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 케이스케 (狩野恵輔) | |
생년월일 | 1982년 12월 17일 |
국적 | 일본 |
출신지 | 군마현 시부카와시 |
포지션 | 외야수,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입단 | 2000년 드래프트 3위 |
소속팀 | 한신 타이거즈 (2001~2017) |
한신 타이거즈 소속의 전 야구선수. 등번호는 원래 63번이었지만, 07년부터 '더이상 뒤가 없다'라는 의미를 담은 99번으로 교체.
포지션은 포수. 외야수에도 도전한 적 있다.
2000년에 입단한 선수지만, 첫 출장이 04년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성장이 느린 선수.
2군에서는 상당한 성적을 남긴 바 있다. 06년에 2군 리그에서 규정 타석 부족이었음에도 수위타자를 획득했다.[1]
06년에 둘째(아들)를 얻었는데 '이렇게 2군에 있다가는 큰일난다'라는 경각심이 생기면서 선배 포수인 야노 아키히로를 따라다니며 배우려고 드는 등 노력하였다.
07년에 개막 1군을 탈성. 동년 4월 20일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연장 12회에 대타로 나와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는데, 이것이 그의 프로 첫 안타 첫 타점이기도 했다. 다음날에 선발 출장하여 프로 첫 홈런도 달성.
09년에는 개막전부터 마스크를 쓰고 126시합에 출장하는 등 사실상의 정포수였다.
그러나 09년 오프에 죠지마 켄지가 입단하면서 경쟁에서 차츰 밀려났고 더군다나 죠지마가 출장 기회의 보장을 요구하고 나왔기 때문에 카노는 완전 새 됐다고 볼 수 있다. 지못미 죠지마가 부상당해서 포수 자리를 되찾나 싶었더니 한신에서 라쿠텐의 포수 후지이 아키히토를 영입하며 포수로써의 입지를 상실, 결국 외야수로 전향했다.
외야수 전향 후에도 경기에 많이 나오지는 못하는 상황. 2011년과 2012년에는 허리 통증으로 인해 1군 출장이 손에 꼽을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2012년 시즌 후에는, 한국의 신고선수와 유사한 육성선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밝혀졌다.
2013년 9월 1일 히로시마와의 경기에서 1년만에 1군에 복귀, 대주자로 출장했다.
2014년에는 뒤늦게 1군에 올라와 주로 대타로 출장했다. 일본시리즈에서 안타도 기록. 2015년에도 대타롤을 맡고 있다.
2016년에도 거의 대타로만 출장, 2015년과 거의 비슷한 66경기 출장에 95타석을 기록했다. 타격성적은 전년에 비해 소폭 하락했다. 2017년에도 선수생활은 이어가게 됐다. 그러나 대타로도 거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5타석에서 무안타를 기록, 결국 2017년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리고 9월 27일 히로시마와의 2군 시합에서 은퇴시합을 가졌다. 4번 지명타자로 선발출장했는데, 9회초에 포수로 이동해 동일하게 은퇴선언을 한 팀 동료 안도 유야의 공을 받으며 현역생활을 마무리했다.
은퇴 후로는 야구평론가 겸 프리랜서 해설자로 활동중이다. 2018년 시즌종료 후 한신으로부터 2군 타격코치 제안을 받았으나 본인이 고사.
09년에 10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포수치고는 발이 빠르다. 더불이서 11개의 고의사구를 얻어내었는데 이것은 리그 1위의 성적.[2]
특기는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고 있으면 손끝의 감각이 예민해져서 캐칭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여담으로, 野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훈독으로 の라고 읽는데[3], 이 선수의 성 狩野에서는 のう의 장음으로 읽는다. 매우 특이한 독음이며, 狩野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かの라고 읽는 독음도 물론 있으면서도 かのう라고 읽는 경우도 꽤 많다.
[1] 부족한 타석을 전부 범타로 계산해도 타율이 1위였기에 인정되었다고 한다.[2] 사실 투수가 타석에 들어가는 센트럴 리그의 특징상 8번을 치는 그가 고의사구를 많이 얻을 수밖에 없긴 했다.[3] 인터넷 사전을 검색해 보면, 野에 のう라는 독음은 검색되지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