 맞아. 안전한 곳은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곳을 만들어야 해."

"뭐? 그게 무슨 뜻이야?"

"졸란에 공허가 있다면... 우리가 되찾으면 돼! 모두를 데려가도 안전한 곳으로 만들고... 이미 거기 있는 사람들을 돕는 거지." 탈리야의 말은 아주 낙관적이었다.

"공허가 마을을 장악했다면... 구할 사람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 거야."

"여기선 모르지.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단 한 명뿐이라고 해도 나한테는 그걸로 충분해." 탈리야가 앞으로 나와 카이사의 손을 쥐었다. 두 번째 피부 너머로 굳은살이 박힌 따뜻한 손이 느껴졌다. "네가 없으면 안 돼, 카이사. 나 혼자서는 그 등불들을 죽이지 못했지만... 너랑 함께 있을 땐 해냈잖아. 우리 같이 졸란을 찾아보자."

'고향이 공허로 떨어졌을 때 탈리야가 있었다면... 난 지금과 다른 존재가 됐을지도 몰라.' 카이사는 탈리야의 눈에 깃든 희망과 힘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나야. 이 세상에는 지금의 내가 필요해. 탈리야에게도 그렇고. 우린 함께 엄청난 일을 해냈어. 나한테도 탈리야가 필요한 모양이야.'

'아직 졸란에 살아 있을지 모르는 누군가에게도 그렇겠지.'

카이사는 까맣게 탄 양배추를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융단의 또 다른 실을 찾으러 가자고."


탈리야는 자이파를 따라 떠나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떠나기 전, 자이파는 지도에서 무역 도시였던 곳을 찾았다. 그곳으로 가면 목초지가 나올 것이다. 자이파는 말했다. "식량이 떨어지더라도 거기서 사냥을 하면 될 거야."

탈리야가 자이파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안전하게 잘 지내. 모두에게 대지모신의 축복이 함께하길 바랄게."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탈리야는 다음 여정의 유일한 동행인 카이사를 돌아봤다. '동행이 생겨서 기쁜 것 같아.' 탈리야는 몰래 웃으며 생각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함께 둥둥 떠다니는 돌다리에 올라 사이 칼리크를 건너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운명이 잠시 하나로 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