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대전 | ||
장소 | ||
중화제국과 청의 국경 황하 일대 | ||
기간 | ||
1871년 여름 ~ 1871년 가을 | ||
교전세력 | 대한제국 청나라 프랑스 극동함대 | 중화제국 |
지휘관 | 이형 공친왕 한성근 사르네 제독 | 이홍장 |
병력 | 대한제국군 25만 6천 명 청군 40만 총 65만 6천 명 | 최소 250만 이상 최대 300만 |
피해 규모 | 대한제국군 전사자 2천 명 부상자 2만 6천 명 행방불명자 8천여 명 포함 1척 침몰 청군 전사자 10만 명 | 전사자 30만 포로 70만 도주 150만 (추정) |
결과 | ||
한청연합의 승리 | ||
영향 | ||
이홍장의 사망, 중화제국의 멸망, 천자질서 파괴 강남 일대의 고대 주나라 체계 회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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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 나오는 가공의 전쟁. 작중에서 다섯 번째로 등장하는 전쟁이자 고종의 네 번째 친정. 동시에 동아시아의 패권을 판가름하는 결전이다.2. 배경
중화제국은 건국부터가 모순에 휩싸여 있었다. 멸청흥한을 구호삼아 일어났으나 정작 건국 시조인 이홍장은 개혁을 위해 양민들을 탄압했고, 열강과 군벌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않고 제멋대로 굴면서 전횡을 일삼았다. 상황을 이해할 지식이 있었던 중산층과 지식인 상당수는 이러한 처세에 미래가 어두움을 깨닫고 가까운 대한제국으로 귀화했고, 이는 중화제국 내부의 농민들의 분노가 커지는 효과를 낳았다.더욱 본격적인 계기는 영국이 중화제국을 경계하면서 시작되었다. 영국은 중화제국이 근대화로 국력을 키워 대만을 회복하려 들 것이 걱정되었고 이를 막기 위해서 대만의 쌀값을 대폭 내려서 대만 인구를 증가시키기로 한다. 이를 위해 강남 일대의 곡창지에서 쌀을 엄청나게 사들여 대만에 싸게 공급했고 이는 괜찮은 성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강남 일대의 쌀값이 폭등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고, 게다가 '풍년'이 들어 수확량이 대폭 증가하자, 영국 상인들도 상황을 알고는 폭등한 쌀값을 지불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자 지주들은 쌀값의 폭락을 막기 위해 논과 밭을 불태우는 짓까지 일삼았고,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던 농민들은 황금빛으로 물든 논에 불을 붙이는 지주와 상인들, 그리고 먹을 게 없어 굶어 죽어가는 가족들을 보고 이성을 잃는다.
3.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개입
이형은 이미 이하응을 통해 강남 일대의 대혼란을 전해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사태 자체가 워낙 어이없는 일이었기에 설마 능력 있는 군벌 이홍장과 일류 열강 영국이 통제하지 못라리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벌인 일의 파장으로 두 세력의 힘이 크게 깎였음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훗날, 청나라와 조약을 맺기 위해 만난 공친왕은 강남 일대의 대재앙에 대해 울면서 하소연하고, 이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한다. 이형은 범아시아 조약기구의 첫 업무를 '강남의 구호물자 보급'으로 삼고, 청국과 일본이 난민 수십만을 받아들이고[1] 쌀과 일상용품을 보급하는 등 구호활동을 통해 어떻게든 강남 일대의 폭동을 진정시켜보려 한다. 또한 프랑스 공사인 벨로네를 입궁시켜 그에게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부탁해서 프랑스 극동본부가 베트남에서 풍년으로 수확한 쌀을 대량으로 공출해 수십만 명은 되는 난민을 구제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대처에도 중화제국의 혼란은 호전되지 않았다.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던 영국이 중화제국 정부에 무기와 구호물자를 풀면서 중화제국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로 연착륙한 것이다. 결국 1년이 지날 때쯤 중화제국은 각지의 군벌들이 독자세력화하였고, 이성을 잃은 농민들이 정부를 증오하면서도 당장의 끼니나마 얻기 위해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중화제국은 결정적으로 이 모든 것이 열강과 그 앞잡이 대한제국 때문이다! 하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청나라로 쳐들어온다.
결국 이형은 정말로 하기 싫었던 총동원령을 발령. 전쟁영웅 소년 황제가 직접 내린 교서에 감격한 한반도 각지에서 전국민들이 거든 끝에 대한제국은 원정군 25만을 포함한 총병력 50만이란 대군을 갖추게 된다. 몽골은 러시아에 붙은 외몽골 부족들과 내전 도중이었고, 일본은 아직 무진전쟁의 후유증이 컸던데다 함부로 힘을 실어주었다가는 언제 기어오를지 몰랐기에 보류. 신생 왕국인 대만의 군사력은 별 도움도 안 되었다.
4. 진행 과정
4.1. 개전
이홍장은 결국 붕괴해가는 현실에 마지막 도박수를 걸고 청나라를 향해 진군을 시작한다. 중화제국의 해군은 청불의 해군과 황하에서 벌인 해전에서 패배해 황하의 장악에는 성공했지만, 각지에서 합류하는 군벌들의 합류로 머릿수만 따지면 최소 250만 이상, 최대 3백만에 육박하는 대군(빙자한 도적떼)이 된 중화제국군은 멈추지 않고 황하에 도착한다.대한제국군 25만은 청나라에 도착했지만 이형은 공친왕이 겨우 40만 명밖에 징집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어이를 잃는다. 공친왕은 서러워하며 '민족주의'의 확산과 '권위'를 잃은 청나라에는 이제 백만대군을 모을 능력이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일전에 대한제국이 중원의 사람들에게 노동 비자를 발급해준 적이 있었는데 청나라에 전운이 감돌자 죄다 해외 취업을 빌미로 징집을 거부하고 튄 것이다. 물론 대한제국도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지만 적어도 청나라보다는 희망이 느끼는 사람들이니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이에 이형은 우선 한국군이 100만에 달한다고 허장성세를 부려 청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역으로 청군을 향한 심리전을 계획한다. 황하에는 유람선이 떠다니면서 음악과 춤, 폭죽이 울려퍼지고 이형의 특별명령으로 잔칫상이 차려진다.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는 못하고 잡곡과 풀죽 같은 걸로 연명하던 중화제국의 농민군들은 이에 이성을 잃었고, 이홍장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군량을 죄다 짜내서 아군을 배불리 먹여야 했다. 그러나 이래서야 군세를 유지할 수가 없었기에 결국 빠른 공세를 계획한다.
결국 65만의 한청연합군은 황하 일대에서 이홍장의 중화제국군과 대면하고 강남일대의 대기근을 대한제국 탓으로 돌리며 이형에게 천자를 참칭하는 역적이라 외치는 이홍장에게 이형은 "짐은 천자가 아니라 대초원의 제50대 대칸인 바다라울트 투르 칸이시다!"라고 선포해서 중원의 혈사의 근본이던 천명가치관을 파괴한다고 선언한다.[2]
이홍장: 코딱지만 한 것이 잘 보이지도 않는구나. 그래, 네놈이 감히 황제를 참칭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대역죄인 이가 놈이렷다! 이형: 코딱지만 한 것이 잘 보이지도 않는구나. 그래, 네놈이 감히 황제를 참칭하여 천하를 어지럽힌 대역죄인 이가 놈이렷다![3] 이홍장: 이 코딱지만 한 역적 놈아, 네놈의 죄를 네가 알렸다! 이형: 모르겠다! 내 갖은 패악질을 저질렀어도 백성들을 굶긴 적은 없거늘, 어딜 염제 신농께서 복되디 복된 풍년을 해를 이어 내려주어도 백성들을 굶긴 도적 놈이 이 몸 어르신께 역적 운운 질이더냐! 이홍장: 그것이 어찌 나의 잘못이더냐. 너희 오랑캐들과 양이 놈들이 손을 잡고서 이와 같은 패악질을 저질렀음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천하 만민이 알고 있거늘! 양이들과 패를 이루어 동맹을 맺은 것이 그 증거! 천자를 참칭하여 하늘을 우롱하고 민생을 빠트린 그 죄! 오늘 이 이홍장이가 천명을 받아 하늘에 계신 상제를 대신하여 벌하여주겠노라! 이형: 푸-하하핫! 우선 두 가지만 정정해주마. 첫째. 설령 그것이 바르다고 한들, 지금 네놈들이 하려는 일은 무엇이더냐? 결국 이 땅을 약탈하여 당장 너희들의 주린 배를 채우려는 것뿐이 아니더냐. 그것이 도적 떼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고작 해봐야 좋은 병장기를 두르고 있다고 한들, 도적 두목이 태산에 올라 천명을 받을 수는 없음이라! 이홍장: 오랑캐 놈이 세치 혀를 놀리는 재주만 갈고 닦았구나. 당장 거짓부렁만 지껄여대는 그 입을 다물지 못할까! 이형: 그리고 둘째, 텡그리께 천명을 받은 대초원의 대칸께 땅이나 파먹고 사는 농사꾼 나부랭이가 주제넘게도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이 몸 어르신께서는 예케 쿠릴타이에서 정당하게 우르스, 밍간들에게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오른 예케 몽골 울루스의 제 50대 대칸 바다라울트 투르 칸이시니라! 천자를 참칭하였다고? 예케 몽골 울루스의 밍간으로서 대초원을 발 아래에 두고서 우르스, 밍간들에게 추대를 받아 정당하게 제위에 올랐으며 아이신기오로의 공주와 혼인하여 적장자를 본 이 몸께 그게 무슨 망발이더냐! 내 너희 족속들을 산채로 가죽을 벗겨 나무에 매달아 독수리들이 그 간을 쪼아먹게 해주겠다! |
이윽고, 전투가 시작되었지만 이형의 우려대로 아군인 청군의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사기가 바닥을 기는 것은 물론이고, 만주족 무관과 한족 무관의 대립까지 이어지면서 불협화음을 이어가는 중. 심지어 공친왕이 직접 친정을 왔는데도 이렇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중화제국군은 수십만이나 되는 머릿수를 앞세워 도하를 시도하지만 근대화된 함선과 함포로 무장한 한불 연합의 함대에는 그저 수만 많은 과녁에 불과했다. 워낙 수가 많으니 그래도 수천 명 이상이 도하해 성공했으나 이미 강 건너에 참호선을 구축해놓은 대한제국의 기관총과 대포에서 쏘는 산탄에 쓰러지기 일수. 하루 종일 이어진 혈전 끝에 저녁에는 양군이 후퇴한다. 그리고 이 시점의 교환비는 중화제국군은 포로가 6만에 사상자 2만 6천 명, 한청연합의 사상자는 대한제국 소속 포함 1척[4]과 6백여 명으로 교환비는 150대 1에 달했다. 사르네 제독과 공친왕은 대승을 거뒀노라 자축하지만, 이형은 더 빨리 전쟁을 끝내야겠다고 판단하고 포로들을 이용한 사면초가 작전을 시작한다.
4.2. 심리전
개전 전부터 중화제국군은 강 너머에서 들리는 풍악과 폭죽, 고기 냄새에 분노와 서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이홍장은 급한대로 군량미가 바닥을 드러날 상황을 인지하면서도 병사들에게 먹일 야식을 두둑히 준비하라 명을 해둔다. 그러나 갑자기 포로들의 강남 민요에 중화제국군 병사들은 서러움이 복받친다. 게다가 중화제국 정규군과 군벌군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는 상황. 농민들은 배운 것은 없을지언정 바보는 아니었기에 작년 식량난의 주범들에는 중화제국 정부와 군벌들도 예외가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전쟁에 회의를 느꼈다. 이에 중화제국군 병사들은 일제히 탈영을 감행하여 중화제국군은 개전 이틀 째되는 날에 20만이나 되는 병사들을 탈영으로 잃어버렸다.이에 농민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던 군벌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이홍장에게 달려가 다음 전투에서조차 나서지 않으면[5] 자신들을 배신한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라고 협박한다. 이홍장은 그대로도 군량이 얼마 남지 않아, 강남의 사분오열시켜서 시한부가 되거나, 황하를 넘어 결전을 치르는 수밖에는 남지 않은 상태였다.
4.3. 중화제국군의 총공세
이에 이홍장은 이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 재차 도하를 시도한다. 그래도 중화제국군은 아직 100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개판인 청군의 분위기와 정예지만 숫자가 딸리는 대한제국군을 이용하여 청나라군 담당의 방어선에 공격을 집중한다. 이홍장이 직접 진격하고 중화제국군 해군이 상륙지원에 집중하면서 전날과는 달리 제대로 된 상륙장비들이 갖추어진 중화제국군은 그래도 사기가 낮고 한족과 만주족 무관들 간의 알력다툼이 심했던 청나라군의 방어선을 뚫고 도하에 성공한다.결국 양익을 담당하던 청나라군이 먼저 후퇴하며 사라졌고, 이에 따라 중화제국군의 집중공격을 받은 대한제국군의 피해가 늘어나기 시작한다.[6] 결국 한청연합군은 오후 1시경에 후퇴를 한다. 마침 연합함대가 상륙을 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에 이홍장은 추격을 중지하면서 도하에 집중하도록한다. 그리하여 연합함대 역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승리도 잠시, 잘 훈련된 정예병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화제국군 병사들은 상관의 통제에 벗어나 전리품을 노리며 추격을 한다. 그리고 화약과 피냄새가 사라져가는 전장에서 버려진 연합군의 진영에 있는 수많은 가마솥에 끓여진 고깃국들을 보게 된다. 배고픔으로 군에 들어간데다가 새벽부터 싸워서 허기로 가득했던 중화제국군 병사들은 당연히 눈이 뒤집혀서 죄다 대열에서 이탈해 가마솥으로 몰려들었고 그렇게 중화제국군 병사들은 상관들의 통제를 잃고 고깃국을 먹으려 쟁탈전을 벌이며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4.4. 연합군의 함정, 중화제국군의 붕괴
사실 이는 대한제국군의 함정이었고, 중화제국군 병사들이 의도적으로 설치한 가마솥들에 있던 고깃국을 먹으려고 달려들어 난장판이 된 그 순간 이형이 직접 이끄는, 대한제국군 정예 흉갑기병대 1만 6천여 명이 들이닥쳐 기습한다. 당연히 중화제국군은 그대로 공격을 받아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완벽한 기습에 당해버린 이홍장의 충신들은 후퇴를 간청한다. 하지만 이미 후방의 황하는 한불의 함대가 멀찍이서 지켜보는 상황인데다가 군벌들 상당수가 상황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물러서면 더는 뒤가 없다는 것을 직감한 이홍장은 결사 항전을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훈련이 잘되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이홍장 친위군은 방진을 짜고 중기병군단을 정면에서 맞이할 태세를 갖춘다. 그러나 그 때 멀찍이서 지켜보던 한불함대는 이홍장의 시선이 전방의 중기병군단에 팔린 사이 근접해왔고, 그대로 이홍장 친위군의 후열에 포격을 퍼붓는다.그리고 후열의 붕괴에 당황한 친위군의 앞으로 고량주를 들이키는[7] 이형과 정예 기병들이 함대에서 쏘는 포화 한가운데를 돌파한다.(!) 그렇게 들이닥친 기병대에게 손쉽게 이홍장 친위군을 비롯한 중화제국군의 미약한 저항이 분쇄되며, 절망한 이홍장 본인은 이형에 의해 목이 잘리게 된다.
이것을 본 연합군은 사기가 올랐고, 군벌들과 중화제국군은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대한제국 흉갑기병들의 방해로 조직적 후퇴가 불가능해지면서 중화제국군은 무질서하게 도주를 하게 되고, 한성근 준장의 명으로 후퇴하던 대한제국군이 반전하여 전장으로 도착한다.
그뒤 포병들이 공포탄을 쏘며 혼란을 가중시키는 동안 중기병들이 중화제국군의 후퇴를 방해하고,경기병들이 진로를 막았으며, 보병들이 강권하며 중화제국군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렇게 황하전투의 막이 내리는 시점에는 중화제국의 수도인 난징에도 프랑스 해군의 도움을 받은 3만 정예군과 대만의 섭정공 이하응이 파병한 상륙군이 난징을 접수하고 있었다. 가진 모든 여력을 황하로 보내 지킬 사람도 없었던 난징은 무력하게 범아주 조약기구의 손에 들어왔으며, 이홍장의 패배가 전해지면서 산발적인 저항도 사그라든다.
그렇게 천명대전의 막이 내린다.
5. 전후 처리
내부의 여러 모순들을 이홍장의 카리스마로 간신히 누르며 버텨온 중화제국은 이홍장이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붕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황하일대에서 이홍장과 중화제국군을 무너뜨린 이형은 3만의 기병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빠른 속도로 중화제국의 수도인 난징으로 향하고, 자연스럽게 남은 군벌들의 항복을 받아내며 난징에 무혈입성한다. 그렇게 중화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중화제국군 수십만 명은 사실상 난민으로 간주되었고, 다시 황하를 건너 황하와 장강 사이 화중 일대에 정착하게 된다. 하지만 전투에서 도망치거나 하여 포로가 되지 못한 일부 패잔병들은 화북 일대에 침투하여 도적이 되었고[8], 이는 두고두고 화북 일대의 골칫거리가 된다.
이후 한성근 준장이 지휘하는 대한제국군이 태평천국까지 소멸시키면서 대한제국은 사실상 중원을 장악했고, 이형은 자신이 갖고 있는 대칸의 직위로 충분하다며 천자의 자리를 부정하고 천자로서 중원을 직접 통치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중원은 이형에 의해 9개로 쪼개지고 주나라의 시절로 돌아가게 된다.
한편, 난징에서 어느 정도 전후처리를 끝낸 이형은 몽골부족을 이끌고 러시아령 중앙아시아를 침공하게 되고, 대한제국군도 이에 맞추어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극동 러시아로 침공해 들어간다.
6. 관련 문서
[1] 청나라의 공친왕이야 뭐, 난민들이 본래 청국의 백성이니 적극적으로 받아준다. 반면 일본의 정이대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막부에 적대적인 사쓰마와 조슈에 난민들을 풀어 난민들과 토박이들끼리 서로 아옹다옹하게 만들어 토막 세력으로 하여금 막부에 신경쓰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2] 진시황으로부터 시작된 고대부터 이민족과 한족 왕조들이 이어오던 천자 직함의 권위를 그 최유력후보가 스스로 부정하고 '천자 직함 없이 통치하겠다.'는 선언이다. 유자들 입장에서는 제대로 된 자리에도 안 오르고 제대로 통치할 수 있을 리 없는 일이지만, 이형은 주나라 시절의 천자를 명분으로 세워서 실질적인 위치는 거의 바꾸지 않고도 영향을 키우는 데 성공했다.[3] 이홍장이 말한 걸 이형이 그대로 흉내낸 거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홍장, 이형 두 사람 모두 이씨 성을 쓴다. 심지어 한자도 오얏 리(李)로 똑같다.[4] 중화제국군의 직격탄을 맞고 탄약고가 유폭되어 침몰했다.[5] 이전 전투에서는 이홍장은 직속군을 내세우지 않고 휘하 군벌군을 주로 선두에 내세웠다.[6] 당시 대한제국군 포병들은 방열시간을 갖지 못한채 지속적으로 포격을 하느라 제1차 조청전쟁처럼 대포의 유폭이 발생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7] 친정 당시 황후가 약과 술 중 하나만은 하지말라고 부탁을 하였고 이에 고종은 황후의 부탁대로 고량주만 먹었다.[8] 사실 대한제국군은 무기를 버린 패잔병은 내버려둔채 무기를 든 인원들에 집중했다. 그러나 그 숫자가 너무 많았고, 무기들 역시 농기구였기에 많은 수가 무기를 챙겨서 도주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