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지한재 池漢載 | |
출생 | 1936년 10월 27일 ([age(1936-10-27)]세) |
경상북도 안동군[1]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영화 배우, 무술가 |
종목 | 합기도, 신무 합기도 |
활동 | 1972년[2]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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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무술가 겸 영화 배우. 이소룡 주연 영화이자 유작인 사망유희에서 4층 합기도 고수 역할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노년의 나이에도 불구, 2020년대까지도 미국에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 영화 출연작
<rowcolor=#000,#000>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1972 | 합기도 | 사범 역 | |
1974 | 흑연비수 | ||
1975 | 여자태권군영회 | ||
1978 | 사망유희 | 4층 - 합기도 고수 역 | |
1979 | 이소룡의 생과 사 |
3. 여담
- 한국 합기 관련 무술의 시조격인 최용술의 초기 제자이자[3] 본인도 한국 합기도의 주요 원로긴 하지만, 항목에도 있듯 최용술이 초기 제자들이 내는 수업료에 따라 내용도 달리 가르쳐주는 등 차별 교육을 했기 때문에 당시 돈이 많이 없던 지한재는 훗날 최용술에 대해 맺힌게 많은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실제 지한재 사범은 최용술 도주에게 야와라를 배웠지, 합기를 배우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래서인지 지한재의 합기도는 최용술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고[4], 때문에 지한재의 합기도를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한편 그가 최용술의 대한기도회를[5] 따르지 않고 대한합기도협회를 창설했다는 점, 발차기를 꺼린 최용술과 달리 발차기의 비중을 높인 신무합기도를 창시했다는 점 등에서 사실상 정통 운운할 것도 없이 다른 무술이라는 의견도 있다. 다만 최용술이 대구에 있는 사이 서울 합기도는 지한재가 이끌고 간 부분도 컸기에 그를 빼고선 얘기가 안되는 부분도 있다. 어찌됐든 이런저런 연유로 현재 대한민국합기도총협회와는 관계가 소원한 편이라고 한다.
- 이소룡이 1인치 펀치를 선보인 롱비치 가라테 선수권 대회에 초청받아 합기도의 술기를 시연했는데 이소룡이 지한재의 기술을 마음에 들어해 무술 교류를 청했다고 한다.
- 사망유희에 출연했을 당시 촬영을 마친 뒤 합기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판단해 자신의 촬영분을 영화에 사용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가 이소룡이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는 뜻으로 허락했다고 한다.
[1] 現 경상북도 안동시[2] 영화배우 기준. 무술가로는 한참 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3] 1949년 최용술 도주를 만나 7년 조금 넘게 배우고 독립해 도장을 차렸다. 1957년 서울 종로에 올라와 차린 도장이 바로 성무관이었다. 다만 본인 회상에 따르면 최용술은 남들에게 지한재가 8개월밖에 못배웠다고 하는 등 대못을 박기도 한 모양.#[4] 기도회 당시 월장낙법 등 현란하고 아크로바틱한 낙법과 발차기를 도입했다가 신무 합기도 때는 다시 최용술과 유사한 술기 형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 손 술기만 가르친다는 것도 특징.[5] 사실 이것도 지한재가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최용술이 지한재는 서울지부장으로 임명시키고 사범부장과 사단법인 이사장은 자기보다 늦게 사범이 된 김정윤을 시켜 섭섭함에 사실상 결별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