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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스웨덴의 말뫼 FF[1]에서 데뷔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2부 리그로 강등되었던 말뫼를 1부 리그로 끌어올리는 활약을 통해 명문구단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장신임에도 불구하고 발재간이 뛰어난데다 경기장 밖에서 할 말 다 하는 그의 태도는 엄청난 스타성을 지녔다. 스웨덴에서는 이러한 원더보이의 활약에 열광했고 단순히 이빨만 센 게 아니라 경기력까지 좋았기에 많은 클럽들이 즐라탄의 영입을 타진했다. 아르센 벵거 감독 또한 매의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결국엔 아약스에 입단하게 된다.
사실, 즐라탄은 아스날의 9번 유니폼까지 받으면서 거의 입단이 성사되는 분위기였다. 계약서에 사인만 남긴 상태에서 아르센 벵거를 처음 대면했는데, 아직 즐라탄의 플레이를 직접 보지 못한 벵거는 시간을 끌며 테스트를 하기를 원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아스날에 입단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즐라탄은 자신의 능력을 확실히 보여주고 싶었기에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축구화를 신고 테스트를 받겠다." 라며 응수했다. 그러나 즐라탄과 함께 아스날에 방문한 말뫼 FF의 하세 보리 단장이 즐라탄을 만류했고, 즐라탄은 "아스날이 나와 사인하고자 하는 생각이 별로 없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입단을 그만뒀다고 한다. 즐라탄은 사소한 문제로 틀어진 이적이어서 당시엔 아쉬움도 있었지만, 이 결정은 후회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잘한 결정이라고 회상했다. 사실 당시 아스날과 사인했으면 즐라탄의 커리어에 흠이 갔을 가능성이 높다. 유망주가 기회를 많이 부여받는 최근의 아스날과는 달리, 당시 아스날은 01-02 시즌 더블, 03-04 시즌 무패 우승을 기록하던 막강한 팀이었다. 공격진은 이미 즐라탄이 훈련장에서 보고 가슴이 설렜다는 레전드 오브 레전드 티에리 앙리, 데니스 베르캄프가 주전이었고 여기에 서브 자원으로 프랑스 국가대표 실뱅 윌토르, 나이지리아 역대 최고의 레전드 공격수 은완코 카누가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당시엔 엄청난 유망주로 평가받던 잉글랜드의 프랜시스 제퍼스가 다섯 번째 옵션으로 있었던 상황이기에 이 막강한 선수층을 뚫고 즐라탄이 기회를 받았을 확률은 매우 낮다.
즐라탄은 아약스를 선택해서 빅리그보다 한 단계 낮은 레벨에서 이른 나이에 주전 기회를 잡고 차근차근 경험과 실력을 닦을 수 있었고, 유벤투스, 인테르를 거치며 익힌 이탈리아에서의 훈련방식[2]은 즐라탄의 기량을 만개할 수 있도록 했기에 즐라탄 본인에겐 아스날의 입단을 거절한 것은 잘한 결정이었다. 기사
스웨덴 리그 역사상 최고 이적료를 기록하며 아약스로 이적한 즐라탄은 마르코 판 바스턴의 번호인 9번 셔츠를 받으며 엄청난 기대를 불러모은다.
그러나 즐라탄은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았고, 아약스의 선수관리 방식 역시 불만이었던 상태였다. 아약스의 네덜란드 선수들은 아약스를 거쳐가는 구단쯤으로 여겼고, 외국 선수들은 챔스 우승도 했던 명문팀에 들어와서 좋아하는 분위기라 팀 분위기가 이상했다고 한다. 이 문제에는 연봉관련 불만도 일조 했는데, 아약스 이적 당시 에이전트가 없던 즐라탄은 하세 보리 말뫼 FF 단장의 말만 듣고 "좋은 조건이겠거니" 하고 쿨하게 사인했다. 하지만 이적 이후 확인해보니 주전 선수 중에 주급이 가장 낮았다. 이 일로 즐라탄은 아버지처럼 따랐던 하세 보리를 극딜하고 지금까지 까고 있는 중. 자서전에서도 한 챕터를 할당해서 디스했다. 또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나는데 2004년 여름에 있었던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A매치에서 즐라탄은 아약스의 주장이었던 라파엘 반 더 바르트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렇지 않아도 즐라탄의 '나르시즘적인 태도' 를 고깝게 여기던 네덜란드 언론은 팀 동료이자 주장이면서 자국 최고 유망주를 크게 부상을 입힌 즐라탄에게 집중포화를 했는데, 사실 평소 거만하고 팀 내 충돌이 많던 외국인 용병이 국가대항전에서 자국 최고 유망주이자 팀동료를 고의로 부상입히면 어느 나라 언론이라도 얌전할 수 없다. 당연히 즐라탄은 분노를 폭발시키며 팀을 떠날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유벤투스 FC로 이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