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중공 해군 제3사단 제3항공대 소속 H-5[1]1대가 1985년 8월 24일 전라북도 이리시 신흥동[2]에 불시착 한 사건.2. 사고
사고는 중공의 H-5 기체 번호 038[추정]이 다른 편대기들과 산둥반도의 해군 기지에서 이륙하는 것으로 시작된다.[4] 승무원은 조종사 소천윤, 후방사수 겸 통신사 유서희, 항법사 손부충이 있었다. 그 후 소천윤은 항법 장치가 고장 났다고 하여 항법사와 통신사를 속이고 대한민국 영공에 들어갔다. 그 후 중공 해군 소속 경폭격기는 귀순을 유도할 대한민국 공군기를 기다리며 선회하다 연료 부족으로 이리시 신흥동 제방 밑에 불시착, 폭격기 조종사 소천윤은 중상, 통신사 유서희는 무사했으며 항법사 손부충과 농약을 치던 주민 배봉환이 사망했다.#이후 소천윤은 중화민국으로 귀순했고 유서희는 다시 중공으로 손부충의 시신과 함께 돌아갔다. H-5 기체는 공군사관학교 야외 전시장에 있다.
2.1. 사고기
사고기인 H-5는 산둥반도에서 훈련중이던 중공 해군 함대 소속 제3사단 3항공대 기체였다. 현재는 가상적기로 쓰이다 퇴역해서 공군군사제 제34호로 지정, 공군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있다.3. 기타
- 불시착 당시 기체가 3조각이 되어 다시붙혀서 공사에 전시 되어있어서 그런가 은근 모형 같다는 사람이 많다.
- 불시착 과정에서 중상을 입은 조종사 샤오톈얀은 원광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었는데, 당시는 원광대학교에 중어중문학과가 개설되기 전이었고 몇몇 화교를 제외하면 당시 이리 시내에서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 없었던지라, 의사 소통을 도울 통역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설령 한문으로 필담이 가능해도 상대가 중상을 입은 만큼 필담을 통한 의사 소통이 곤란했고, 더욱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으려면 의료 지식을 갖춘 통역이 필요했는데, 마침 당시 원광대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중에 화교가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해당 간호사는 사고 당일날 휴가 중이었고, 병원 측에서는 급히 간호사의 집으로 연락을 했지만, 전화를 받은 간호사의 남동생은 간호사가 가족들과 함께 피서를 떠났다고 전하면서,[5] 자신이 한의대생[6]이므로 필요하다면 자신이 통역을 담당하겠다고 자처했다. 그렇게 하여 간호사의 남동생이 원광대병원에 도착했고 뒤이어 소식을 듣고 도착한 이리 화교소학교 교장도 통역에 합류했다. 샤오톈얀은 완치된 후 1986년 1월 국외추방 형식으로 대만 측에 인계되었다.
- 한편 부상을 입지 않은 통신사 류슈이는 이리 시내 모처에서 합동심문조로부터 심문을 받았는데, 당시 현지에 주재하던 보안부대, 안기부 및 치안본부 대공분실 역시 중국어 가능자가 없었던 건 마찬가지라, 합심조는 류슈이와 한문 필담으로 문답을 주고받았다. 류슈이는 이 자리에서 중국 대사와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조종사 샤오톈얀이 한국 쪽으로 기수를 돌릴 줄은 전혀 몰랐으며, 자신은 본국으로 귀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한국 정부는 제3국 외교 채널을 통해 이를 중국 측에 통보하면서 영공 침범 및 한국인 사망자 발생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한편 류슈이와 대만 측 인사와의 접촉을 차단했는데, 당시 주한 대만 대사관에서 류슈이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한국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7] 이후 류슈이는 불시착 과정에서 사망한 쑨푸춘의 시신과 함께 홍콩을 거쳐 중국으로 귀환했다.
- 한국인 사망자 배봉환 씨는 이날 논에 제초제 살포 작업을 하던 중 한낮 더위를 피해 집에 들어가 쉬고 늦은 오후에 논을 살피러 다시 나왔다가 참변을 당했다. 당시 밖에 나와 있다가 사고 현장을 목격한 마을 주민 김성희 씨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날아들기에 급히 배 씨가 있는 쪽을 쳐다 보았는데 배 씨가 순식간에 사라져 있었고 그 자리에 흙먼지가 일었다고 말했고, 또다른 주민인 최희동 씨는 비행기가 비틀거리며 불안하게 날다가 갑자기 앞부분이 논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서 배 씨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고 말했다. 한편 최 씨는 이 사고로 집의 담장 일부가 파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 사고 다음날인 8월 25일에는 대한민국 공군 및 군산 주둔 미 공군 관계자들, 취재를 나온 언론사 기자들 및 주한 외신 특파원들이 현장에 몰려들었고 마침 이 날이 일요일이라 뉴스 속보를 듣고 구경 나온 시민들로 사고 주변 현장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게다가 여름철이라 현장에 모인 사람들이 시원한 군것질거리를 찾아 마을에 있는 가게를 드나드는 바람에 가게에 있던 아이스크림, 음료수들이 금세 동이 나버렸고, 때문에 구경하러 온 시민들은 뜨내기 잡상인들이 파는 군것질거리를 바가지를 써 가며 사 먹기도 했다.[8]
- 동아일보의 김충식 기자가 이 사건과 비행기 조종사의 신병 처리 결정 문제를 특종 보도했는데, 이것을 트집잡은 국가안전기획부가 동아일보 정치부장 이상하, 편집국장 이채주, 그리고 김충식 기자까지 남산의 안기부 지하실에 붙잡아 가서 3박 4일 동안 가혹하게 고문했다.사건 관련 기사 이 기자 고문 사건이 1986년판 미국 국무부 인권보고서에 보고되기도 했다.
- 이 사건 이전에도 중국 인민해방군 군용기 조종사가 비행기를 몰고 한국으로 넘어와 대만이나 미국 등 제3국으로 망명을 요청하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당시 인민해방군 해, 공군에는 한때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가 마오쩌둥에 반기를 들고 소련으로 탈출하다가 추락사한 린뱌오의 추종 세력이 많았던지라, 당의 감시와 견제가 심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이후 사고가 일어났던 마을 근처로 전라북도 농촌진흥원(현 전북특별자치도 농업기술센터)이 1988년 이전해 온다.[9]
[1] IL-28의 중공 생산 명칭[2] 현 전북특별자치도 농업기술센터 인근.[추정] [4] 물론 중공에서의 마지막 비행이다.[5] 지금이야 휴대폰으로 연락하거나 메시지를 보내서 불러들이면 그만이지만, 당시는 1980년대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한참 전이었고 무선전화기 수화기와 구분 안 가는 무식한 크기의 당대의 휴대폰조차 최상류층도 접하기 어려운 신문물이었다.[6] 당시 원광대 한의대 한의예과 1년 재학.[7] 당시는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앞둔 민감한 시기였기에 괜히 중국을 자극하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노태우 정권의 북방 정책 이전에 이미 전두환 정권 때부터 물밑에서 공산 국가지만 소련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중국, 폴란드, 유고 등과 관계 정상화를 모색하고 있던 터였다.[8] 이날은 일요일이라 소매점에 물품을 공급하는 영업점들이 대부분 휴무 중이었다.[9] 당시에는 동산동에 소재. 신흥동으로 이전된 이후 구 농촌진흥원 청사는 철거되지 않은 채 2024년 기준 36년째 폐건물로 방치 중이다. 폐건물/목록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