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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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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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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부산대학교 총장
<colbgcolor=#79d2cc><colcolor=#fff> 부산광역시교육감 예비후보
차정인
車正仁 | Cha Jung-in
파일:차정인(법조).jpg
출생 1961년 2월 28일 ([age(1961-02-28)]세)
경상남도 창원군
(現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본관 연안 차씨
학력 부산대학교 대학원 (법학 / 박사)
현직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2025년 재보궐선거 부산광역시교육감 예비후보
약력 제28회 사법시험 합격
제18기 사법연수원 수료
서울남부지방검찰청 검사
변호사(민변)
부산대학교 교수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장
부산대학교 총장
수상 1997년 독서문화상 대통령상(대상)


1. 개요2. 생애
2.1. 학창시철2.2. 사법연수생 시절2.3. 검사 시절2.4. 변호사 시절2.5. 교수 시절
2.5.1. 총장직선제 투쟁과 승리2.5.2. 법학전문대학원장으로 선출2.5.3. 대학총장 시절
3. 여담
3.1. 조민 씨 입학 취소 관련
4.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육인. 전직 부산대학교 총장. 국가거점국립대학교 총장협의회 회장이다. 현재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다.

2. 생애

1961년 경상남도 창원군(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봉곡리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막내로, 부모님과 형제들의 사랑 속에 성장하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름은 돌림자 바를 正(정)에 어질 仁(인)이다. 중국에서 정인(情人)은 애인이란 뜻이다. 진전중학교, 마산고등학교를 거쳐 부산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2.1. 학창시철

차정인은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농촌에서 형제들과 좁은 방에서 부대끼며 자라다보니 부모 형제들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보던 동아일보를 어깨너머로 읽으며 사회적 이슈에 조금씩 관심을 가졌고, 이를 통해 사회의식도 서서히 형성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정부와 대립각을 가장 많이 세운 신문으로 사회적 쟁점을 접할 수 있는 중요한 창구였다.[1] 1979년 부산대학교 법정대학 법행계열로 입학했다. 원래는 시를 암송하고 책 읽기를 좋아해 국문과 진학을 꿈꿨으나 나이가 스물한 살이나 많은 큰형(고 차정문 검사)의 영향으로 법대를 선택했다.[2]
대학시절, 큰형이 권한 소설책 현기영의 ‘순이삼촌’과 윤흥길의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를 읽고 우리 현대사에서 가려진 진실을 알게 되었고 역사의식이 확장되는 느낌이 들었다.[3] 1979년 10월 부마항쟁 당시 차정인은 학생들과 시민들과 함께 어깨를 걸고 시위에 나섰다. 1980년 5월 '서울의 봄' 시기에는 대학 집회의 자유발언 시간에 신군부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는데, 엉뚱하게도 뒤늦게 10월초에 경찰에 불법연행되었다. 동래경찰서 인근 여관방에 연행된 그는 아침 8시부터 11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당시 사복 형사들은 그를 5월 집회의 주요 연사로 주목했고, 10.16 항쟁 1주년을 앞두고 미리 시위를 막기 위해 예비 검속을 했던 것이다.[4]#

2.2. 사법연수생 시절

1986년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89년에 사법연수원을 18기로 수료했다.[5]

사법연수생 시절 87년 6월항쟁이 일어나자 연수생 20여 명과 ‘호헌철폐! 직선제쟁취!’ 구호를 외치며 최루탄 사이를 겁 없이 뛰어다녔다. 당시에 같은 연수생인 문무일이 “형은 서울 지리를 잘 모르니까 내하고 꼭 같이 다녀야 된다”고 하여 한 조가 되어 같이 다녔다. 그해 12월 양김이 분열되어 치른 대선 때에는 부산YMCA를 찾아 공정선거감시단을 자원하여 야당 추천 선거관리위원으로 구서동 제2투표구에 배치되어 활동했다. 교육받은 대로 트럭에 투표함을 싣고 투표함 위에 앉아 동래여고에 마련한 개표소까지 인계했다. #

2.3. 검사 시절

차정인 연수생은 맏형인 고 차정문 검사(고등고시 사법과 16회) 길을 따라 검사를 지망했고, 임관 후 강력전담을 자원했다. 1993년 3월까지 창원지검, 대구지검 상주지청, 서울남부지검 검사로 근무했다. 상주지청 근무 중 당시 최틀러라고 불리던 최병렬 노동부장관 취임 후 전교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될 때였는데 전교조 상주지회의 간판철거영장이 상주지청 공안부서로 청구되었다. 그런데 공안 담당검사가 출장 중이어서 차정인 검사가 대신 공안사건을 맡게 되었고, 그는 간판 철거를 위한 압수수색 영장에 서명을 거부하며 자기의 신념을 지켰다.[6]

2.4. 변호사 시절

1993년 검사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창원으로 돌아와 변호사로 활동했다. 검사가 중요한 공직이며, 정의로운 검사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러나 사람을 조사하고 처벌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것이 당시 차정인의 생각이었다. 차정인 변호사는 민변 소속 변호사로서 시국사건, 저소득층 무료 변론에 앞장섰다. 차정인 변호사는 1994년 경상국립대 정진상, 장상환 교수 등의 공저 『한국사회의 이해』를 문제 삼은 국가보안법위반 사건을 당시 문재인 변호사, 강재현 변호사와 공동변론하여 구속영장 기각과 무죄판결을 이끌어냈다. 이 사건은 공안검찰에 맞서 학문의 자유를 지킨 대표적 사례로 평가 받는다. #
또한 차정인 변호사는 YMCA, 여성의 전화, 경남여성회, 경남이주노동자상담소 등에 동료변호사들과 함께 ‘따뜻한 손 변호사모임’ 등 무료법률상담 시스템을 구축했다. 전국 최초로 ‘작은 도서관 갖기 운동’을 이끌고[7], 창원시를 마을도서관 모델도시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했다. 이 일로 1997년 변호사로서는 이례적으로 ‘독서문화상 대통령상(대상)’을 받았다. #

1998년 차정인 변호사는 37세의 나이에 지역주의 타파를 목표로 정치에 입문하여 3년간 활동했다. 당시 민주당 당적으로 영남에서 총선이나 지방선거 당선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창원시(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지역주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첫 선거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노무현 후보가 지지를 밝히고 민주당은 후보를 내지 않고, 무소속 후보로 창원시장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지역주의가 강하게 작동하면서 낙선했다. 선거가 끝난 후 차정인 변호사는 “나의 정치실험은 여기서 마치고 법률가의 삶으로 돌아간다.”고 말하며 변호사로 돌아갔다. #

2.5. 교수 시절

2006년 차정인 변호사는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초빙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그는 공부하고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특히 고시반 지도, 연구실 첨삭지도 등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교류에 대한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8] ‘부산대를 사랑하는 교수모임(약칭, 교수모임)에 가입하여 활발히 활동하며, 총장직선제 투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대학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차정인의 열린법정』(1999), 로스쿨 교재 『형사소송실무』(2012), 박사학위 논문 『공판중심주의 실현방안 연구』(2009) 등이 있다.

2.5.1. 총장직선제 투쟁과 승리

부산대학교는 전국 국립대학에서 유일하게 총장직선제를 유지하며 대학민주주의를 지켜낸 학교이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국립대선진화 방안’(대학이 총장직선제를 유지하는 순간, 정부의 각종 재정지원사업에서 그 대학을 탈락시킴)이라는 미명하에 모든 국립대학을 굴복시켰으나 부산대만은 굴복시키지 못했다. 그 중심에 차정인 교수가 있었다.
차정인 교수는 동료교수들과 210일 동안 총장실 접견실 점거농성을 했다.[9] 기나긴 농성 끝에 총장이 직선제 부활을 약속하며 사태가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총장은 이후 이를 번복하고 간선제를 추진했다. 당시 박근혜 정부의 끈질긴 압력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2015년 8월 17일 교수 한 분의 숭고한 희생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총장직선제 논쟁의 기록』 , 『시대를 열어가는 담대한 지성, 부산대학교』, 2024 등에 잘 나와 있다.

2.5.2. 법학전문대학원장으로 선출

2016년 차정인 교수는 법학전문대학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재임 중 그는 지역 로스쿨 재학생들의 불이익 해소를 위해 나섰다. 특히 ‘변호사시험 장소 부산, 대구, 광주로 확대 실시’ 청원서를 작성하고, 학생들의 서명을 받아 청와대와 법무부를 설득한 끝에 이를 성사시켰다. 이로써 지역 학생들이 장거리를 이동하여 시험을 치르던 불편과 불공정문제가 크게 완화되었다.
2017년 7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그는 제1기 법무검찰개혁위원회(위원장 한인섭)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검찰개혁안, 법무부 개혁안, 검·경 수사권 조정안,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안 등을 마련하여 정부에 제출하며 법제도 개선에 기여했다. 또한 그는 법무부감찰위원회 부위원장과 법제처 법령심사위원으로도 활동하며, 법치주의와 공정한 법 집행을 위한 다방면의 역할을 수행했다.

2.5.3. 대학총장 시절

2020년 차정인 교수는 ‘부산대를 부산대답게!’라는 캐치프레이즈로 부산대학교 총장 선거에 나서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었다. 4년 재임 동안 차정인 총장은 담대한 도전과 리더십을 발휘한 총장으로서 부산대 중흥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산교육대학교 통합[10], QS, THE 등 세계대학평가 순위 급상승[11], 지방대육성법 개정안 국회통과, 글로컬대학 선정[12], 또한, 반도체공동연구소 등 대형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다양한 재정지원사업을 유치하며 대학의 연구 역량 강화와 재정 안정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2023년 부산대학병원 본원과 분원의 파업이 20일간 이어지며 지역 의료대란이 우려되었다. 차정인 총장은 병원 이사장(총장)으로서 즉각 노사 양측을 불러 중재를 시작했으며, 24시간 만에 타결을 이끌어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미얀마 군부 쿠데타로 어려움을 겪던 민족통합정부(NUG)의 요청을 받아들여, NUG 추천 학생들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하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당시 차정인 총장은 “상해 임시정부를 떠올리며 결정했다”고 밝히며 미얀마 민주화세력 지지의사를 분명히 했다.#

차정인 총장은 부산시민들이 부산대를 건학한 정신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종합 정리한 최초의 총장으로 평가를 받는다. 민주언덕 조성, 10월 16일 학교기념일 제정, 시월광장 명명, 부산대학교 역사관 개관, 문창재(윤인구 홀, 리차드위트컴 홀, 요산 김정한 홀) 개관 준비, 박물관 앞 새벽뜰 조성[13], 『부산대학교 학생운동사』 발간 결정 등이다.

이외에도 차정인 총장은 캠퍼스 내 활발한 소통과 학생 중심의 정책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학생들은 그를 “정인햄,” “야망의 상남자,” “갓정인,” “불도저” 등의 애칭으로 부르며 SNS에서 그의 정책과 활동을 공유하고자 했다.#
2024년 5월 10일 총장 이임식을 갖고 퇴임했다.

3. 여담

3.1. 조민 씨 입학 취소 관련

차정인 총장 재임 중, 조 민 씨의 부산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입학 취소를 둘러싸고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거센 공세가 이어졌다. 보수 측에서는 법치주의바로세우기행동연대가 입학취소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정인 총장을 직무유기로 고발했다.# 2020년 국정감사에서 곽상도 의원이 공격하고, 황보승희 의원 일행, 곽상도 의원 일행이 부산대를 항의방문했으나 차정인 총장은 항소심판결일까지 이들 주장에 응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1심 판결 이후 부산대에 공문을 보내 입학취소를 요구했으나, 차정인 총장은 “항소심이 사실심의 최종심”이라는 입장을 밝히며 항소심 판결 선고후에야 입학 취소 예정 처분을 내렸다. 이듬해 2월 대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이 확정되고, 청문주재자의 의견서가 3월에 제출된 후, 조 민 씨에 대한 입학 취소 처분을 시행했다.

반면, 진보 측에서는 조 민 씨를 표적 수사의 희생양으로 간주하며 대학이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고 비판했고, 형사 고소까지 제기했다. 이에 대해 부산대 측은 “당시 입학요강에는 ‘허위 서류를 제출한 자는 입학을 취소한다’고 단정적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허위 여부는 법원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하며, 총장에게 재량권이 없음을 강조했다. 차정인 총장은 “입학 요강은 대학의 공적 약속이며, 이를 지키는 것이 대학의 책무”라고 밝혔다.#

다만, 차정인 총장은 학생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다. 부산대 입학공정위원회는 지원자들의 서류를 전수조사해 조 민 씨의 서류가 합격 여부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음을 통계적으로 밝혀냈다. 이 조사 결과를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장에 제출했다. 국민의힘 소속 교육위 의원들은 부산대의 이러한 조치를 비판했지만, 차정인 총장은 물러서지 않고 “대학은 법과 학칙에 따라 입학 취소를 결정하되, 제출서류의 합격영향 여부를 별도로 조사하는 것은 대학 자율 사항”이라는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다.
국정감사에서 한 국민의힘 의원이 ‘입학 취소는 결과적으로 가혹하다’는 취지의 총장 발언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자, 차정인 총장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며 “법과 학칙에 따라 입학 취소를 하더라도, 교육자로서 마음이 아파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남겼다.#

이 사건과 관련해 양측이 차정인 총장을 상대로 제기된 고소·고발 사건은 모두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4.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79d2cc><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79d2cc>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원 을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12,543 (13.26%) 낙선 (3위)
2002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 경남 창원시장

[[무소속(정치)|
무소속
]]
27,370 (16.62%)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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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총선 (경남 창원시 을) 3회 지선 (경남 창원시장) }}}}}}}}}

[1] 중학교 때 어느날 동아일보를 통해 김옥선 파동에 대한 기사를 접했으나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사회 과목 최균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설명해주었고, 이는 지금도 차정인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마흔 시월, 민주주의를 노래하다』, 2022)[2] 당시 큰형(서울지검 성동지청)은 서울지검 검사로 근무하며 국유지 사기 사건의 배후를 파헤치다 국가권력과 부딪쳤고, 수사 중지 압력을 받았다. 하지만 끝까지 수사를 밀어붙이다 반골검사로 낙인찍혀, 전남 장흥지청으로 좌천되었다.(*당시 동아일보 사회면 기사). 차정인은 이러한 큰형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보다는 ‘큰형이 되게 멋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큰형의 소식을 듣고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암, 그래야지’라고 흐뭇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2022)[3] 큰형은 제주도 4.3사건을 다룬 현기영의 ‘순이삼촌’과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를 담은 윤흥길의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를 동생들에게 주었다. 형제들은 이 책들을 돌려가며 읽었다.[4] 1980년 10월초 차정인이 상식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경찰이 찾아와 따라가니 동래경찰서였다. 아침 여덟시경에 연행되어 가서 열한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형사는 차정인을 부산대 운동권 서열 6위로 파악하고 있다고 해서 실소를 금치 못했다. (2022)[5] 사법연수생 시절인 1987년 4월 새마을연수원에 입소했다가 마지막 날 연수생을 대표해서 발표를 했는데 법조인이 되면 민주화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등의 발표를 했다. 당시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은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이 발표 이후 연수생들 사이에는 시국논의가 활발해지고 노동법학회가 만들어지는 등 호응이 있었다.(2022)[6] 노동조합 명칭은 노동조합법상 합법노조만 사용할 수 있다. 당시 최병렬 노동부장관 취임 후 전국의 전교조 간판을 일제히 철거하도록 지시했고 각 지방노동사무소는 전교조 간판 철거를 위한 압수수색영장을 각 지역의 관할 검찰청에 신청했다.[7] 차정인에게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다. 영남지역 최초로 검사 출신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전국 최초로 ‘작은 도서관 갖기 운동’, 대학 최초로 법조인 출신 직선 총장 등등[8] 2011년 차정인 교수는 부산대학에서 우수 강의교수로서 선정돼 ‘Best Teacher상’을 받았다.[9] 2012.8.29.일 차정인 교수, 신경철 교수 등 ‘부산대를 사랑하는 교수모임’이 주축이 되어 총장실을 점거했다. 점거 장소는 대학본부 5층의 총장집무실 맞은편의 접견실이라 총장실에서 총장의 집무는 가능했다.(『부산대학교 총장직선제 논쟁의 기록』, 2022)[10] 교대와의 통합은 전임 총장 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2020년 차정인 총장 재임 당시 교대 동문들, 교대 교수진, 그리고 교대 비대위 학생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통합이 난항을 겪었다. 이에 차 총장은 ‘클로컬 30 사업’을 활용해 양교 통합을 가속화할 전략을 세웠다. 그는 교대 총장과 MOU를 맺고 반대하는 교대 교수들은 설득하는 한편, 교대 비대위원장과 부산대 총학생회장을 양교통합 T/F팀 위원으로 임명해 회의자료를 제공하고 통합논의에 직접 참여하도록 했다. 이러한 포괄적인 소통과 설득과정을 통해 반대여론은 점차 완화되었고, 마침내 그의 재임 기간 중 양교 통합이 성사되었다.[11] 차정인 총장 부임 이후 부산대학교는 국제적 권위 있는 3대 세계대학평가(THE, QS, A)에서 순위가 급상승하며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THE에서는 15위에서 9위로, QS에서는 21위에서 13위로, A에서는 9위에서 7위로 올라갔다. 특히 THE는 교육 여건, 연구 환경, 연구의 질, 산학협력, 국제화 등 세분화된 지표로 평가하는데, 이러한 순위 상승은 큰 의미가 있다.[12] 지역 균형 발전을 목표로 한 정부의 글로컬대학 프로젝트에서 부산대를 선도적으로 이끌었다. 2023년 첫 공고에서 부산대는 2위로 선정되며 연간 300억 원, 5년간 총 1500억 원의 예산을 확보했다.[13] 차정인 총장은 캠퍼스 환경 개선과 역사적 자산 보존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무슨 일을 하든 건설보다 제거가 먼저다”는 철학을 강조하며, 낡은 상학관 건물을 철거했다. 그러자 수십년간 낡은 건물에 가려져 있던 박물관 석조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철거 부지에는 잔디밭을 조성하고 부마항쟁 발상지임을 기념하는 비석을 세워 ‘새벽뜰’로 명명했다. 이로써 부산대학교도 고려대학교 못지않은 아름다운 석조건물을 가지게 되었고, 현재 박물관 석조건물은 부산대의 대표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