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주제 안토니우 바헤투 트라바수스 (José António Barreto Travassos) |
생년월일 | 1926년 2월 22일 |
사망년월일 | 2002년 2월 12일 (향년 75세) |
국적 | 포르투갈 |
출신지 | 리스본 |
포지션 |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1cm | 69kg |
소속팀 | CUF (1944-1946) 스포르팅 CP (1946-1959) |
국가대표 | 35경기 6골 (1947-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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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리스본에서 태어난 트라바수스는 CUF을 거쳐 1946년 스포르팅 CP에 합류했다. 원래 트라바수스는 이때 FC 포르투의 이적에 거의 합의했고 스포르팅은 하이재킹을 시도했다. 스포르팅은 트라바수스와 극비리에 만나면서 결국 그의 마음을 돌리는 데에 성공했다.이런 우여곡절을 거쳤던 트라바수스는 스포르팅에서 13시즌을 보냈고 제주스 코헤이아, 페르난두 페이로테우 등과 5개의 바이올린(Cinco Violino) 공격진의 멤버로 활약하며 8회 프리메이라 디비장, 2회 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을 경험했다.
1947년 2월에 있었던 SL 벤피카와의 경기에서 트라바수스는 해트 트릭을 기록하며 스포르팅의 6:1 대승에 크게 공헌했고 그는 이 경기의 활약으로 금시계를 선물받았다.
2.1.2. 국가대표
트라바수스는 1947년 1월 5일, 리스본에서 열린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포르투갈 대표팀 데뷔 경기를 치렀다. 경기는 양팀의 2:2 무승부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1월 26일에 있었던 스페인과의 홈경기에서 트라바수스는 2골을 넣어 포르투갈의 4:1 승리에 기여했다.포르투갈은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스페인과 본선 진출권을 놓고 격돌했다. 1950년 4월 9일 자모르에서 열린 홈경기에서 트라바수스는 후반 7분, 승부의 균형을 맞추는 동점골을 넣었고 제주스 코헤이아가 2분 뒤에 역전골을 넣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후반 37분에 아구스틴 가인사에게 동점골을 허용해서 2:2 무승부로 경기가 종료되었고 일주일 전의 1:5 패배로 인해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2.2. 이후
트라바수스는 냉장고 사업을 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트라바수스는 득점 능력과 함께 드리블과 패스에 장기를 보였다. 그리고 유럽에도 그의 이름이 알려져서 그는 유럽의 조(Zé da Europa)라는 별명으로 불렸다.1951년, 한 영국 언론은 포르투갈의 당시 축구 실력이 탑급은 못 들지만 트라바수스만큼은 예외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항상 트라바수스는 변함 없는 헤어스타일만큼 그의 발도 변함 없이 빛난다고 썼다.
4. 뒷이야기
- 트라바수스는 상대 수비수들의 거친 파울로 반월판의 4분의 3을 잘라냈다.
5. 수상
5.1. 클럽
- 프리메이라 디비장 우승 8회: 1946-47, 1947-48, 1948-49, 1950-51, 1951-52, 1952-53, 1953-54, 1957-58(스포르팅 CP)
- 타사 드 포르투갈 우승 2회: 1947-48, 1953-54(스포르팅 CP)
- 프리메이라 디비장 준우승 1회: 1949-50(스포르팅 CP)
- 타사 드 포르투갈 준우승 2회: 1951-52, 1954-55(스포르팅 CP)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