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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5:15:26

청양몽염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

1. 개요

靑陽夢炎, 생몰년 미상
남송 시기의 관원이다. 자는 재원(梓卿)으로, 사천성 성도 출신이다.

2. 생애

진사에 급제하여 회동, 호북 지역에서 관직 생활을 했다. 지리주를 지냈을 때는 가재로 20경의 밭을 사서 세입의 절반으로 양식을 팔아 빈민들에게 혜택을 주어 '의제장'이라고 불렸다. 이후 창덕부로 임지를 옮겼을 때는 빈민들이 질과 쌀을 공급하고 이자를 받지 않도록 하였다.

이단의 난 시기 이단이 몽골군에 포위되자 송 이종이 익도의 관청에 은 5만 냥을 하사하고 그 돈으로 병사들을 먹이게 하였으며, 그로 하여금 이단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청양몽염은 산동에 이르렀을 때 토벌군의 기세가 강한 것을 보고 남쪽으로 철수한다.

송 도종 함순 연간에는 가사도에게 거역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후 1275년 3월 호북제치부사 고달, 경호사천무마사 주사손과 함께 강릉을 지키고 있었다. 이때 아릭카야의 군대가 고세걸이 이끄는 군대를[1] 격파한 뒤 동정호의 도화탄까지 추격하여 그를 대파한 뒤 항복시키고, 뒤이어 악주[2]를 지키던 맹지소를 투항시킨 뒤에는[3] 사시진을 도성한다.[4] 청양몽염은 고달과 함께 이를 지켜보았고 고달은 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그 뒤 아릭카야가 항복을 권유하자[5] 그 해 4월 고달, 주사손[6]과 함께 원나라에 투항하고 만다. 그 이후 도읍으로 불려가 저택을 하사받는다. 벼슬은 한림학사에 이르렀다.

3. 가족관계



[1] 바얀의 군대가 장강의 흐름을 타고 동진할 때 아릭카야는 악주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 고세걸이 형호 지역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아릭카야는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세걸을 막으러 출전했던 것이다.[2] 호남성 악양시[3] 고세걸은 아릭카야에 의해 처형당한다.[4] 여기서 사시진을 지키던 사마몽구는 자결하고, 도통 정문량은 원에 투항했다.[5] 아릭카야의 수하였던 백아오태화상이 강릉에 항복을 권한다.[6] 주사손은 고달에게 항복을 반대하였고 독약을 먹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원나라로 압송되어 가택연금되어 있다가 1280년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