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앨빈 베크위스 Charles Alvin Beckwith | |
출생 | 1929년 1월 22일 |
조지아주 애틀랜타 | |
사망 | 1994년 6월 13일 (향년 65세) |
텍사스주 오스틴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
최종 계급 | 미국 육군 대령 |
복무 기간 | 1952~1982 |
학력 | 조지아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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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이다.2. 생애
조지아 주 애틀랜타 출신으로 고교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하며 올스테이트에 선정된 유망주였다. 고교 졸업 후 조지아 대학교 ROTC에 입단했고 그와 동시에 미식축구선수로 학교를 대표하는 스포츠맨인 레터맨에 선정되며 맹활약했다. 1950-51 NFL 드래프트에서 그린베이 패커스에 지명되었으나 군인에 대한 열정이 강해 미식축구를 포기했다. 1952년에 미 육군 소위로 임관해 6.25 전쟁으로 한국에 주둔중이던 미 육군 제7보병사단 17보병연대의 보병 소대장으로 참전한다.이후 1955년 부터는 제82공수사단의 504공수보병연대에서 중대장을 역임한다. 이후 1958년에 레인저 스쿨을 졸업하자마자 그린베레(육군 특전단)에 지원하여 제7특전단에 배치된다. 1960년에 특전단 대위였던 베크위스는 당시 내전이 한창이었던 라오스에 2년간 파병된다.
이후 1962년부터 1963년까지 1년간 영국 특수부대인 SAS에 교환장교로 파견되었다. 이 시절 베크위스는 SAS와 함께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분쟁'에 참여하여 게릴라전을 수행한다. 그러다 말레이시아의 정글 속에서 전염병인 '렙토스피라병'에 걸려 목숨을 잃을 뻔하나, 의사들의 예상을 깨고 몇달 만에 병원에서 다시 회복한다.
파견근무를 마치고 본국의 제7특전단에 배치된 베크위스는 꾸준히 상부에 영국의 SAS와도 같은 '정예 직접타격 (Direct Action) 부대'의 창설을 상부에 건의하지만,[1] 상부에서는 베크위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기존의 그린베레(특전단)와 그 임무가 중첩되는 부대를 만들 필요가 없다.' '우리가 SAS보다 못난 게 어디가 있어서 영국식 특수부대를 만들어야 하는가.' 같은 차가운 반응만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제7특전단의 작전장교시절 그린베레의 훈련과정을 획기적으로 바꾸는데 돌입한다. 베크위스는 '유능한 비정규전(Unconventional) 특수부대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는 먼저 훌륭한 정규전(Conventional) 보병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린베레(육군 특전단)에 오기전에 소총수 보병 소대장과 중대장을 경험하고 왔는데, 내가 특전단에 와보니 정규전 부대에서 복무한 적이 없는 장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2] 라고 말하며, 당시 제7특전단의 훈련 과정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오늘날 그린베레의 선발과정인 Q코스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된다.
베크위스가 델타 포스를 창설할 수 있었던 것은 1975년에 포트 브랙의 육군 특수전학교[3]에서 근무 도중, 특수전학교의 지휘관인 로버트 킹스턴 소장의 도움을 받게 되면서였다. 베크위스와 킹스턴 장군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던데다, 킹스턴 역시 영국군 공수부대에서의 교환근무 경험이 있던지라 베크위스의 '미국판 SAS' 창설계획에 대한 지지자였다. 킹스턴은 자신과 친한 육군의 작전/계획 부참모총장 (The Army's Deputy Chief Of Staff For Operations And Plans)인 에드워드 마이어 장군을 통해 국방부에 베크위스의 SAS 프로젝트를 소개해주면서 베크위스의 계획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
이후 1976년 8월, 향후 델타 포스의 창설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사건이 벌어진다. 킹스턴 장군과 베크위스 대령이 보병학교에서 윌리엄 듀푸이 장군[4]에게 SAS의 우수함과 미국판 SAS의 필요성에 대해 소개하게 되었는데, 듀푸이 장군 역시 육군 특전단이 지나치게 게릴라전에 쏠려있고, SAS와 같은 직접타격 작전을 상대적으로 외면한다고 생각하던지라 베크위스의 계획에 찬성하여 후일 델타포스라 불리게 될 '미국판 SAS'의 창설에 큰 도움을 주며 그 계획을 펜타곤까지 이끌어준다.
특히 듀푸이 장군은 이 과정에서 베크위스에게 중요한 조언을 하나 해주는데, 이는 새로이 창설될 특수부대가 그때까지 미군의 그 어느 특수부대도 수행하지 않는 새로운 능력, 즉 "대테러작전 수행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후 1977년 육군 참모총장을 앞에 모셔둔 프레젠테이션에서 SAS스러운 새로운 특수부대 창설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끌어낸 베크위스에게 드디어 새로운 특수부대의 조직과 장비 편제, 그리고 필요 예산안을 준비하라는 요구가 들어온다. 그러나 하필 이때 베크위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특수전학교 교육단장 킹스턴 장군이 제1특전단의 K분견대[5]로 전출되고, 이후 베크위스의 프로젝트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맥멀 장군이 새로운 교육단장으로 부임해온다. 맥멀 장군은 새로운 특수부대의 등장을 달갑잖게 여기는 기존의 특수부대 지휘관들의 말빨에 넘어가 베크위스와 기존 특수부대원들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새로운 특수부대가 자신들의 입지를 약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그린베레나 레인저대대[6]의 견제를 받는데다가, 육군 참모총장의 공식 부대창설 재가는 떨어지지 않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어 베크위스의 염통을 쫄깃쫄깃하게 만들었다. 특히 베크위스의 속을 박박 긁었던 것이 바로 블루 라이트라고 불리는 제5특전단 예하의 임시 대테러부대였는데, 원래 창설 목적은 델타 포스가 대테러전 능력을 확보할 때까지의 땜빵이었지만 맥멀 장군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블루 라이트를 델타 포스를 대신하는 정식 대테러부대로 키우려는 움직임이 활발했기 때문이다.[7] 결국 블루 라이트는 델타 포스와의 경쟁에서는 밀렸지만, 그린베레로 원복한 뒤에는 베를린 A 분견대[8]와 함께 각 특전단 직할 대테러 특임대인 "그린베레 CIF"팀으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지지부진한 상황은 엉뚱하게도 서독에서의 도움으로 해결이 된다. 1977년 10월, GSG-9이 서독의 테러리스트 단체인 바더 마인호프 (적군파)에 의해 납치되어 소말리아에 착륙한 루프트한자 여객기에 대한 인질구출작전을 성공했다는 소식이 미국까지 날아온 것이다. 이 소식을 통해 군 상층부에서 대테러전 능력에 대한 필요성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면서 베크위스의 델타 포스 창설계획은 다시금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결국 1977년 11월 19일, 델타 포스의 본격적인 '가동'에 대해 군 수뇌부의 공식적인 허가가 떨어진다.
하지만 첫 번째 실전이였던 테헤란의 미 대사관 인원을 구출히는 독수리 발톱 작전에서 모래폭풍으로 헬기가 추락해 8명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얼마 못가 1981년 대령으로 퇴역했다. 퇴역 후 전술 컨설턴트로 일하다가 1994년 자연사로 사망했다.
3. 여담
슬하에 딸이 셋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전 델타포스 상사였던 폴 R. 하우와 결혼했다.[1] 흔히들 델타포스를 '미 육군의 대테러부대'라고 오해하고 있지만, 대테러전은 델타포스가 수행하는 임무들 중 하나일 뿐이다. 참고로 영국의 SAS가 대테러전 능력을 구축하게 된 계기는 1960년대 말엽에 북아일랜드에서 IRA와 투닥거리게 되면서부터이다. 60년대 초에 영국을 다녀온 베크위스는 대테러전에 대해 뭘 배울 기회 자체가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2] 오늘날에야 육군 특전단(그린베레)의 12명으로 구성된 A팀장은 대위 계급이지만, 60~70년대 베트남 전쟁까지만 해도 이제 막 새롭게 임관한 소위나 중위 계급의 장교들이 팀장을 맡는 경우가 있었다.[3] 당시의 이름은 'U.S. Army Special Warfare School'. 그 후 이 특수전학교는 특수부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었던 존 F. 케네디 前 대통령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딴 존 F. 케네디 특수전학교 (John F. Kennedy Special Warfare Center and School)란 명칭으로 1982년에 변경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4] 공지전의 시초가 된 단기화력전 개념을 정립한 듀푸이 개혁을 주도한 인물.[5] 대한민국의 주한미군으로서 상주하는 그린베레 병력이다. 이들이 대한민국 특전사의 각 여단들에도 '특전부대 연락관'이란 직책으로 상주 근무하고 있다.[6] 베트남전때까지만 해도 레인저 부대는 지금의 제75레인저연대처럼 하나로 통합된 단일 부대였던 게 아니라, 여러 야전 사단 부대들에서 필요에 따라 소규모의 레인저 중대들을 자체 조직해서 운용해왔다. 베트남전 이후인 70년대 중반부터는 잔존 레인저 중대들 몇개를 모아서 만든 2개의 레인저대대가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제75레인저연대'라는 단일 부대는 1980년대에야 비로소 창설된다.[7] 블루 라이트도 해체 전까지 상당한 대테러전 능력을 쌓고 있었다.[8] 임무는 베를린에 있는 공산권 스파이의 암살이나 납치 그리고 사보타주가 주 임무라서 대도시인 베를린이라는 특징 때문에 시가전과 실내전에서는 델타포스와 블루라이트와 비교를 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