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병장, 최경현
성명 | 최경현(崔敬賢) |
이명 | 최추현(崔楸賢) |
출생 | 1874년 |
미상 | |
사망 | 1909년 9월 12일 |
전라북도 무장군 |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
최경현은 1874년생으로 알려졌지만 출생지는 알 수 없다.
그는 1909년 무렵 약 2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라북도 무장군(현 고창군) 일대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항전했다. 그러나 1909년 9월 12일 일본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최경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고령군 출신 독립운동가, 최경현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사진. | |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학여(鶴汝) |
본관 | 양천 최씨(陽川 崔氏)[1] |
출생 | 1864년 8월 3일 |
경상도 대구도호부 (현 대구광역시)[2] | |
사망 | 1927년 11월 27일 |
경상북도 고령군 | |
종교 | 기독교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031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최경현은 1864년 8월 3일 경상도 대구도호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최철곤(崔哲坤)과 어머니 경주 최씨 최두만(崔斗萬)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경상도 고령현 하동면 매촌동(현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으며, 이곳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또한 마을의 기독교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전국 각지, 특히 인근의 경상북도 대구부와 합천군 등지에서는 3.1 운동이 전개되는데도 쌍동면(현 쌍림면)에서는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지 않은 것을 개탄했다. 이에 그해 3월 24일 오성렬(吳聖烈)의 집에서 서병직(徐丙稷)에게 독립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제의했다. 그리고 3월 27일에는 이준이(李俊伊)의 집에서 최홍석(崔洪錫)에게 제의했으며, 3월 28일에는 쌍동면 신촌동에 사는 전하성(全夏誠)에게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도중에 거사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고 말았고, 1919년 4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에 공소하였는데, 4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오히려 형기가 더 늘어나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상고했으나 결국 그해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고 경성감옥에 입소하여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26일 특별 사면으로 출옥한 후 고향에서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27년 11월 27일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최경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2년 11월 1일에 본래 고령군 쌍림면 매촌리 거물산에 안장되어 있던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했다.
3. 여담
- 외손녀 남궁혜자는 2019년 2월 현재 미국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 거주하고 있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최경현의 부인이자 외할머니인 김해금 여사는 옥중에 있는 남편을 위해 매년 9월이면 솜옷을 손수 지어 서대문형무소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