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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7-15 18:00:15

찐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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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 문조(文祖)
시호 의왕(誼王)[1]
융서왕(隆緖王)[2]
작위 청왕(淸王)
찐(Trịnh, 鄭/정)
짱(Tráng, 梉/장)
생몰년도 1577년 8월 6일 ~ 1657년 5월 28일
재위기간 1623년 ~ 1657년 5월 28일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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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찐짱(Trịnh Tráng / 鄭梉 / 정장, 1577년 8월 6일 ~ 1657년 5월 28일)은 대월 후 레 왕조의 정치인으로, 찐 주의 제4대 왕(재위: 1623년 ~ 1657년)으로 봉호청도왕(Thanh Đô Vương / 淸都王)이었다. 1627년응우옌 주에 대한 전쟁을 개시했고, 이는 찐-응우옌 쟁란의 서막이 되었다.

2. 생애

자타이 5년 7월 23일(1577년 8월 6일), 찐뚱(정송)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꽝흥 21년(1598년), 평군공(平郡公)에 봉해졌다.

1599년, 태위(太尉), 청국공(淸國公)이 가봉되었다.

빈또 5년(1623년), 부친 찐뚱이 사망하자 왕위 계승권을 두고 찐씨 일족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고, 찐짱이 최후의 승자가 되어 찐뚱의 뒤를 이었다. 협모동덕공신도장절제각처수보제영(協謀同德功臣都將節制各處水步諸營) 겸 총내외평장중국사(總內外平章重國事), 태위(太尉), 청국공(淸國公)으로 진봉되었다. 같은 해 다시 원수총국정(元帥總國政), 청도왕(淸都王)으로 진봉되었다. 이때 까오방에 웅거한 막 왕조의 황제 막낀코안은 찐 주가 권력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다는 정보를 듣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남하했으나 찐짱은 이를 격패시켰다.

빈또 7년(1625년), 찐짱이 군사를 이끌고 북벌하여 까오방을 점령했고, 막 왕조의 태상황 막낀꿍과 황태자를 살해했다. 막낀코안은 명나라로 달아났고, 사신을 보내 투항했다. 이에 찐짱은 막낀코안이 까오방으로 돌아오는 데 동의했다. 동시기에, 응우옌 주응우옌푹응우옌이 이미 참파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고, 후에, 다낭, 꽝남성, 꽝응아이성 등지를 세력권에 넣게 되니 사실상 하나의 독립 국가를 이루어 찐 주의 통치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에 찐짱은 1627년 여름에 응우옌 주를 공격했고, 양가의 전투는 수 개월을 지속했다.

빈또 11년(1629년), 찐짱은 대원수총국정(大元帥總國政), 사부(師父), 청왕(淸王)으로 진봉되었다.

득롱 5년(1633년), 찐짱은 해상으로 나가 다시 응우옌 주에 공세를 펼쳤으나 패배했다.

즈엉호아 5년(1639년), 찐짱은 대원수총국정(大元帥總國政), 상주사상보(上主師尙父), 공고총단인성청왕(功高聰斷仁聖淸王)으로 진봉되었다.

1642년에서 1643년까지 찐짱은 두 차례 응우옌 주를 공격했다. 첫 번째 전투에서는 네덜란드의 대포를 사용했고, 이에 힘입어 첫 번째 도성장(道城牆)을 공파하는 데 성공했지만 두 번째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푹타이 원년(1643년), 찐짱은 외조카 레 신종을 위협하여 아들인 레 진종에게 선위하도록 했다.

푹타이 6년(1648년), 찐짱은 진종 황제를 데리고 남하하여 응우옌 주를 공격했다. 그러나 쯔엉죽루(長育壘)에서 대패했고, 어림군(御林軍, 찐 주의 군)의 손실이 막대했다. 이때 진종이 붕어했고, 신종이 복위했다. 일부 사람들은 진종의 죽음이 그 전투 때문이었다고 보기도 했다.

쯔엉죽루 전투 이후 응우옌 주의 응우옌푹떤은 반격을 계획했다. 틴득 3년(1655년), 응우옌 군은 찐 주를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현재의 꽝빈성, 하띤성 일대를 점령했다.

틴득 4년(1656년), 찐짱은 손자 찐깐(6대)을 시켜 예안에서 응우옌 주의 군대와 교전하도록 하였다.

틴득 5년 4월 16일(1657년 5월 28일)[A], 찐짱이 병사하니 향년 81세였다. 시호를 융서(隆緖), 묘호를 '문조'(Văn Tổ / 文祖)로 했고, 의왕(Nghị Vương / 誼王)으로 존봉되었다. 찐 주의 왕들이 대대로 미자(美字)를 더하여 최종적으로 위덕은신예문활달량천준세소선지효순신독식엄용곽도집중이칙중위후복전가모국배기조승수내치외부교수헌순하방훈립극수통이모유후엄경도략영단령위진구제생원모굉략풍공위적모업수성립극진기온공인서명윤선철관홍위단광박온수현인홍렬문덕무공심도원산정공모대연휴수택숭훈광업현모승렬의왕(德威恩信睿文豁達量天準世昭善至孝純信篤寔儼容廓度執中貽則重威厚福傳家謀國培基助勝綏內治外敷教垂憲純嘏放勳立極垂統貽謀裕後嚴敬韜略英斷靈威殄寇濟生遠謨宏略豐功偉績保業守成立極陳紀溫恭仁恕明允宣哲寬洪威斷廣博溫粹顯仁弘烈文德武功深圖遠算定功保大延庥垂澤崇勳廣業顯謨承烈誼王)이 되었다.

3. 가족



[1] 자체 시호.[2] 후 레 왕조에게서 받은 시호.[A] 《南風》合刊第廿一卷·第一百二十四期·〈鄭氏世家〉[4] 《大越史記全書》943頁[A] [6] 《大越史記全書》987頁[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