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 남성 배우이자 가수 스카이(SKY)로 활동했던 최진영의 생애를 다룬 문서이다.2. 일생
1970년 11월 17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現 은평구)에서 1녀 1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가정 형편 탓인지 몸이 무척 약했었다고 한다. 또래보다 체구가 작은 편이라 시비도 많이 걸렸었고 복숭아, 사과, 포도 등의 과일들과 계란 등 여러 음식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여 먹지 못하는 음식들도 많았다고 한다. 커 가면서 점차 괜찮아졌지만, 복숭아 알레르기는 평생 가지고 있었다.[1]
최진영은 어린 시절부터 기타 연주 습득에 열정을 보이는 등 음악에 흥미가 있었고, 노래에 소질이 있었다. 또한, 주위 사람들로부터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였다. 다음 링크들은 최진영이 가수로 데뷔하기 전, 배우로서 노랠 불렀던 영상들이다. 후술하겠지만 가수 스카이(SKY)로서 활동한 30대 최진영의 목소리와 배우로만 활동하던 20대 최진영의 목소리는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 이별 이야기(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90)
- 그 집 앞(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1990)[2]
- 슬픔의 심로(우리들의 천국, 1992)
- 아껴둔 사랑을 위해(여러분의 인기가요, 1993)
- 걸어서 하늘까지(결정! 최고 인기가요, 1993)
-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 1993)
청소년기 최진영과 최진실은 연기를 하며 놀았다. 그리고 명절 때, 친척들을 앞에 두고 평소 연습해 둔 것을 공연하곤 했다. 최진영과 최진실은 서로에게 좋은 연기 파트너였다. 둘은 1986년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합격하기도 했으나, 6개월 과정의 연수비 38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포기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최진실은 모델 일을 하며 돈을 벌어 오는 최진영을 보며 자신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작은 실랑이가 있었지만 어머니와 최진영은 결국 허락하였다. 최진영은 카메라를 구해 직접 최진실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 주고 그 사진들을 충무로 에이전시에 홍보해 주며, 최진실 시대를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4] 최진실의 명성이 하늘을 찔러 상대적으로 평가 절하되는 일도 겪지만, 그런 누나를 시기하고 질투하기보다 최진실의 성공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였다고 한다. 방송에서도 이런 돈독한 남매의 모습이 자주 공개되었다.
또한 그는 한편으론 최진실이라는 커다란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송 섭외 전화가 오면 항상 따라붙는 조건이 누나와 함께 출연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누나와 함께 나오지 않은 프로그램에서도 늘 누나 얘기를 물어보니, 연예인으로서의 본인의 입지에 회의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수로 데뷔할 땐 '최진실의 동생', '배우 최진영'의 꼬리표를 떼고자, 스카이(SKY)라는 예명과 함께 가면을 쓰고 등장했었다.
1990년 최진영은 최진실의 영화 《남부군》의 고사식에 동행하였는데, 이때 그를 눈여겨본 이춘연[5]이 본인이 기획한 영화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에 그를 캐스팅하였고 이를 통해 배우로 데뷔하게 된다. 다음 해인 1991년엔 영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로 여러 상을 수상하며 배우로 인정받는다. 그 후 여러 작품에 출연하였고 1994년 MBC 《우리들의 천국》에 출연하여 배우로서 상종가를 치고 있을 때 입대한다. 연예인들의 병역 비리가 많던 시절에 정석대로 입대했고, 부유층 자제가 꿀 보직 찾던 시절에 최전방인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국방 홍보원 홍보 지원대로 전속하여 연예 병사로 군 복무를 마쳤다. 당시 군 후임은 감우성, 안정훈, 차인표[6], 이휘재, 구본승이었다. 1996년 제대 후 드라마와 영화 등에서 모습을 보이다가 1998년도부터 잠시 모습을 감췄는데 이 시기에 가수로서의 서막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 11월부터 가수 스카이(SKY)로 활동하였다.[7] 그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인 《영원》은 사실 김정민에게 갈 곡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소속사에 들렀다가 우연히 《영원》의 데모 버전을 들은 최진영은 김정민에게 이 곡을 부르고 싶다고 요청하였고, 이에 김정민은 흔쾌히 수락하여 최진영의 《영원》이 탄생한 것이다. 해외 입양을 주제로 한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초호화 캐스팅과 퀄리티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곤 한다. 배우 장동건[8], 차인표, 정준호, 김규리, 이서진이 출연하였는데 당시 장동건, 차인표, 김규리는 전성기나 다름없는 때였으니, 그 위용은 말할 것도 없었다. 1집 앨범이 대박을 터트리면서 2000년 각종 시상식에서 많은 상을 수상한다.
한편 이 곡의 가사 중 일부인 나 언제라도 저 하늘이 날 부를 때 한없이 사랑했던 추억만은 가져갈게는 최진영의 묘비에 각인되었다.
1집 타이틀곡 《영원》의 대박 이후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에 전념한다. 2001년 2집을 발매한다. 타이틀곡은 《24시간의 신화》인데 《영원》이 워낙 히트했어서 그렇지 이 노래 역시 MBC '음악 캠프' 기준 최고 5위까지 오르는 등 상당히 인기 있었다. 그 후로 2004년 발매한 3집이 마지막 가수로의 활동이다.
2004년 8월 1일 조성민의 폭행 사건[9][10][11]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최진실과 최진영은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 최진영은 2003년 1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3집 활동이 두 번이나 연기되었었는데[12] 이 앨범이 2004년 9월 발매될 예정이었다. 3년 만의 컴백 직전에 조성민이 초를 친 것이다. 어찌 됐건 3집 앨범 활동을 무사히 마치고 이후 3년간의 공백기를 가진다. 이에 대해선 여러 이유가 있었다.# 그렇게 대외적인 이유와 개인적인 이유로 활동을 중단하였다.
2007년, 3여 년의 공백기 끝에 KBS2 아침 드라마 《사랑해도 괜찮아》로 배우로서 컴백한다. 배우로서는 10년 만의 컴백이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종방연 기념 현장에서 외주 제작사 대표를 향한 폭행설에 휘말린 것. 이것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빈축을 샀다. 다만, 여기엔 일화가 있었다. 동생을 보기 위해 종방연 현장에 찾아온 최진실이 외주 제작자와 대화를 하다 언쟁이 붙었고, 이 과정에서 최진실에게 모욕적인 말을 내뱉은 상대에게 화가 난 최진영이 멱살을 잡은 것이었다. 상황이 어찌 됐건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최진실, 최진영은 다음 날 상대를 찾아가 사과하였고, 상대도 사과를 받아들이고 일단락됐다. 이후 최진영은 다시 1년간 활동이 없었다.
2008년 여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하려고 하는 듯하였으나[13] 2008년 10월 2일 누나 최진실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그의 연예계 활동은 다시금 멈추게 되었다.
최진실 사망 직후인 2008년 11월,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늦깎이로 입학을 해 화제가 된다.[14] 이로써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이자, 연출가로 유명한 최형인의 제자가 된다. 2009년 6월엔 최형인이 연출하는 연극 《한여름 밤의 꿈》에 출연한다.# 입학 후, 착실한 학교생활로 수석을 거머쥐기도 하였다. 만학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에게 다정한 동기이자, 선배로 잘 어울렸던 것으로 보인다. 사망 당시 학교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그의 동기와 후배들은 그를 '우리의 고민을 귀담아들어 주던 사람', '본받을 만한 사람'으로 회고하였다. 교수 최형인 역시 "살기 위해 공부하고 연기한다"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더 세심히 챙기지 못한 점을 미안해하였다.# # # 그는 조기 졸업을 하고 박사 과정까지 밟고 싶어 하는 등 대학 생활에 꽤나 적극적이고 진심이었다. 누나의 사망 후에도 열심히 살아 보려던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진영은 누나의 사망 후, 누나와 조카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망 전까지도 많은 싸움을 해 왔었다. 우선, 최진실의 장례 절차를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친권과 재산권에 관련하여 조성민과의 갈등이 있었다.# # # 이러한 과정에서 제3자로부터 무례한 막말까지 듣기도 하였지만, 결국 친권 및 양육권을 지켜 냈다.
하지만 2009년 6월 '신한'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15]에서 최진실에 대한 세상의 공격이 멈추지 않았음을 목격한다. 같은 해 8월에는 최진실 유골 도난 사건이 일어나며, 또 한 번 깊은 고통을 겪는다. 그러다 2010년 2월엔 '신한'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이 최진영을 비롯한 유가족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해당 판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어머니와 교수 등 지인들의 이야기로 비추어 보아 2010년 새 학기부터는 도통 학교에 나가질 않았고, 하루 두 끼도 채 챙겨 먹지 않았으며 방에서만 생활하는 등 상당히 무기력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최진영은 2010년 3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3. 사망
사망 당일 오후에도 아버지와 대학교수 및 몇몇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별다른 유서[16]는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누나가 떠난 후 생각보다도 더 많이 힘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인들에게 종종 "모든 것이 힘들다."고 심경을 토로했던 적이 있는가 하면 과거에도 한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2010년 3월 초 이루어졌던 기자 간담회에서 그는 "조용히 조카를 돌보며 생활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날 안쓰럽게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며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어둡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이젠 그러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시선에 힘겨워함과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머니 정옥숙의 말에 따르면, 새벽마다 만날 사람이 있다며 자주 집을 나서고는 했는데 알고 보니 누나의 묘에 들렀던 것이었다. 사람들과 마주치는 게 싫다며 일부러 새벽에 나갔다고 한다. 묘 앞에 몇 시간씩 앉아 있다가 누나가 생전 살던 집에 들러 누나의 침대에 누워 있다 오는 등 좀처럼 누나의 빈자리에 적응하지 못했던 듯하다.[17] 원체 어려서부터 부모에게도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던 최진영이 누나에게만큼은 속마음이나 비밀을 허물 없이 털어놓았을 정도였다고 하니 남매 그 이상의 애틋함이었을 것이다.
사망 후 최진영은 갑산 공원 묘원에 누나인 최진실과 함께 합장되며 세상과 작별을 고하고 영면을 취하게 되었다.
4. 이후
2018년 4월 1일 JTBC '투 유 프로젝트 슈가 맨 2'에서 희열 팀 슈가 맨으로 소개되었으며 《영원》이 그의 슈가 송으로 선정되었다. 《영원》의 디렉터 조장혁, 작곡가 고성진[18], 래퍼 강현수[19]가 그를 대신하여 출연했다. 곡 녹음 당시 조장혁이 완곡으로 가이드를 녹음하고 거기에 맞춰 연습했다고 한다. 사실 최진영은 미성에 가까웠으나, 이후 노력으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되었다.[20] 이 한 곡을 녹음하는 데에만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21][22]
2022년 1월 26일 KBS2 '갓 파더'에서 조카 최환희가 KCM, 김정민, SHORRY J와 소소한 송년회를 보내다 최진영과 친분이 돈독했던 김정민이 최환희에게 과거 삼촌과 관련된 얘기를 해 주면서[23] 언급되었다. 김정민이 최환희더러 삼촌과 많이 닮았다고 얘기하였고 최환희는 그런 삼촌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2022년 5월 1일 조카 최준희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어머니 최진실과 삼촌 최진영의 사진과 '내 영원 속에서 오래오래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라는 문구와 함께 《영원》을 커버하여 올렸다.
이후 2023년 11월에는 원래 《영원》을 부를 예정이었던 김정민도 커버했다. #
5. 가족 관계
그의 아버지 최국현은 한량이었다. 가정을 책임질 능력은 물론 의지도 없었다. 자신에게 이미 두 아이[24]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옥숙에게 말하지 않은 뒤 결혼을 하였다. 툭하면 집을 나가고 종종 돌아올 때면 정옥숙의 일터를 풍비박산 내며 돈을 요구하고 심지어는 폭력까지 행사하였다. 최국현은 당시 남존여비가 극심했던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노골적으로 딸을 더 선호하고 편애하였다고 한다. 딸인 최진실에게만 용돈을 쥐여 주는가 하면 최진영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늘상 냉담한 태도로 일관했다.
최진영은 어려서부터 그런 아버지를 무서워함과 동시에 어머니를 폭행하고 자식들을 내팽개치던 그의 행태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를 때면 되려 자신이 미안해하고 부끄러워하였다고 한다. 성인이 된 후엔 어머니에게 아버지와의 이혼을 권유하였다. 여전히 바람을 피우고 돌아다니는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25] 또한, 그것을 보고 자란 자신도 그를 따라 할 수 있다 생각해 경각심을 갖고 살고자 비혼자[26][27], 무자녀자 포지션을 견지했다. 최진실 역시 아버지 최국현이 딸인 자신은 편애하면서 아들인 최진영은 괴롭힌 것을 의아해하고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도 핏줄은 핏줄인지 두 남매는 아버지를 아예 외면하진 않았다.# # #
최진영이 중학생이던 때, 가출을 일삼던 아버지 최국현은 끝내 가족을 외면하고 아예 집을 나가 버렸다. 이로 인해 정옥숙은 본격적으로 돈벌이에 나서게 되었는데 화장품 외판원, 포장마차 운영 등의 일을 하여 가정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경제 활동에 뛰어든 건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다. 자식인 최진실, 최진영 역시 미성년자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던 최진실은 햄버거 가게 알바를, 중학교 3학년이던 최진영은 휴학을 하고 공장에서 일을 하였다. 그러던 중 최진영은 쇠를 깎는 기계에 다리를 크게 다쳐 일을 그만두었고 이후 고등학교 1학년이 되면서 6촌 형 최재성의 도움으로 교복 광고 모델이 되었다. 공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교복 모델을 할 때에도 최진영은 수입이 생기면 교통비와 기숙사비 등의 최소한의 비용을 제외한 모든 돈을 가족에 가져다주었다. 어린 나이에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누나 최진실과는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서로에게 무척이나 애틋한 관계였다. 최진영에게 최진실은 누나 그 이상이었다. 집을 나간 아버지와 경제 활동으로 바쁜 어머니의 빈자리를 모두 채워 주던 부모이자 유일하게 속마음을 털어놓던 단짝 친구였다. 최진실은 학교에서 빵을 받으면 반 쪽은 꼭 집으로 가져와 최진영에게 주었다. 또한, 바쁜 어머니를 대신하여 중학생 시절부터 종종 스스로 밥을 차려 동생을 먹이곤 하였다. 그렇다고 최진실만 동생을 위하던 것은 아니었다. 최진영 역시 누나를 위해 많이 희생하고 누나를 살뜰히 챙겼다. 고등학생 시절, 학비를 낼 여건이 안 돼 전전긍긍하고 있는 어머니를 볼 때면 늘 본인은 괜찮으니 누나 것부터 해결하자던 동생이었고 누나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면 자신의 일보다 더 나서서 해결하고자 달려들었다. 그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책임감이 강했다.
최진영은 누나를 사랑하는 만큼이나 조카들을 제 자식처럼 사랑했다.
최진실이 "아버지 없이 자란 아픔을 아이들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다."며 조성민과의 이혼을 거부하던 때 "내가 조카들의 아버지 역할을 할 테니 걱정 말라"며 그를 다독이고 마음을 다잡게 도왔다. 실제로 최진영은 최진실이 살아 있을 때에도 조카들의 후견인 역할을 해 왔다.# #
2008년, 최진실이 떠났을 때 불과 6살 유치원생이던 최준희가 걱정됐던 최진영은 평소 친분이 있던 성우 이선[28]에게 "뽀로로가 되어 최준희를 위로해 달라" 부탁하였다.[29]
지인들 말에 따르면 최진영은 누나의 죽음 이후 슬픔에 못 이겨 힘겨워하다가도 조카들을 생각해서 열심히 살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실제로 그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보면 "둘째 조카(준희)가 초등학교에 입학해 학비가 만만치 않다"고 걱정하면서 "두 조카들에게 삼촌이 뭐 하는 사람인지 보여 주고 싶다." 하는 등 연예계 활동을 재개하려는 이유도 모두 조카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열심히 일해 돈을 벌어 두 아이를 보란 듯이 키우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2010년 1월 MBC '기분 좋은 날'에서 조카들과의 일상을 공개하며 다정하고 친구 같은 삼촌의 모습을 보였다.[30]
[1] 이는 2008년 MBC '우리 결혼했어요'에서도 한 번 언급된 적이 있다.#[2] 유료 콘텐츠 속 영상으로 작품 속 59분쯤 부근에서 확인할 수 있다.(선생님과 반 학생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장면)[3] 이는 2008년 tvN 예능 '현장 토크 쇼 택시'를 통해 밝혀졌다.#[4] 최진실이 일을 시작한 초기에는 최진영이 그를 따라다니며 뒷바라지를 한다. 1988년 4월에 모델 박영선이 주인공인 광고에서 뒷배경 역할을 맡게 된 최진실은 추운 날씨에 수영장에 뛰어드는 연속 촬영으로 호된 신고식을 치르게 되고, 동행한 최진영은 덜덜 떠는 최진실에게 수건을 덮어 주며 "이렇게 힘든데도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최진영은 급한 마음에 컨셉 가리지 않고 일을 하려던 최진실에게 "처음부터 길을 잘 들어야 한다."고 조언하며, 최진실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배우로 성장하도록 이끈다.[5] 제작사 씨네2000의 대표이자 영화인회의 이사장으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여고괴담》시리즈, 《더 테러 라이브》 등을 기획•제작하였다. 2021년 5월 11일,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6] 훗날 최진영이 회고하기를, 차인표는 모든 면에서 FM이고 모범적이었다고 했다.[7] 처음엔 가수의 얼굴을 안 밝혔고, 음악 방송에서 인기 순위가 올라가도 뮤직비디오만 틀다가 마침내 노래가 1위가 되자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때 배우 최진영이 무대에 나타나 대중을 충격에 빠뜨렸었다.[8] 1992~1994년 MBC 《우리들의 천국》에 함께 출연하여 친분이 있었다.[9] 조성민은 이에 대해 '쌍방 폭행'이라 주장하였다. 이는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치졸한 변명에 불과하지만 굳이 첨언하자면, 당시 조성민은 키 194cm에 체중이 100kg가 넘는 거구의 남성 운동선수였고, 최진실은 키 162cm에 체중 40kg 초반대의 작은 체구를 가진 여성이었다. 건장한 일반 성인 남성이 조성민과 붙는다 해도 동등하다 볼 수 없는 체격 차이인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또한, 폭행 행사 역시 조성민이 일방적으로 시작한 일이었고 체격적으로 보나 사건 진술에 따른 상황 판단으로 보나 쌍방 폭행이란 건 결코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다. 최진영이 찾아와 조성민의 폭행을 말리고 다퉜다고 해도, 최진영 역시 키 170cm 초중반대의 60kg 정도의 평균 체격의 남성이었고 당장 누나가 거구의 남성에게 맞고 있는 모습을 본 상태였기에, 사실 싸운다기보단 조성민의 폭행을 막고 저항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10] 실제 당시 상황을 설명해 놓은 기사를 찾아보면, 조성민은 이은정이 최진영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알게 되자, "최진영이 오면 칼로 찔러 죽이겠다."며 칼을 찾았고# 그가 도착하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내리쳐 눕히고 목을 조르는 등 일방적인 폭행을 자행했다. 이를 본 최진실이 조성민의 팔을 깨물었고, 조성민은 그런 최진실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는 신체를 발로 마구 밟았다. 또 이를 막기 위해 최진영은 최진실의 몸을 본인의 몸으로 감싸 안았다. 이 과정에서 최진실은 잠시 기절하였고, 최진영 역시 잠시 기절하고 구토하였다.# 반면, 조성민은 팔뚝에 난 찰과상이 전부였다. 다시 보자. 이게 어떻게 쌍방?[11] 상술한 이은정은 최진실의 전 매니저이자, 당시 육아 도우미였던 박진희의 딸로 최진실과 의자매를 맺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최진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바쁜 스케줄 탓에 아이들은 할머니 정옥숙과 박진희가 육아하는 일이 많았는데, 주로 최환희는 정옥숙, 최준희는 박진희가 맡았다. 최진실과 최진영의 사망 후에도 박진희는 최준희를 제 자식처럼 키우고 있으며, 최준희 역시 박진희를 자신의 엄마라고 생각한다며 따르고 있다.#[12] 이 중 한 번은 최진실, 조성민의 갈등과 이혼 관련 문제로 인해 집안을 돌보기 위함이었다.[13] 2008년 7월 초 방영된 '라디오 스타'를 필두로 '현장 토크 쇼 택시', '우리 결혼했어요' 등 많은 프로그램에 출연하였다.[14] 누나와의 약속 중 하나였다고 한다. 최진실은 어린 시절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교 과정을 끝내 못 마친 동생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대학 진학을 권유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최진실의 사망 전에 응시한 것이다.[15] 2004년 있었던 조성민의 폭행 사건에서 폭행 피해자인 최진실의 멍든 사진과 풍비박산이 된 아파트 사진을 언론에 공개한 적이 있는데, 이로 인해 기업 이미지가 훼손되고 광고주에게 손해를 입혔다고 '신한' 측에서 소송을 건 사건이다.[16] 인터넷에 '최진영 유서'라고 올려져 있는 사진은 생전 그가 홀로 끄적였던 메모일 뿐 공식적인 유서가 아니다.[17] 이러한 행동은 최진실의 유골함이 도난됐었던 후부터 특히 심해졌었다고 한다.[18] 작곡가이자 밴드 플라워의 기타리스트. 외국에서 이 노래의 리메이크 제안도 들어왔었으나 "이 노래는 영원히 최진영만의 《영원》으로 남았으면 한다."며 거절했다고 한다.[19] 실제로 《영원》의 랩 부분을 맡은 인물이다. 랩 메이킹도 직접하였다.#[20] 한강에서 연습하다가 신고를 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21] 보통 프로 가수들이 한 곡을 녹음하는 데 1프로(=4시간)가 걸리는데, 최진영의 경우 녹음과 연습을 동시에 하였고 무려 300프로(=1200시간)를 녹음에 투자했다.[22] 바뀌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그가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23] 대부분 최환희가 태어나기 전 얘기들이라서 그의 인기를 실감 못 했기에 그의 친한 지인 중 한 명인 김정민을 통해 전해 들었다.[24] 최진실, 최진영 남매의 이복형제. 두 아이의 어머니도 달랐다. 훗날 이 이복형제들이 최진영의 운구를 했다.#[25] 그 후 정옥숙과 최국현은 1998년 이혼하였다.[26] 처음부터 비혼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 평소 "결혼은 몰라도 아이는 갖지 않겠다."는 말을 지인들에게도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말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턴 결혼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는 자세를 취했다. 또한, 사망 한 달 전쯤 급격히 무기력해하던 최진영이 걱정됐던 어머니 정옥숙은 "하루빨리 참한 사람과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이뤘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하였으나 이에 최진영은 "엄마, 나에게는 나쁜 피가 흘러.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나쁜 피. 괜한 사람 데려다가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니 나 혼자 살게 내버려 둬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엄마가,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2011. 정옥숙 지음)」[27] 어머니의 결혼 닦달에 대한 자식의 흔한 대답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어린 시절 자신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벌였던 만행들과 누나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좋지 못한 결혼 생활 결말로 인해 결혼에 대한 회의감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28] 애니메이션 '뽀로로'의 성우로 유명하다.[29] 당시 6살의 최준희는 뽀로로(이선)에게 "뽀로로. 넌 엄마가 있니?"라 묻고는 "난 엄마가 없어. 하늘나라로 가셨대. 그래도 괜찮아. 보고 싶을 땐 사진을 보면 되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30] 이 방송이 최진영의 공식적인 마지막 방송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