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명의 축구 선수는 카를로스 몬토야(축구선수)로.
1. 개요
카를로스 가르시아 몬토야(Carlos García Montoya, 1903. 12 .13 스페인 마드리드 ~ 1993. 03. 03 미국 뉴욕 웨인스콧 ||)는 스페인의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 작곡가다. 플라멩코 기타 독주자로서 세계 곳곳에서 공연하여 춤, 노래, 기타, 리듬이 어우러진 플라멩코 음악에서 분리된 순수한 플라멩코 기타 음악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클래식 기타로 치면 안드레스 세고비아에 버금간다 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 라몬 몬토야와는 삼촌, 조카 관계에 있다.
2. 생애
카를로스 몬토야는 스페인의 집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후안 가르시아(Juan García)는 군대에 당나귀를 납품하여 생계를 유지했으나 카를로스 몬토야가 두 살일 때에 사망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고 아마추어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인 모친 에밀리아 몬토야(Emilia Montoya)[1]에게 여덟 살에 가르침을 받았는데, 라몬 몬토야는 카를로스 몬토야의 어린 시절 스페인에서 확고한 유명세를 구축하고 있었다. 에밀리아 몬토야는 카를로스 몬토야에게 기타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지만 자기 아들에게 가르치기도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여 직접 가르칠 수 밖에 없었다. 아들의 엄청난 재능이 드러나자 어머니의 소개로 이웃집 이발수 페페(Pepe el Barbero)에게 기타를 배웠으나 머지않아 스승을 능가하였다. 카를로스 몬토야는 이후 독학으로 기타를 익혀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고 악보를 어떻게 읽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나 열네 살의 나이에 마드리드 곳곳의 카페에서 가수, 무용가들과 함께 플라멩코 공연에 참가하여 기타 연주자로 활동했다. 하루에 1달러를 벌었으며 그 돈으로 다른 연주자들에게 와인을 바쳐 조금씩 기타를 배워나갔고 받는 돈이 너무 적어 남는 시간에는 우체국, 법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실력은 계속해서 향상되어 스무살 쯤에는 안토니오 데 빌바오(Antonio el de Bilbao), 후안 엘 에스탐피오(Juan el Estampío), 라 마카로나(La Macarrona), 라 카미소나(La Camisona) 등의 유명한 무용수 공연단에 참여했다.1924년부터 1927년까지 스페인군에서 복무하여 스페인&프랑스와 모로코 사이에 벌어진 리프 전쟁에 참전했으며, 당시에 목격한 참상은 이후의 음악 활동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종전 후 마드리드로 돌아와 안토니아 메르세(Antonia Mercé)의 공연단 라 아르헨티나(La Argentina )[2]에서 연주했으며, 이후 비센테 에스쿠데로(Vicente Escudero )의 무용단과 함께했다. 1933년에는 라 테레시나(La Teresina)와 함께 처음으로 유럽을 떠나 미국, 극동에서 공연했다. 일본에서는 도쿄대학교가 2년 동안 강의해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거절하였고, 대신 연주 기법 강의 영상을 촬영하여 수업 자료로 사용하도록 했다. 1938년에 엔카르나시온 로페즈(Encarnación López)의 공연단 라 아르젠티니타(La Argentinita |)에 합류하여 남미, 북미, 유럽 곳곳에서 공연하였다. 2차 세계 대전 시기, 미국에 머물던 중 뉴욕에서 다시 만난 무용수 샐리 매클레인(Sallie MacLean )과 1940년 3월 4일에 결혼하여 뉴욕에 정착하였고 몇 년 뒤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백악관 공연을 요청하기도 했다.
1945년에 엔카르나시온 로페즈의 사망으로 라 아르젠티니타가 해체된 이후,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여 독주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몬토야는 스스로의 연주 활동으로 플라멩코 기타 독주 공연이라는 분야를 널리 퍼뜨렸으며, 이전에는 플라멩코 기타 독주는 플라멩코 공연 사이의 쉬는 시간에나 볼 수 있었다. 전성기에는 1년에 400회에 가까운 연주회를 개최하여 미국에서는 카를로스 몬토야의 독주회가 열리지 않은 도시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이었고, 하루에 세 번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카를로스 몬토야는 플라멩코가 주를 이뤘던 레퍼토리에 재즈, 블루스, 당대의 팝송을 섞어 레퍼토리를 확장했다. 1948년에는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전 세계 곳곳에서 연주회를 열어달라는 요청을 받았으며 교향악단과 협연한 최초의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가 되었다. 이후 30년 이상 북미, 유럽 곳곳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40개 이상의 앨범을 출시했다. 향년 83세에 뉴욕의 작은 섬 웨인스콧(Wainscott )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으며 웨인스콧에 거주하던 아들 앨런 몬토야가 소식을 전했다.[3]
3. 연주
플라멩코 기타 독주에는 플라멩코 음악에 존재하는 캐스터네츠, 관중의 박수 등의 타악기적 요소가 없어서 이전의 플라멩코 기타 연주법에 타악기의 효과를 내는 연주법을 더했다.[4] 카를로스 몬토야는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플라멩코 음악과 함께 발전해온 플라멩코 기타 연주 방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많은 녹음본에서 박자가 일정하지 않고 빨라졌다 느려졌다 반복한다. 재빠른 피카도(Picado) 주법으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현을 낮게 조율하고 3번 프렛에 카포를 장착함으로서 장력을 아주 낮게 만든 특유의 연주 세팅 덕분으로 여겨진다. 플라멩코 전통주의자들은 카를로스 몬토야의 연주가 음악적 깊이보다는 기교에 치중했다고 비판하기도 하며, 당대에도 진지한 애호가들에게는 박자가 고르지 않고 트레몰로가 너무 많다는 등의 이유로 삼촌 라몬 몬토야 등의 연주자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5] 평생 음악을 어떻게 읽고 쓰는지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본인이 만들어낸 연주 기법을 보급할 겸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의 레퍼토리를 악보로 옮겨 출판할 것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악보는 참고사항에 지나지 않으며 플라멩코는 즉흥성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안달루시아의 집시들은 고유의 리듬과 패턴을 바탕으로 즉석에서 음악을 자아냈음을 언제나 강조했다.
4. 가족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아내와의 사이에서 아들 레이몬드 몬토야와 다른 자식 한 명을 두었고, 이혼한 이후 샐리 마클린과 결혼하여 아들 앨런 몬토야, 카를로스 몬토야 주니어를 두었다. 샐리 몬토야는 남편과 사별한 이후에도 장수하여 2021년에 108세 생일을 맞이하였다.레이몬드 몬토야(Raymond Carlos Garcia Montoya, 1932. 01. 12 ~ 1998. 05. 11)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들 마이클 에릭슨(Michael Eriksson)을 둔 다음 스웨덴인 아나-스티나 노르드마크(Anna-Stina Nordmark)와 결혼하여 스웨덴에서 살다 죽었고 아들 패트릭 가르시아(Patric Carlos Garcia Montoya)를 두었다. 배다른 형제 앨런, 카를로스 주니어와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앨런 몬토야(Allan MacLean Montoya)는 한때 일렉트릭 기타를 공부하며 락 음악을 연습해 부모를 실망시켰지만 결국 관두었다.[6]
카를로스 주니어 몬토야는 아버지를 따라 플라멩코 기타를 공부했으나 흥미를 붙이지 못하여 관두었다. 카를로스 몬토야가 사망할 당시에는 메사추세츠 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미술치료사 히터 린드(Heather Rynd)와 결혼하여 아들 조쉬 몬토야(Josh Montoya), 딸 크리스티나 몬토야(Christina Montoya)를 두었다. 크리스티나 몬토야는 살사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다섯 살부터 춤을 배웠다.[7]
5. 가문
몬토야 가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플라멩코에 종사해왔다.- 라몬 몬토야(Ramón Montoya Salazar, 1879. 11. 02 스페인 마드리드 ~ 1949. 06. 20 스페인 마드리드 ||) : 카를로스 몬토야의 삼촌. 최초로 플라멩코 기타 독주 연주회를 열었다고 알려져 있다. 비록 일회성으로 그쳤지만 카를로스 몬토야의 독주 활동은 삼촌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 파루코(El Farruco )라 불린 플라멩코 무용수 안토니오 몬토야(Antonio Montoya Flores)는 라몬 몬토야의 손자, 즉 카를로스 몬토야의 사촌조카(내종질)이다. 파라오나(La Faraona)라 불린 딸 필라르 몬토야(Pilar Montoya Manzano ), 파루카(La Farruca )라 불린 딸 로사리오 몬토야(Rosario Montoya Manzano)를 두었다. 아내 파스토라 아마야(Pastora Amaya)는 무용수 겸 가수였으며 기차사고로 사망했고, 파루퀴토(Farruquito)라 불린 외아들 후안 몬토야(Juan Antonio Montoya Amaya)는 18세에 오토바이를 몰다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파루코는 관상동맥 수술을 받았으나 의료진의 만류를 뿌리치고 술, 담배, 춤을 즐기다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로사리오 몬토야는 모레노(El Moreno)라 불린 후안 페르난데즈(Juan Fernández Flores)와 결혼하여 파루퀴토(Farruquito |||)라 불린 아들 후안 페르난데즈(Juan Manuel Fernández Montoya), 파루(El Farru |)라 불린 아들 후안 페르난데즈(Juan Antonio Fernández Montoya), 카르페타(El Carpeta |)라 불린 아들 마누엘 페르난데즈(Manuel Fernández Montoya), 아들 알제리아 페르난데즈(Alegría Fernández Montoya)를 두었다.
- 카를로스 몬토야의 조카 로사 몬토야(Rosa Montoya)는 플라멩코 무용수로 활동하여 샌프란시스코의 스튜디오를 기반으로 캘리포니아 전역에 플라멩코 무용을 전파했다.
6. 여담
플라멩코 역사 전문가, 플라멩코 기타 연주자 브룩 전(Brook Zern )과 친분이 있었다. 브룩 전은 카를로스 몬토야가 쿠리토 제로마(Currito el de la Jeroma)의 연주를 좋아했다고 증언했다.한 기타를 오래 쓰지 않았으며 몇 년 뒤에는 저렴하게 처분하거나 선물하고 다른 기타를 마련했다. 일례로 마르셀로 바르베로(Marcelo Barbero) 1951년 기타를 앨범 하나를 녹음하는 데 사용한 이후 근처에 살던 사비카스에게 선물했다.[8]
[1] 극장 예명 라 툴라(La Tula)로 불렸다.[2] 공연단의 이름은 메인 가수의 예명이기도 하다.[3] CARLOS MONTOYA Carlos Montoya Carlos Montoya, 89, Flamenco Guitarist, Is Dead[4] 이는 오늘날 핑거스타일의 타격기의 기반이 되었다.[5] CARLOS MONTOYA[6] CARLOS MONTOYA AND THE FUNDAMENTALS OF FLAMENCO[7] Christina Montoya teaches dance, Salsa Suelta Cubana style[8] 마르셀로 바르베로는 호세 라미레즈 2세에게 기타 제작을 배웠으며, 역사상 제일 유명한 플라멩코 기타 제작자로 여겨진다. 사비카스가 기타를 받았을 당시에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다. 클래식 기타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