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259><colcolor=#fff> 한국화 화가, 탈 제작자, 극작가 천재동 千在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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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 | 증곡(曾谷) |
| 출생 | 1915년 1월 25일 |
| 경상남도 울산군 방어진 | |
| 사망 | 2007년 7월 26일 (향년 92세) |
|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동의의료원 | |
| 직업 | 한국화 화가, 극작가, 탈제작자, 무용안무가, 야구선수, 축구선수 |
1. 개요
증곡 천재동은 울산 출신의 화가, 극작가, 무용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가면제작) 기능보유자, 축구선수, 야구선수이다.[1]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부산 예술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인물이다.2. 생애
천재동(千在東)은 경상남도 울산군 방어진(현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에서 태어나 남목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도쿄[東京] 가와바타미술학교의 소묘과를 수료하고, 조교를 지내다가 같은 학교 특설 인체과를 중퇴하였다.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 11월에 귀국하여 1944년 서정자와 결혼하였다. 25년간 평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토우 만들기와 창작 가면 전시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화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천재동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다섯 가지 전공을 토우, 동요 민속화, 연극, 탈·가면, 민속놀이라고 밝혔다.1945년 10월 첫 개인전인 ‘광복 축하 유화전’을 개최한 이후 천재동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화려했다. 1965년 10월 한국 최초의 창작 가면 전시회인 제2회 천재동 탈 작품전[86점 전시]을 개최한 이래, 1999년까지 모두 스물다섯 번의 탈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996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원로 작가 초대전을 비롯한 일곱 번의 각종 초대전에도 작품을 출품하였다.
연극 활동도 다채로웠다. 1946년 3월 방일 방공을 내용으로 한 부락민 계몽 운동 작품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한 것은 천재동의 작품 활동의 시초가 되었다. 천재동이 만든 아동극단으로는 한나라·갈매기·바다 등이 있고, 연극 가족 운동으로 창단한 드라마센타 부산극회는 살롱 드라마 형식의 작품인 「붉은 카네이션」·「위협」·「대합실」·「흥부전」 등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1978년에는 극단 마당을 창단하여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였다.
1965년 10월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민속 예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 3월 독일 뤼브케 대통령 부산 방문 환영 ‘민속 길놀이’ 제작 총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69년에는 동래 야류 연희본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1972년에는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3호인 동래 학춤 무보를 작성하였으며, 이와 함께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4호 동래 지신밟기 연희본을 채록하여 정립하였다. 같은 해에는 동래 야류 길놀이 「도해화」를 완성하여 오늘날의 길놀이 표본을 만들었다.
1981년에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사 행렬을 단독 채록하여 도해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래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1991년 8월에는 제4회 민족 통일 대동 장승굿 대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숱한 봉사 활동을 통해 불우한 이웃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부산 시민 위안 민속놀이 대잔치’라는 명칭으로 5회의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천재동 화백은 별세한 그 해까지 활발히 활동했는데, 2007년 2월 동래구의 한 주민잔치에서 부상을 입은 이후 급격히 노쇠해져 2007년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1] 축구와 야구는 해방 전에 했다고 천재동 회고록에 적혀있다. 직접 축구단과 야구단을 사람을 모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